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
김재흥(2025-12-31)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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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해를 돌아보며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송구영신 예배의 자리에 나온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2025년도 청파교회의 표어는 ‘은총에 이끌리어’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자국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사람들이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흐름을 보면서, 작년 이 송구영신 예배의 자리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욕망이라는 중력이 아니라 은총에 이끌려 살아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살아온 1년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게도 우리는 은총보다 욕망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살았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은총은 계속되었습니다. ‘돌아보니 발걸음마다 은총이었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년 은총의 몇 장면이 떠오릅니다. 6월 초 교회 교육관 앞 주목 나무 위에 직박구리 부부가 둥지를 짓더니 알을 낳았습니다. 우리 교회를 새생명의 탄생의 자리로 삼아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장마철에 처마 끝에 둥지를 지어서 빗물을 다 맞게 생겼습니다. 나무 위에 우산을 매달아 주었습니다. 한 달여 시간이 지나자 직박구리 부부와 새끼는 날아갔습니다. 그 이후 저는 몇 번 사무실 뒤편 화단에 와서 열매를 따먹는 직박구리 큰 새 두 마리와 작은 새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가족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 직박구리 가족은 삭막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었습니다. 품이 되어 주는 것, 생명을 키워내는 것, 그가 그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일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직박구리 가족에게 교인등록을 받지는 않았지만, 제 마음속 교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8월에 교인들과 함께 포도를 따먹은 일도 떠오릅니다. 올해 봄 교회화단에 포도나무를 두 그루 옮겨 심었는데 포도가 열 송이나 열렸습니다. 좁쌀만하던 포도알들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다 자란 포도알은 진한 보라색으로 익어갔습니다. 예배 광고시간에 교우 여러분께 한 알씩 맛보시라고 했더니 두 주 만에 포도알이 다 사라졌습니다. 포도 한 송이의 알을 40개라고 본다면 한 400명 정도가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인들과 같은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를 나누어 먹으니 포도나무가 마련해준 성찬식에 함께 참여한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는데 포도과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심으로 참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도 이 포도나무처럼 살아라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11월에는, 전태일이 매일 퇴근할 때 차비로 풀빵을 사서 여공들에게 나누어 주고 걸어갔던 길을 따라서 걸었습니다. 사실 함께 걷고 싶은 분들 오시라고 광고는 했지만 누가 오실까 싶었습니다. 평일 저녁에 동대문에서 쌍문역까지 12킬로미터나 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6명이나 모였습니다. 함께 3시간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한층 더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파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뿐 아니라 교인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도 오셔서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과천에서 오셔서 풀빵과 어묵을 사주신 선생님, 마장동에서 오신 부부, 일본에서 오신 분 모두 반가웠습니다. 비록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온라인을 통해서 연결되고 같은 지향을 가지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2. 약탈과 약육강식의 시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계속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중력에 짓눌려 있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어느 분야 하나 밝은 전망을 이야기하는 곳이 없습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의 이 시대를 약탈경제plunder economy의 시대라 말하고 있습니다. 약탈경제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고대의 제국들은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다른 나라의 영토나 자원이나 자금을 약탈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했던 것 또한 약탈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들은 이웃나라들을 침략하여 영토를 빼앗고 있고, 미국은 관세를 무기 삼아 다른 나라들의 자금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자유롭게 무역하고 균등한 존재감을 갖던 시대는 지나가고 다시 약탈의 시대가 돌아온 것입니다. 나라들 사이의 연대보다 갈등이 커지면서 각 나라는 국방비와 무기를 늘리고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군병력을 늘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독일은 내년부터 징병제를 부활시키기로 했습니다. 약탈 시대의 논리는 한 마디로 말하면 ‘약육강식’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적 본능과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과의 충돌의 역사였습니다. 지금 현재 상황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공동선이라는 보편가치 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이 흐름이 언제 끝나게 될지, 언제 세계가 다시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좀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합니다. 단지 미국의 관세만 낮추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약육강식이라는 인간 속에 있는 동물적 본능을 넘어설 수 있을지 고민하고 길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이 살던 세계는 크게 두 개의 세계였습니다. 율법의 세계와 로마의 세계. 율법의 세계는 율법을 지키는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확실한 세계였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 유대인이 강자였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이방인이 약자였습니다. 강자는 약자 위에 군림하고 율법을 무기삼아 약자를 정죄하고 배제하고 때로는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라는 세계도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확실한 세계였습니다. 로마와 로마를 추종하는 자들이 강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약자였습니다. 강자는 무기를 앞세워 약자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삼거나 약탈했습니다. 율법의 세계와 로마의 세계는 종교와 제국이라는 존재의 형태가 다르고 폭력의 형태와 정도는 달랐지만 그 속에 담긴 논리는 동일했습니다. 약육강식. 바울은 예수 안에서 그 두 세계와는 정반대되는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세계, 로마가 막대한 무력과 재력을 가지고도 도저히 이룰 수 없던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인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세계, 강자와 약자가 없는 세계, 모든 이가 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세계, 약육강식의 논리가 전혀 없는 세계. 예수님은 약육강식이라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완전히 뒤집어엎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너를 먹으려고만 하는 세상에 너를 위해 나를 먹으라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세계였고, 그 세계는 바울에게 놀라움이었고, 복음이었고, 구원이었습니다.
3.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
바울은 에베소서 2장과 3장에서 자신을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라고 말하였고 복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예수의 복음을 선물을 전하듯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렇게 선물을 전하듯 전할 때만 전해집니다. 왜냐하면 복음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왔기 때문입니다. 2026년도 청파교회 표어는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입니다. 이 표어는 사실 2000년과 2001년도 청파교회의 표어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그 표어가 생각났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청파교회뿐 아니라 모든 이가 그 자세로 살아갈 때 우리 모두가 직면한 문제를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나 교회라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복음,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너를 먹으려는 생각만 하는 세상에서 너를 위해 나를 먹으라 내어주는 것이 복음이고 구원입니다. ‘선물’의 ‘선’자는 반찬 ‘선膳’자입니다. 반찬 ‘선’자의 부수자는 달 월月인데 달 월은 고기 육肉자의 부수변형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선물로 오셨습니다. 당신의 살과 피,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선물로 오셨습니다. 그런 귀한 선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에게 선물이 되어 주었듯이 너도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주라고.
2026년도 청파 주일 예배 때, 마지막 결단의 찬양으로 주기도문송을 부르지 않고 ‘평화의 기도’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예배 중 기도로 드릴 것입니다. <평화의 기도>가 성 프란체스코가 쓴 것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있습니다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기도문에 깃든 예수의 정신, 평화의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기도문이 유명해진 것은 1917년 1차 세계 대전 때였다고 합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성화가 새겨진 종이 뒷면에 이 기도문이 인쇄되어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전쟁과 약탈의 시대에 사람들은 그 기도문을 통해 평화와 상생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에게 선물이 되어주려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새해에 우리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의 흐름으로 보자면 전쟁과 국가 간 갈등이 늘어나고, 기후 재앙은 더욱 크게 발생할 것입니다. 삶의 외적 조건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 속에 있는 동물적 본능, 약육강식의 논리는 더욱 강하게 작동할 것입니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갈 길이 정해졌습니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시대에 흐르는 약육강식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시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나를 너에게 선물로 내어주며 살아갑시다.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주고 세상에 선물이 되는 교회가 됩시다.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가 됩시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고 주님이 함께 가시는 길입니다. 그렇게 한 주 한 주, 한 달 한 달 살아 내년에 더 큰 기쁨과 감사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청파교우와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