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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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월,토,일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재훈 목사

김형욱 목사

이성언 목사

이어진겨레 전도사

원로목사


버린 돌을 머릿돌로

김재흥(2024-04-21)
듣기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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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 4주입니다. 올해는 성령강림절이 5월 셋째주일인데 그전까지 부활절기가 계속됩니다. 봄비가 내려 백곡을 자라게 한다는 곡우절기를 맞아 산과 들의 생명들이 한껏 자라나고 있습니다. 일찍 피었던 꽃들은 지고 있지만 계속 새로이 꽃들이 피고 있고 여린 연둣빛으로 피어났던 새싹은 어느새 진한 초록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해 자기다운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자연을 보면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했는가? 나는 나다운 모습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총 아래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하고, 하루하루 자기다운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 지구의 날
내일 22일은 지구의 날입니다. 지구의 날은 환경오염으로 지구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1970년 미국에서 시작된 기념일입니다. 전 세계가 저녁 8시부터 10분간 조명을 끄는 소등행사를 벌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2009년부터 참여하고 있는데 환경부에 따르면 이 10분간 전등을 끔으로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약 52톤 정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는 30년생 소나무 7,900여 그루가 연간 흡수하는 이산화탄소량과 맞먹는 양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포탈 검색 사이트인 구글은 각종 기념일마다 구글 로고를 그 기념일에 맞게 새로 디자인해서 메인 화면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지구의 날에는 아예 구글 로고를 없애는 파격을 선택했습니다. 로고 대신 기후 변화로 급격하게 변한 자연의 사진동영상을 올렸습니다. 해가 가면서 사라져간 킬리만자로산의 만년설, 형형색색의 산호초가 하얗게 죽어가는 오스트레일리아 산호초군락 등. 자연이 사라지면 구글도 사라지고, 인간도 사라진다는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구촌은 전 지구적 재앙이었던 코로나 펜데믹을 빠져 나왔습니다. 코로나는 단순한 감염병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그릇된 방식으로 살아왔음을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은 개발을 명목으로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했고, 그로인해 동물들은 인간의 거주지 가까운 곳까지 내려와 살게 되면서 동물 속에 있던 바이러스들이 인간에게 감염되며 생긴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펜데믹이 끝난 이 시점에서 우리 인류는 과연 코로나 이전과 비교했을 때, 그릇된 생활방식을 얼마나 바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바는 계속 이것 한 가지였습니다. 경제! 돈! 당연한 말이지만, 경제보다는 생명이 중요합니다. 인류가 계속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어느 날 인간은 킬리만자로의 만년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산호초처럼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게 붙들던 경제와 함께 말이죠.

• 시편 118편
오늘의 성경본문인 시편 118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 중 함께 부른 찬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선하고 인자하신 주님을 함께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들이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은 ‘구원’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시편 118편은 고난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 (6절 말씀) 이스라엘은 사실 주변 사람과 주변 나라들에 의해 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10절의 ‘뭇 나라가 나를 에워샀지만’, 11절의 ‘그들이 나를 겹겹이 에워쌌으나’, 12절의 ‘그들이 나를 벌떼처럼 에워싸고 가시덤불에 붙은 불처럼 나를 삼키려고 하였지만’, 이란 구절들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자주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여러 나라와 강대국의 침략과 공격을 끝없이 받았습니다. 블레셋, 암몬, 에돔, 아말렉 등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722년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고, 주전 587년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철옹성임을 자랑했던 사마리아 성과 예루살렘 성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은 성벽뿐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던 솔로몬 성전까지 무너졌습니다. 12절의 ‘그들이 나를 벌떼처럼 에워싸고 가시덤불에 붙은 불처럼 이스라엘을 삼키려 했다.’는 표현은 은유가 아니었습니다. 벌떼 같은 군대가 성을 에워싸고 칼과 창과 화살로 찌르고, 가시덤불에 불을 놓듯 온 도성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22절에 나온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란 폭력적인 제국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무너지고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18편은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 고백이 연이어 나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강대국들의 손에 의해 깨지고 버려진 돌과 같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들어 당신의 집에 머릿돌로 삼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가 살던 이스라엘을 다시 고국에 돌아오게 하셨고 그들로 다시 무너진 터전 위에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버린 돌을 머릿돌로 삼는 것, 작고 보잘것없는 것도 귀하게 쓰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강물에 버려진 한 아기를 민족의 지도자로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제국의 식민지 시골 마을의 한 목수 청년을 인류의 구원자로 삼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 버린 돌을 머릿돌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그와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와 사회가 버린 돌 같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초석으로 삼으셨습니다. 로마의 오랜 식민지배와 착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고 갈릴리 호수에서 헛그물질이나 하고 있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 찍혀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세리, 사마리아인, 창기, 병자, 귀신 들린 자를 온전히 한 명의 사람으로 여겨주셨고, 그들의 상처 난 마음과 몸을 치유해 주셨고,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천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것을 찾은 자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이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기쁜 표정으로 어깨위에 짊어지고 돌아오던 목자였으며, 보이지 않는 방구석에 버려진 드라크마를 찾아 그 쓰임새를 되찾아주어 기뻐하던 여인이었으며,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그 아들이 돌아와 자신을 종으로 받아달라고 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그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 주었던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이들은 오늘의 말씀처럼 정말로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던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재인식’ 아, 나는 율법전문가와 제사장들이 말하듯이 버려진 자가 아니었구나. 나 또한 하나님의 자녀구나. 나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살 수 있구나.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만나 버려진 돌이 머릿돌로 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삭개오도 그중에 한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인으로 로마를 위해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가는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세리는 로마가 정해놓은 세금만 걷은 것이 아니라 로마라는 힘을 등에 업고 부과된 세금의 몇 곱절을 거두어가던 돈만 밝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민족의 반역자요 돈만 밝히던 놈,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삭개오 속에서 삭개오의 본모습을 보아내셨습니다. 삭개오의 이름 뜻은 순수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호명되던 삭개오 속에서 순수를 호명해 내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제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에도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약한 자를 나누지 않고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며 함께 사귀고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곧 복음을 통해 자신을 버려진 돌이 아니라 머릿돌로 인식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또한 자신처럼 귀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했기에 서로 재산을 팔아 공유하는 일까지 일어났던 것이지요.

• 업싸이클링, 하나님의 일
버려진 물건을 다시 사용하는 것을 재활용 recycling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활용 recycling 이상의 개념으로 upcycl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라 이전의 쓰임새보다 훨씬 가치 있게 재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잘 다듬어 새로운 집의 머릿돌로 사용하는 것이 업싸이클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업싸이클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 강대국에 짓밟히고 나라를 잃고 노예살이하던 민족을 다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이전보다 더욱 훌륭한 민족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 시대가 사람 취급하지 않고 버렸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일꾼으로 업싸이클링하셨습니다.

미국에 김성환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한동안 우리교회에 나오시기도 했고 몇 주 전 이취임식 때에도 우리교회를 다녀가셨습니다. 미국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가 어느 날 목회를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곤 목수가 되었습니다. 좀더 직접 땀 흘리며 일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화단이나 주택을 수리해 주거나, 공방을 열어 목공 수업을 하거나, 나무 포크와 숟가락, 도마를 만들어 팔거나, 나무 십자가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이 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업싸이클링입니다. 총 개머리판으로 쓰이던 나무로 십자가를 만든다든지, 깨진 유리조각 등을 모았다가 예쁜 타일을 만든다든지, 못 쓰게 된 자전거 튜브와 타이어로 허리 벨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 동네 벼룩시장에 나가 녹이 잔뜩 낀 물건들을 사다가 완전히 새것처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합니다. 김 목사님의 눈과 손과 마음은 하나님의 눈과 손과 마음을 닮았습니다.

김 목사님은 목회를 하실 때보다 목수일을 하실 때 육체적으로 고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김 목사님은 그 일을 기쁘게 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그런 업싸이클링을 통해 하늘의 기쁨을 맛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버려진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바뀌는 기쁨은 아무나 맛볼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버린 돌 속에서 머릿돌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하고, 울퉁불퉁하고 모양도 이상한 돌을 네모지고 반듯한 돌로 다듬을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변화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마음을 가진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깊이 배인 그릇된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쓰고 버립니다. 물건도, 생명도, 사람도. 우리는 자신만 귀한 줄 알고 다른 생명 또한 귀한지 모르고 살아온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간 자신의 욕망을 절대화하며 다른 생명들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며 살아왔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들에게 주님의 눈과 손과 마음을 주십시오. 우리가 버린 것들, 우리의 관심 바깥으로 밀어낸 것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발현되게 할 수 있는 섬세한 손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를 위해 기꺼이 나의 몸과 물질을 쓸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노자는 인간이 인간을 쉽게 죽이고, 한 가치가 다른 가치를 쉽게 무시하고 멸시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치인사천막약색(治人事天莫若嗇)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김에 있어 아낌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껴야 합니다. 아끼는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는 것, 오래된 옷을 수선해 입는 것, 망가진 물건을 고쳐 쓰는 것, 화분 하나를 죽이지 않고 정성껏 돌보는 것, 사람을 쉽게 해고하지 않는 것,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에게 그들 자신이 실수와 실패가 아님을 일깨워 주고 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 사회가 그릇된 편견으로 한 존재 위에 덧씌워 놓은 이름을 벗겨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해 주신 본래의 이름대로 그를 불러주는 것, 우리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쉽게 버린 것들 속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있었음을 뒤늦게라도 깨닫는 것, 그래서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이 하루하루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방법입니다. 모든 생명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며 삽시다. 그 사람 속에, 그 생명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삽시다. 그를 위해 기꺼이 우리의 몸과 시간과 물질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맙시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로 변화되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삽시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능히 이루어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고통이 주는 선물

김기석

고통이 주는 선물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만나는 이마다 이런 하소연을 한다. 행복은 저 멀리 신기루처럼 깜박일 뿐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 전시된 타자들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의 남루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감당해야할 인생의 무게가 태산처럼 느껴질 때 비애감도 덩달아 커진다. 고달픔, 서러움, 억울함의 감정은 무거운 추가 되어 우리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순간 지금이라는 기적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는 이들일수록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통은 즉시 제거되어야 할 적이다. 고통은 행복의 철천지원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통에 대한 내성도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일에 연루되려 하지 않는다. 사랑조차 회피되는 경우가 많다.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택하기도 한다. 외로움이 심화되고 자기 삶을 위협할 수도 있는 타자에 대한 적대감 또한 커진다.



고통은 우리의 일상에 균열을 만든다. 고통은 익숙한 세계를 교란시키는 불쾌한 손님이다. 그 손님을 적의의 태도로 대하는 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불쾌한 손님이 고분고분하게 물러나지는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존재도 고통을 회피할 수 없다.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이는 창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자기 동일성 속에 머물지 못한다. 그 동일성을 깨뜨리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운명에 채인 상처든, 타자와의 관계에서 빚어진 아픔이든, 적대적인 세상에서 겪은 불유쾌함이든 우리 속에는 그런 상처자국이 많다. 그 자국은 말끔히 지울 수는 없다. 음유시인인 레너드 코헨은 ‘Anthem’이라는 노래에서 ‘모든 것 속에는 갈라진 틈이 있다. 그 틈을 통해 빛이 스며든다’고 노래했다. 고통이 우리 몸과 마음을 스쳐간 흔적인 틈을 메우는 일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그 틈을 통해 스며들고 있는 빛에 주목해야 한다.



고통을 반길 수는 없다. 고통은 우리 삶의 주도권을 빼앗는다. 그렇기에 불유쾌하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가 한사코 외면했던 삶의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타자의 세계이다. 고통은 우리를 다른 이들의 고통과 연결시켜준다. 윤동주는 ‘팔복’이라는 시에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여덟 번 반복한 후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시를 마무리했다.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애상이 아니다. 시대적 울분과 그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속에서 비로소 그는 다른 이들의 슬픔에 깊이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 슬픔의 연결을 통해 그는 오히려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행복을 위해 고통을 말끔히 제거하거나 외면하려 할 때 우리는 동시에 타자들의 고통에 무감하게 된다. 고통은 우리를 타자의 세계와 연결하는 든든한 줄이다. 내가 겪는 고통을 통해 타자들의 고통에 눈을 뜨고 그 고통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할 때 책임적 공동체가 형성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책임으로 수용하지 않고 도피하는 것이 곧 악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기독교 절기상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기의 막바지이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과 설움과 연약함을 자기 속으로 오롯이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외면해도 괜찮은 남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종교가 아니라 삶의 신비를 가르쳐준다. 고통은 중력처럼 사람들을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그들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지탱해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난폭하고 냉혹하고 무정한 세상을 치유하는 이들이다. 봄바람이 되어 사람들 속에 깃든 생명을 깨어나게 하는 사람들이다.



(* 2024/03/22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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