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을 주십시오
김재흥(202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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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네겝에서는 얼마 살지 않고 그 곳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베델 부근에 이르렀다. 그 곳은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있는, 예전에 장막을 치고 살던 곳이다. 그 곳은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다. 거기에서 아브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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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에게 중요한 게 나에게도 중요할 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10월 10일, 이스라엘과 가자의 하마스가 휴전합의를 이루었습니다. 전쟁 발발 2년만의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가자지구의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가자의 사람들과 아이들은 길거리로 뛰쳐나와 기뻐 뛰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한 아기 엄마는 “전쟁이 끝났다. 믿을 수가 없다. 2년간의 굶주림과 파괴가 끝났다. 이제는 안전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주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이 기쁨은 불완전한 기쁨이다. 나의 집에는 숟가락도 없고 포크도 없다. 돌멩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가족을 잃기도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1단계 휴전합의에 따라 인질과 수감자를 교환했습니다. 하마스는 인질로 붙잡고 있던 이스라엘 시민 20명을 석방했고,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수감하고 있던 하마스 군인 250명과 구금하고 있던 가자 시민 1,700명을 석방했습니다. 죽음 같은 시간을 지나 2년만에 가족이 상봉했습니다. 가자 사람 중에는 30년만에 상봉한 가족도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들과 아버지와 형제와 연인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는 엉엉 울었습니다. 이스라엘과 가자 사람들은 인종과 종교는 달랐지만, 죽음 같은 시간을 지나 다시 만난 가족을 반기는 모습은 똑같았습니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그들은 헤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 살았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전쟁의 피해자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이 전쟁에 승자가 있는가? 있다면 딱 한 명, 이스라엘의 총리 네타냐후일 것입니다. 그는 배임 횡령 뇌물수수 혐의로 이스라엘 검찰에 기소되어 있었는데 전쟁을 이유로 계속 권력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전쟁범죄자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있기도 합니다. 반드시 전쟁의 책임을 물어 이런 악마적이고 불필요한 전쟁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 2,000명이 사망했고, 가자 사람들은 약 67,000명이 사망했습니다. 피해의 정도는 비교할 것도 없이 가자의 피해가 이스라엘의 피해보다 훨씬 컸습니다. 인명피해만 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자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옥과 농경지가 사라졌습니다. 이번 전쟁은 2023년 10월 7일 가자의 하마스 대원들이 초막절 명절 축제를 즐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악마적인 공격이었으나 하마스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가자를 세계에서 제일 큰 감옥으로 만들고 수도, 전력, 출입 등 생활의 모든 것을 통제하며 삶을 지옥으로 만든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반년 전 이스라엘 군대가 예루살렘에 있는 무슬림의 성지인 ‘알 아크사 모스크’를 급습하여 무슬림 사람을 감금하였습니다.
알 아크사 모스크는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로 무슬림에게 있어서는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성지입니다. 그런데 그 알 아크사 모스크가 있는 자리는 유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성지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을 ‘성전산’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던 장소이며,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너에게도 중요한 것일 때, 너에게 중요한 것이 나에게도 중요한 것일 때, 그런데 그것을 함께 공유할 수 없을 때 전쟁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 중요한 것이 성지일 수도 있고, 영토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중요한 것이 너에게도 중요한 것일 때, 너에게 중요한 것이 나에게도 중요한 것일 때, 그것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일 때는 우리의 일상 속에도 많습니다. 직장이나 모임에서의 자리, 어떤 물건, 돈, 사람, 사람의 마음 등등. 여러분은 그런 상황을 만날 때 어떻게 하십니까?
2.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세계 문명의 4대 발상지 중 하나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는 우르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라크 남부에 있던 도시입니다. 그곳에 데라라는 히브리인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아브라함, 나홀, 하란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란은 죽고 그의 아들 롯만 남았습니다. 데라는 가족을 이끌고 우르를 떠나 하란이라는 도시로 이주했습니다. 하란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 오늘의 튀르키예 동남쪽에 있던 도시입니다. 세월이 지나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하나님은 그러면서 약속도 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어,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때 조카 롯도 함께 떠났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니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풍요롭고 안락한 삶이 아니라 더부살이였습니다. 그 땅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더부살이를 하던 중 기근까지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는 수 없이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만났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피할 뿐 아니라 많은 재산까지 얻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모두 많은 양 떼와 소 떼를 거느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서로 식솔이 불어나다보니 함께 한 곳에 머물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목초지를 두고 싸우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삼촌과 조카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삼촌으로 조카를 많이 돌보아주고 도와주었으니 이번에는 조카가 알아서 다른 목초지를 찾아가겠지.’ 롯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삼촌을 믿고 따라나선 길이었는데 고생 참 많이 했다. 이번 목초지 건은 삼촌이 양보하셔야지.’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개역성경은 이 뒷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오른쪽 땅은 물이 넉넉하고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에 인접해 있어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왼쪽 땅은 오른쪽 땅만 못했습니다. 롯은 오른쪽 땅을 선택했습니다. 눈치가 없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욕심에 이끌린 선택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아브라함은 왼쪽 땅으로 갔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왼편 땅으로 이동해가면서 롯에 대해 아무런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제안했을 때 이미 좋은 땅을 양보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는 정말 큰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큰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 때의 모습을 보면 그가 가는 곳마다 어떤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겜에 도착해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더부살이를 할 때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또 거기서 떠나 베델 부근에서 살 때도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예배했습니다. 나중에 이집트를 거쳐 다시 베델 부근으로 올라왔을 때 다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고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예배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욕망을 아뢰고 그 욕망을 성취해가는 삶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다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끝없이 돌보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끝없이 돌보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그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가장 많은 복과 큰 복을 받는다는 말처럼 생각합니다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남한강의 근원인 강원도 태백에 있는 검룡소를 생각해보십시오. 검룡소에서는 사철 9도씨의 물이 하루에 2천 톤씩 솟아납니다. 남한강의 근원인 검룡소는 매일 그렇게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솟아냄으로 자기자신을 이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검룡소 자체는 변함이 없고, 거기서 솟아난 물이 계곡과 들판으로 흘러흘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어 그 물길이 닿는 곳마다 뭇생명들을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곧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더 많은 복 큰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복이 되는 선택을 하지 않고 조카 롯에게 복이 되는 삶을 선택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이 보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복 되게 할 때 그 자신도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복의 개념은 예수님에게로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복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의 복된 삶, 모두의 복된 삶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이 복 있는 사람이며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는 말은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으로 뜻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뛰어난 지혜를 가진 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모든 사람의 질문에 대해 지혜로운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양식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양식을 주고 옷을 달라는 사람에게는 옷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통 큰 사람이 그 선생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뭐든 요청하면 다 주십니까?” “그렇다”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주먹만 한 보석을 주십시오.” 설마 그걸 주겠는가 하고 있을 때 선생이 정말 주먹만 한 보석을 선뜻 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편으로는 깜짝 놀라고 한편으로는 엄청 기뻐하면서 그 보석을 들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길을 가다가 멈추어서더니 되돌아 다시 선생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는 선생에게 보석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보석이 아니라 이 보석을 선뜻 내어줄 수 있게 한 그 마음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그 사람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눈앞의 한 가지 복을 취하기보다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가자가 서로를 조카 롯을 대하던 아브라함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면,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요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것이다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자신의 복에만 매몰되지 않고 서로 상대를 복되게 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꿈이 너무 과한 꿈입니까? 그러나 그 꿈은 예수님의 꿈이었으며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하나님의 그 넓은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 아브라함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해 나를 기꺼이 내어주는 예수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우리가 그런 기도를 쉬지 않을 때, 우리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마음을 닮아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