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는 메시야다
김재흥(202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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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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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로움과 욕망의 질주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 외로우십니까? 지난 11월에 전 통계청인 국가테이터처가 올해 처음 우리나라 국민들을 대상으로 고립감을 조사했는데 국민의 40%정도가 ‘외롭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은 퍼센티지입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높게 나왔고, 여성이 남성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온라인 관계를 많이 맺고 있는 젊은층 또한 밝고 화려하고 단란한 타인의 게시물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그것 때문에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전 국민의 40%만 외로움을 느끼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며 그 빈도와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겠지요. 외로움의 보편성을 시인 정호승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시인은 인간은 본디 외로운 존재라고, 그 외로움을 견뎌야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인간은 함께함을 통해서도 힘을 얻고 성장하지만 홀로 있음을 통해서도 힘을 얻고 성장합니다. 그런데 외로움 중에는 문제가 되는 외로움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 속에 빠진 이들이 있습니다. 정신적 질병에 의한 외로움이나 경제적 빈곤에 의한 외로움 등은 누군가 도와주어여야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외로움부’를 신설했습니다. 외로움을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국가의 문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일본 또한 지난 2021년에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외로움에 대해 국가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로움부와 고독·고립장관을 통해서 외로움이 얼마나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외로움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사회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함께 해결해나가야 하는 문제로 접근한 것은 아주 올바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과도한 주식 투자입니다. 코스피(한국종합주가지수)가 처음으로 4,000을 넘었다지요? 주가지수가 급격하게 올라가다보니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들도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포모(Fear Of Missing Out), 나만 뒤처질 것이 두려워 많은 이가 주식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리하게 은행에 대출을 받아서까지 투자하는 이가 많아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빚투, 빚을 져서 투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식투자는 경제를 순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빚을 지면서까지 하는 주식투자는 주가 하락시 한 개인의 삶을 무너트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 사회 안정성은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나라에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통계와 주식 투자하는 사람이 늘어간다는 뉴스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망이 커질수록 더 외로워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마장의 경주마가 떠올랐습니다. 옆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눈가리개를 쓰고 오로지 앞만 보고 죽어라 달리는 경주마. 옆에서 달리던 친구 말이 쓰러져도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목표만 보고 혼자 죽어라 달리는 경주마. 오늘 우리가 꼭 그 경주마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외롭다’ 말하면서도 욕망의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
2. 마리아의 찬가
2천년 전 로마가 무력을 앞세워 유럽과 이스라엘이 포함된 지중해 전역을 식민지배하던 시절, 주님의 천사가 이스라엘의 나사렛 동네에 살던 마리아라는 처녀에게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천사가 말한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 다윗의 왕위를 이어갈 존재는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는 ‘마쉬하’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가 기름부음을 받았지요. 그런데 메시아는 그보다 넓게는 구원자와 해방자를 의미합니다. 처음에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약혼은 했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 남자를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 자체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냥 아기도 아니고 메시아를 낳게 된다니 누구인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이내 그 놀라운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말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로 알려진 노래를 부릅니다. 마리아의 찬가의 핵심적인 내용은 51,52,53절인데 마리아는 자신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실 메시아께서 다음과 같은 일을 행하실 것이라 예언하듯 말했습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를 보면 다 완료형입니다. ‘흩으셨으니’, ‘높이셨습니다’, ‘떠나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은 헬라어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마리아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기에 히브리어(아람어)로 말했겠지요.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완료형은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런 것을 ‘예언적 완료’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메시아가 마음이 교만한 제왕은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여주실 것이며,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해주시고 부자들은 빈손으로 떠나보내실 것이다.’라고 강하게 확신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혁명적 믿음이었습니다. 높은 자를 낮추고 낮은 자를 높이는 천지개벽 같은 혁명. 그리고 마리아의 믿음은 평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사야의 예언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예언을. 그런데 그런 세상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사자가 어린양을 먹지 않고 풀을 먹을 때 옵니다. 곧 사자가 자기의 욕망을 줄일 때 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자와 같은 제왕과 부자들이 알아서 자기의 욕망 줄일 것이라 믿지 않았기에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낮추고, 그들에 의해 비천한 삶을 강요받던 낮은 자들을 높여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예언처럼 사셨습니다. 높은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력을 가지고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만의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왕과 부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나눔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린 자를 보면 기적을 베풀어서라도 먹여주셨고,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과 같은 낮은 자를 보면 주와 선생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심으로 그들을 높여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마리아의 꿈이었으며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예고편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마리아의 찬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마리아의 꿈과 예수님이 이루어가시던 일이 오늘 우리들의 꿈이 되고 우리들이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3. 메시아는 메시야
일본 드라마 중에 <심야식당>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2009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19년 시즌5까지 나온 인기 드라마였습니다. 도쿄 신주쿠 골목에 있는 작은 식당이 주요 배경입니다. ‘마스타’라고 불리는 요리사가 혼자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정해진 메뉴가 있지만 손님이 다른 메뉴를 요청해도 가능하면 다 만들어줍니다. 밤12시에 오픈해서 아침 7시에 문을 닫습니다. 그 시간에 누가 찾아오겠냐 싶지만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밤늦게 일을 마친 샐러리맨들, 새벽까지 일한 노동자들, 술집 종업원처럼 사회의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주린 배와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심야식당을 찾아옵니다. 마스타는 손님들을 위해 요리를 만들어주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민과 안타까운 사연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따스한 마음이 담긴 조언과 위로의 말을 전해줍니다. 그 심야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금세 단골이 되고 단골들은 하나의 작은 커뮤니티를 이룹니다. 단골손님들은 서로의 이름과 직업도 알고 있지요. 새로 온 손님은 수줍게 자신이 가수 지망생이라 말하고 며칠 뒤에 작사가 손님은 그를 위해 가사를 써주고 어느 날 식당에 모인 손님들은 그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응원해주는 식의 일이 심야식당에서는 종종 일어납니다.
마스타는 밤 12시에 영업을 시작할 때면 식당 앞에 달린 간판등에 불을 켭니다. 그 등에는 일본어로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메시めし’, ‘밥’이란 뜻입니다. 보통 밥집을 일본어로 ‘메시야めしや’라고 합니다. ‘や야’는 ‘○○하는 집’이란 뜻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그 등에 불이 켜지는 장면을 보다가 ‘아, 저거구나. 우리의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저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네의 이름은 베들레헴, 번역하면 빵집이었습니다. 빵은 그 당시의 밥이었으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의 이름은 일본어로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 말씀하셨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나의 몸이니 받아먹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손수 아침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많은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오늘 말씀의 맥락 속에서 말해 보자면 그것은 주린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밥집 메시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교회는 신의 무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문화권인 서양에서는 무덤에 십자가를 세우지요. 니체는 그 무덤처럼 커다란 십자가가 달린 커다란 건물을 신의 무덤이라 말한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더 크고 더 높아지려 할 뿐 교회의 뿌리인 예수의 정신, 낮은 자리로 내려가 주린 사람들을 먹이려는 메시야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 성취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고백하는 한 교회는 신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교회들이 욕망을 줄이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 주린 이들을 먹이려 노력할 때 교회는 메시아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는 메시야-생명의 밥집이 될 것입니다.
욕망의 외로운 질주를 하는 세상을 탓하기에 앞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부터 나의 욕망을 줄이고 주린 너를 먹이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의 마음으로 서로를 먹이려 할 때 외로움은 줄어들고 이 세상은 보다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욕망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며 지치고 주린 이들을 위해 생명의 밥집-메시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에, 우리도 누군가에게 다가가 주님처럼 생명의 밥집-메시야가 되어 줄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