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무엇인가?
김재흥(202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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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올 때에는, 보니, 이미 강의 양쪽 언덕에 많은 나무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 아라바로 내려갔다가,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이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면, 그 물도 깨끗하게 고쳐질 것이므로, 그 곳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될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살 것이다. 그 때에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느라고 강가에 늘 늘어설 것이다. 어부들이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그물을 칠 것이다. 물고기의 종류도 지중해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와 똑같이 아주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사해의 진펄과 개펄은 깨끗하게 고쳐지지 않고, 계속 소금에 절어 있을 것이다. 그 강가에는 이쪽이나 저쪽 언덕에 똑같이 온갖 종류의 먹을 과일 나무가 자라고, 그 모든 잎도 시들지 않고, 그 열매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것은 그 강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약재로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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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의 의미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5월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우리 청파교회의 설립기념주일입니다. 올해는 117주년입니다. 상동교회의 양우로더 여사와 이필주 전도사가 서울역 서쪽에 있던 연화봉 부근에 와서 전도하며 1907년 봄에 작은 기도처를 마련하고 작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작았던 모임이 커지자 1908년에 연화봉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 교회가 청파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청파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탄압으로 교세가 약화되었던 적도 있었고, 6.25 한국전쟁 때는 담임목사가 납북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산업화 시기와 군사정권 시기와 민주화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작은 기도처에서 교회 모임을 시작했던 양우로더 여사와 이필주 전도사는 그 교회가 117년이 지나 오늘과 같은 교회가 될 줄 알았을까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덕이며, 교회를 위해 헌신한 믿음의 선배들 덕입니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은 교회설립기념일을 맞아 교회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청파교회 건물 정면 상단에는 네 개의 동판이 붙어 있습니다. 제일 왼편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두 사람이 나무를 심는 모습이, 그 옆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이, 제일 오른쪽에는 한 가족처럼 보이는 이들이 어울려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네 장면은 교회의 다섯 가지 지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의 5대 지표는 예배, 복음, 교육, 친교, 봉사입니다. 우리교회 첫 번째 동판에는 예배와 복음이 함께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5대 지표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예배, 레이투르기아. 우리의 생명이요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정성스럽게 예배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둘째 - 복음, 케리그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셋째 - 교육. 디다케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넷째 - 사귐. 코이노니아입니다. 복음의 정신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다섯째 - 봉사. 디아코니아입니다. 복음의 정신을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봉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지난 117년 동안 충실히 예배와 복음과 교육과 봉사와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온 청파교회가 앞으로도 진정한 예배와 복음과 교육과 봉사와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2. 생명의 나무, 죽음의 나무
이제는 성서 속에서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전 587년 유다는 제국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많은 유대인은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가 고된 노동을 견디며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소중한 것을 잃은 뒤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요. 바벨론에서 살던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제사장 출신의 예언자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14년째가 되던 해에, 주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그의 영혼이 이스라엘 땅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가서 보니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전보다 더욱 크고 웅장하게 지어졌는데, 성전 바닥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큰 강을 이루어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에스겔로 하여금 그 놀라운 광경을 보게 한 천사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강물은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다. 물고기가 넘쳐날 것이며,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어부들이 강가에 늘어설 것이다. 그리고 강가 양쪽 언덕에는 온갖 종류의 과일이 열리는 나무들이 자랄 것인데 사람들은 그 열매를 먹으며 그 이파리는 약재로 쓸 것이다.’ 에스겔이 생각했을 때 바른 성전은 생명수가 넘쳐나는 곳이며, 죽어가던 것이 되살아나는 곳이며,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로마에 박해를 받던 시절에 사도 요한도 에스겔이 보았던 생명나무의 환상을 똑같이 보았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생명나무’ 그것이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에스겔과 요한이 바라보았던 생명나무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비개신교인 젊은 세대에게 한국 개신교회를 신뢰하느냐 질문했을 때 80% 이상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변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교회는 사라질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 교회 다녀요’라고 이야기했을 때 ‘아니 왜 교회를 다니세요?’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 언론에 등장한 개신교회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런 소리를 들을 만도 합니다. 자신의 정치 이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고, 반대 의견을 가진 이를 향해 ‘밟아 밟아’ ‘죽여 죽여’를 서슴없이 외치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벌이를 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한두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어 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교회를 극우적 집단, 증오와 혐오의 집단, 부패하고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생명나무가 아니라 죽음의 나무에 가깝습니다.
3. 거대한 문제, 작은 우리
주중에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습니다. 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 취재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여 기자가 잠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만 러시아군에 발각이 되었고 전기고문을 받고 장기가 적출된 채 시신으로 우크라이나에 송환되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죽음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명과 평화와 정의라는 가치를 저버린 세상인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들, 계속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오지 않는 지구의 기온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기후 재앙들, 국민이 국가를 한 걸음 진보시키면 두 걸음 퇴보시키는 부패한 권력집단들, 지금 인류 공동체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인 생명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이름으로 생명과 평화를 무너뜨리거나 아예 그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부흥만을 외치는 교회들. 그런 세상과 사회와 교회들을 보노라면 갑자기 무력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치는 생명과 평화의 소리는 얼마나 작은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작은 먼지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 떠오른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고,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막막함을 느끼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당신께서 맞서야 하는 세상과 이루어야 할 일에 비하여 당신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셨기에 그 작은 겨자씨가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변하는 모습과 가루 서 말에 살짝 섞은 누룩이 그 많은 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모습을 의미 있는 모습으로 바라보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겨자씨 같이 작았지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생명의 기운을 드리우는 큰 생명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작고 연약해도 참된 생명은 겨자씨처럼 자라게 하시고 누룩처럼 퍼져나가게 하십니다. 매달 새교우들을 만납니다. 새교우분들이 청파에 와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습니다. 얼마 전 감리교 서울연회에 참석했을 때 처음 뵙는 목사님이 저에게 오셔서, 매주 청파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힘을 얻는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4. 거룩하고 아름다운 생명나무
3년 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안토니 가우디의 성가족성당을 둘러보았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이미 까떼드랄Cathedral이라고 부르는 대성당을 몇 개나 보고 온 저였음에도 성가족성당의 높이와 규모와 아름다움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대한 흰 기둥들이 자작나무처럼 성당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빛이 천상의 빛처럼 사람들을 감쌌습니다. 그냥 예배당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거룩함이 느껴졌습니다. 밖으로 나가 성당을 보았습니다. 동쪽면 상단 중앙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습니다. 푸른 나무 가지 위에는 하얀 새들이 잔뜩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짜 나무와 진짜 새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올린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 나무가 교회의 표지처럼 보였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생명의 대지에 뿌리를 굳게 내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자라서, 옆으로는 그 얻은 양분을 사람들에게 그늘과 열매로 나누어야 한다고 나무가 저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성가족성당에서 인상적이었던 곳이 한 곳 더 있었습니다. 서쪽문으로 나가면 바로 왼편에 작은 학교 건물이 지어져 있습니다. 그 건물은 가우디가 성당 건축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위해 직접 설계한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도 아주 예술적이었습니다. 천장은 파도의 물결 모양이었습니다. 가우디는 그곳에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건물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건물까지가 성가족 성당이다. 거룩이란 저런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저런 것이다. 교회란 저런 것이다. 작은 자까지 소중히 돌보는 것이 거룩이고 아름다움이고 교회다.’
청파교회 설립자 양우로더 여사는 아픔이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결혼에 실패하여 본가로 돌아온 후 주로 방에서만 지내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만난 후 삶이 변하였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나와 자신에게 빛이 되었던 말씀을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비를 들여 그 당시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던 여자아이들을 위해 학교도 세웠습니다. 선교사가 서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도부인들의 보고를 받던 중 연화봉교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연화봉교회는 교회 분위기가 좋고 교인 수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양우로더 인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답했습니다. 선교사는 양우로더 여사가 행한 이야기를 다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로더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양우로더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살았습니다. 그에게 닥쳤던 이혼과 식민지배라는 어려움에 비하면 그는 너무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에 깊게 내리고 하늘을 보고 자라 열매를 맺어 그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늘을 드리워 쉴 곳이 되어 주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한 그루의 생명나무 같았던 사람. 청파교회는 그런 사람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지난 2008년 설립 100주년 때, 김기석 목사님의 친구 목사이자 시인인 고진하 목사님께서 <백 년의 나이테를 속에 감추고 자라는 나무처럼>이라는 시를 써주셨습니다. 긴 시인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 안에, 그대 심장보다 더 가까이 있는
성스러운 빛을 항상 신뢰하기를
그 빛 속으로 거추장스런 옷을 훌훌 벗고
알몸으로 나아가기를
행여 길을 걷다가 지치거나
불면의 괴로움으로 뒤척이는
영혼의 그믐엔
고요히 무릎 꿇기를
자주 고독 속으로 들어가
바위처럼 입을 닫고 하늘에 귀 기울이기를
무변허공에 둥지를 틀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기를
뭘 좀 안다고 우쭐대지 말고
모름의 신비와
생명의 경이를 연인인 양 뜨겁게 껴안기를
그대 영혼의 스승의 부름에 순명하고
생명의 빵을 곁님들과 나누는 데 인색하지 말기를
그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한숨결의 생명임을 항상 기억하기를
한결같은 젊음을 지니신 창조주를 닮아
백 년의 나이테를 속에 감추고 자라는 나무처럼
언제나 푸르고 정정하기를
지금 이 시대는 생명과 평화와 정의라는 가치를 저버린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맞서기에 우리는 너무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세상의 문제와 우리의 연약함보다 참 생명이신 주님을 크게 바라보며 삽시다. 예수님처럼, 양우로더 여사처럼 한 그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생명나무로 살아갑시다. 우리 청파의 모든 교우가 백 년의 나이테를 속에 감추고 자라는 나무처럼 언제나 푸르고 정정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