2022-48. 요셉의 시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45:4~8
설교일시 2022-11-27
오디오파일 s20221127-2.mp3 [5618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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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시간
창 45:4-8
(2022/11/27, 대림절 제1주)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위험 사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기다림의 절기가 시작됐습니다. 기다림은 그리움입니다. 우리 속에 주님에 대한 갈망이 있는지요?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쫓기듯 사느라 우리가 길 가는 사람임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영혼이 늙어버린 것이라지요? 아무리 애써 봐도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며 새로운 변화에 몸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정신적 퇴락의 징조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산다는 것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빌 3:13b-14)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지만, 거기에 도달하려면 무수히 많은 작은 봉우리들을 넘어야 합니다.

위기가 아닌 시대는 없었지만 지금처럼 난감한 시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상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어느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 차원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과학 기술이 결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터무니없는 낙관론을 펼치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삶을 전환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절제’(egkrateia)입니다. 자기 욕망과 열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능력 말입니다. 그러나 소비사회의 신민인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습니다. 욕망의 벌판을 달리느라 모두가 지쳤습니다.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은 퇴화되었고 서로 돌보며 살아야 할 이웃은 귀찮은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모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삽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는 불안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위험 사회입니다. 산업 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삶에 지친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 며칠 전 신촌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60대와 30대의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융어는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이재영 옮김, 김영사, p.9)고 말했습니다. 고통을 보고 외면하는 사람인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인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일 겁니다. 사회적 고통은 빨리 처리해버려야 할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마치 통증이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처럼, 사회에 만연한 아픔은 사회의 건강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신호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외면하시기는커녕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뛰어드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주눅 든 채 사는 이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기다린다면 주님이 하시던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고통에 반응할 수는 없지만, 아주 작은 일부터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주님의 마음에 깊이 접속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마음 헤아림
대림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마음에 접근하기 위한 몇 가지 우회로를 걸어보려 합니다. 먼저 용서와 화해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요셉 이야기를 하려면 그 아버지인 야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인 에서와 참 대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에서는 호방하고 씩씩한 들사람이었고, 야곱은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는 그냥 두어도 제 앞가림을 잘 할 사람처럼 보였지만 야곱은 제 앞가림도 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마음은 취약한 아들에게 기울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설득해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게 만듭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분노로 몸을 떱니다. 형제간에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직감한 리브가는 야곱을 외가가 있는 밧단아람으로 떠나보냅니다.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야곱을 가리켜 “어쩔 수 없이 길 위의 사람이 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낯선 것, 생소한 것, 미지의 것, 서먹한 것을 꺼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집을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이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시련이자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낯선 광야에서 홀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의 두려움 속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승우 선생은 그 장면을 이렇게 그립니다.

“거의 최초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존재, 고아이고 나그네가 된 시간에, 크게 두렵고 깊이 외로운 그의 밤 광야의 자리로 그분은 찾아왔다. 찾지 않았는데 찾아왔다. 마치 그가 가장 두렵고 가장 외로워지는 처지에 놓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p.202)

그에게 오신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을 다독이며 몇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 ‘내가 네게 복을 내리겠다’. 그 밤의 만남은 야곱의 가슴 속에 들어온 꺼지지 않는 빛이었고 언제든 돌아가 안길 수 있는 영혼의 고향이었을 겁니다. 밧단아람에 도착한 그는 무려 20년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에 가정을 이루어 많은 자식을 얻었고, 재산도 꽤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외삼촌인 라반의 아들들은 대놓고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고 부자가 되었다고 수근거렸습니다. 야곱을 대하는 라반의 태도도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친밀했던 가족 관계에 재산 문제가 결부되자 야곱은 철저히 외부자 취급을 받습니다. 그는 언제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취약한 존재였습니다. 위기를 감지한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귀향하는 길을 택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형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합니다. 브니엘에서의 두 형제의 만남과 화해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의 하나입니다. ‘귀향과 더불어 야곱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시련이 있었습니다.

• 경쟁하는 형제들
문제는 아들 요셉을 향한 야곱의 편애였습니다. 야곱은 늘그막에 얻은 아들 요셉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다른 형제들과 구별했습니다. 다른 아들들의 마음에 그림자가 깃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편애 혹은 차별은 누구에게나 불유쾌한 경험입니다. 차별하는 아버지가 문제지만 다른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동생을 미워합니다. 권력이 비대칭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인도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를 내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벨을 더 미워했습니다. 그 미움이 결국 형제 살해로 귀결되었습니다. 아벨을 죽임으로 가인은 하나님께 복수한 셈입니다. 이게 미묘한 지점입니다. 폭력에의 열정은 늘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게로 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 다른 형제들의 가슴에 그늘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해맑은 무지, 이게 요셉의 소년 시절의 모습입니다. 그는 형들과 함께 양을 치면서 알게 된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했습니다. 형제들은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창 37:4). 어느 날 요셉이 들려준 꿈 이야기는 형제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꿈에서 밭에서 곡식단을 묶는 데 자기가 묶은 단이 우뚝 일어서자 형들의 단이 자기 단을 둘러싸고 절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였다”(창 37:8).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런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또 다른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자기에게 절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치 빠른 아버지는 아들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짐짓 요셉을 꾸짖었지만 그의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운명의 날이 찾아옵니다. 형들과 양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요셉은 명랑하게 형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는 세겜 들판으로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도단 들판에 이르러서야 형들을 발견합니다. 멀리서 그가 오는 것을 본 형들은 그를 죽여 버리자고 모의했습니다. 가인 이후 또 다른 형제 살해가 벌어질 찰라였습니다. 하지만 맏형인 르우벤의 중재로 형제들은 요셉에게서 화려한 옷을 벗기고 그를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편애의 상징이었던 화려한 옷이 벗겨져 그는 벌거벗긴 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스무 냥을 받고 팔아버렸고, 상인들은 더 많은 돈을 받고 요셉을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화려한 옷이 벗겨지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종으로 팔리는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며 우리는 요셉이 겪은 운명의 변전에 놀랍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또한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창 39:2a). 우리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전락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요셉은 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는 배려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낮아짐이 그의 인생에 준 선물입니다. 술 맡은 시종장의 꿈을 해석해준 것을 계기로 하여 그는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기근에 대비하게 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총리가 되었습니다. 낮아짐이 급격했던 것처럼 높아짐도 급격합니다.

• 고통, 화해로의 초대
이제 우리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부족할 것 없이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지만 은결든 그의 마음에 진정한 행복은 없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은 자라는 쓰린 기억은 고요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늘 혹은 응어리였습니다. 그 것이 해소되는 계기는 놀랍게도 가나안 땅과 애굽에 들이닥친 기근이었습니다. 식량을 구할 길이 없었던 야곱 일가는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고, 요셉은 형제들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을 겁니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 결국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이 매우 취약해진 상태로 자기 앞에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었을 겁니다. 상처의 기억이 되살아나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시련을 통해 인내를 배웠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몇 차례 형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으면서 그들의 행태를 유심히 살핍니다. 그리고 마침내 친동생인 베냐민까지 애굽에 데려오도록 만듭니다. 베냐민을 보고 요셉은 숨어서 웁니다. 요셉은 울컥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숨겨두었다가 그를 도둑으로 단정짓고 종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다와 형제들은 자기들에게 닥친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겪으면서 기억의 강물 깊이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던 부끄러운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고통과 시련은 거울이 되어 자기들의 삶을 비추어보게 만든 것입니다. 애원하던 동생을 차갑게 외면했던 것이 아프게 상기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웃음을 잃은 채 살던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유다가 나서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채 사신 아버지에 대해 말하면서, 베냐민까지 없어지면 아버지는 숨이 넘어가고 말 거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자청합니다. 진정한 참회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침내 요셉의 마음에 드리웠던 그늘이 걷혔습니다. 그러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자기 시련의 의미가 깨달아졌습니다. 자기가 겪었던 시련은 자기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큰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형들의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비로소 형제들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고는 두려워하는 그들을 오히려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까지도 은총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될 때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던 고통도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형제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늘 시련의 시간을 지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주님의 은총의 손길 앞에 그 시간을 맡기십시오.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용서하고 화해할 용기를 내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1월 27일 12시 11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