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
김재흥(2026-07-26)
듣기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그 여자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 "웬일이십니까?" 하거나, "어찌하여 이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
1. 피서와 피정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제 7말 8초, 본격적인 여름휴가 기간이 되었습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 휴가를 많이 가지요. 여름휴가를 우리는 피서(避暑)라고 부릅니다. 더위를 피해 쉬는 시간을 말합니다. 프랑스 언어권에서는 여름휴가뿐 아니라 휴가를 바캉스(Vacance)라고 하지요. 영어로는 Vacation이지요. 이 말들은 모두 라틴어 Vacatio에서 나온 말입니다. ‘비우다’라는 뜻입니다. 일상의 업무나 책임에서 벗어나 빈 상태를 만드는 것이 바캉스입니다. 많은 일과 복잡한 문제들이 하나둘 쌓여 우리의 머리와 마음속이 잡동사니로 가득 찬 서랍처럼 새로운 것을 더 넣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바캉스에 대한 욕구가 커집니다. 떠나고 싶고 비우고 싶어집니다.
가톨릭에서는 피정의 전통이 있습니다. 피정(避靜)은 ‘피하여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뜻입니다.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피정입니다. 저도 피정에 참여해본 적이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3일 동안 휴대폰도 켜지 않고 묵언과 관상기도와 말씀 묵상과 산책을 했습니다. 잠도 자그마한 방에서 혼자 잤습니다. 분주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복잡했던 머리가 청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3일 후 한결 홀가분해져서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런 비움의 시간은 삶에 필수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온통 채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끝없이 보고 듣고 먹고 구매하고 소유합니다. 물론 잠을 자면 보고 듣고 먹고 구매하고 소유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잠은 비움이 아니라 비의지적 ‘하지 않음’입니다. 그에 비해 비움은 단순히 ‘하지 않음’이 아니라 적극적 정화행위입니다. 이번 휴가를 보내실 때 평소보다 잠도 푹 주무시고 그것을 넘어 비움의 시간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2. 예수님과 우물가의 여인
어느 날 정오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 성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성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피로하셨던 예수님만 우물 옆에 남으시고 나머지 제자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우물 옆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이스라엘의 정오의 볕을 맞으며 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도 없이 우물 옆에 앉아 계셨고 때는 점심때였습니다. 뜨겁고 목마르고 배고픈 예수님. 왠지 불쌍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때 마침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우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사람들이 거의 우물에 나오지 않는 정오에 홀로 나온 것도 그런 사연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보통 여인들은 아침과 저녁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우물가는 단지 물만 길어가는 곳이 아니라 아침에는 밤사이의 안부도 묻고 저녁에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사귐과 대화의 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 속에 진정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 기꺼이 그 여인의 영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칠 때쯤 마을로 양식을 사러 들어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지고 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다시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기가 놀라운 사람을 만났다고, 아무래도 그가 그리스도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다는 것은 그 여인이 더 이상 목마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물을 마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만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소개했다는 것은 그 여인이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3.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의 양식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마을에서 가져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며 말했습니다. “랍비님, 잡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하며 의아해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드신 양식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뜨겁게 볕이 내리쪼이는 정오, 우물 옆에 혼자 앉아 계시던 뜨겁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기운이 없어 보이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힘 있고 당당하고 생기가 넘쳐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사는 자가 맛보는 보람 속에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믿음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드신 양식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을 가지고 말해본다면, 영혼이 목마르고 허기진 자의 갈증과 허기를 해결해 주는 것, 그래서 그로 하여금 그의 과거와 사람들의 평가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서서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해 주신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4. 무엇을 먹으며 살고 있는가?
18,19세기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브리야사바랭은 그의 책 「미각의 생리학」(1825년 발행)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를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그가 먹는 음식은 그 사람의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며, 결국 음식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과 문화와 배경까지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에서 그 말을 조르바라는 사람을 통해 이렇게 변주했습니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배설물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디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106쪽) 장 브리야사바랭이 음식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면 카잔차키스는 그 먹은 음식으로 행한 일에 의미를 둔 것입니다. 무엇을 먹는가도 중요하고, 그 먹은 것으로 무엇을 행하는가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라는 하늘의 양식을 드셨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욕망을 먹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욕망과 욕망성취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합법적이고 사회에도 유익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요. 그러나 욕망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타자와 공동체를 도구화하고 수단화할 뿐 아니라 결국 그 자신도 욕망의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교회 밖 사람들을 별로 만날 일이 없는데 목욕탕을 가면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1, 2년 목욕탕에 갈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식.’ 사람들이 주식 이야기밖에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정책을 가지고 싸워도 그것과 연관된 주식을 이야기하고, 전쟁이 일어나도 그것과 연관된 주식 이야기만 합니다. 정책의 공공성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식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요. 모든 관심이 주가의 등락에만 있고 사회와 다른 생명의 아픔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힘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그렇게 자주 가던 농활봉사나 건축봉사를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농활과 건축봉사는 주로 여름수련회나 토요일에 많이 갔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되고 나니 수련회도 가지 못하고, 주일 설교준비로 인해 토요일에도 시간을 못내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더 일찍 설교준비를 마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설교문을 다 외우지 못하더라도 앞으로는 농활은 가야겠다.’ 농활봉사나 건축봉사를 가면 물론 힘이 듭니다. 특히 여름에 일하다보면 땀으로 속옷까지 다 젖습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한가득 쌓여 있는 감자나 옥수수를 볼 때, 피사리를 끝내고 가지런해진 넓은 논을 볼 때,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건물을 볼 때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물론 저녁밥도 평소보다 더 맛있게 먹었지요.
서두에 비움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늘의 양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릇된 욕망을 비운 사람만이 하늘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릇된 욕망을 양식으로 삼고 그 욕망의 힘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뭇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제 그릇된 욕망은 그만 먹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라는 양식을 먹으며 살아갑시다. 그 양식이 주는 힘으로 쓰러진 생명들을 다시 온전한 생명으로 일으켜 세우며 살아갑시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선물처럼 주시는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시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청파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