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는 깊게 가지는 넓게
김재흥(202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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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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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된 새로움은 참된 반성에서
2026년도 첫 주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1년 내내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송구영신 예배 이외에 신년맞이 행사를 하신 게 있으신가요? 종로에 가서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소리를 듣는다든지, 동해에 가거나 남산에 올라가 신년 첫 해돋이를 본다든지 하는. 예전에는 1월 1일이면 김기석 목사님과 청년 몇 명과 함께 원단元旦산행을 갔습니다. 주로 북한산을 갔는데 언제인가부터 산에 가는 이가 적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산길을 걸으며 새해 다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사라져서 좀 아쉽습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신년맞이 행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일곱째 달, 그 달 초하루를 너희는 쉬는 날로 삼아야 한다. 나팔을 불어 기념일임을 알리고,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한다.” 나팔절에 대한 말씀인데 이 나팔절이 나중에 로쉬 하샤나, 해의 머릿날이 됩니다. 특이하게도 유대인들의 신년은 태양력으로 9월입니다. 추분 즈음이 새해입니다. 우리가 송구영신 예배 때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며 참회하고 살아갈 새해를 내다보며 소망을 품듯이 유대인들도 로쉬 하샤나 때 참회하고 새로운 소망을 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소망에 관련된 행사들보다는 참회에 관련된 행사가 훨씬 더 많습니다. 새해가 시작되기 하루 전에 반나절 동안 금식하고 목욕을 합니다. 속과 겉을 모두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 첫날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기도문을 읽고,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후에는 자기들이 지은 죄를 닭에게 전가시킨 후 닭을 속죄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로쉬 하샤나로부터 열흘 후 대속죄일에 유대인들은 온전히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로쉬 하샤나는 참된 새로움은 참된 반성에서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울 신新은 설 립立에 나무 목木에 도끼 근斤자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나무를 도끼로 자르고 깎아 새로운 물건을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나무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움은 날카로운 도끼날에 자신의 일부분이 잘려나가고 다듬어지는 아픔을 겪은 후에야 찾아오는 일입니다. 새날이 되어도 우리가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은 그 도끼날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편안함을 선택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열흘 동안 계속되는 로쉬 하샤나와 대속죄일의 전통에 따르자면, 우리는 아직 참회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신년 초입의 시간이 더 지나가기 전에, 주님의 말씀과 삶을 도끼날 삼아 우리의 그릇되고 모난 부분을 깎아내어 참된 새로움에 이룰 수 있길 소망합니다.
2. 예수님의 기도와 예수님의 일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어떤 부분을 깎아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거쳐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제1성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였습니다. 제가 몇 차례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죽어 가는 천국’이 아니라 ‘되어 주는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에게 다가가 천국이 되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32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 사람들은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병든 자를 고쳐주심으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심으로 그 사람들에게 천국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병을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요? 마가복음 1:35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기도에서 온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기도의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른 새벽’, ‘외딴 곳’. 이른 새벽은 단지 이른 새벽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외딴 곳은 단지 외딴 곳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 – 가족, 동네 사람들, 동료, 그냥 길에서 스치는 사람들 등 다양한 만남을 통해 내 안에 다양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만을 만나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만나도록 준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의 설교본문인 마가복음 1장의 말씀의 평행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태복음 9:36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얻게 되신 하나님의 마음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 마음,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신 마음은 바로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자 지구의 난민입니까? 북녘의 동포입니까? 이주민입니까? 병자입니까? 많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아픔이 제일 큰 아픔이고, 자신의 고통이 제일 큰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하신 이유는 그 아픔과 고통을 통해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게 하심인데, 많은 사람이 그저 자기의 아픔과 고통을 가장 큰 아픔과 고통으로 여기고 그 안에 매몰된 채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픔과 고통을 만나면 거기서 벗어나게 해달라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가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저도 아프고 고통스러워봤습니다. 저이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아침에 깨어난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 예수님을 찾아나섰습니다.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전날 밤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병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말씀을 전하셨는데,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은 다시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주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는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은 자,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은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뿌리는 깊게 가지는 넓게
2026년 청파교회의 표어는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입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어 마음을 얻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자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 너를 먹으려는 생각, 이용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며 살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이 각박하고 척박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적 본능’은 쉽게 말하면 극단적 이기성입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려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런 이기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기 안으로 구부러짐’ (Incurvatus in se). 그것입니다. 우리가 깎아내야 할 것은.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그 이기성을 우리에게서 깎아내야 합니다. 이기성을 깎아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계속 이기적인 존재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해도 이기적인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선 기도라면, 이기적인 기도는 자기의 욕망 앞에 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는 기도라면, 이기적인 기도는 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삼는 기도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너를 불쌍히 여겨 나를 너를 위한 선물로 내어놓게 하지만, 이기적인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겨 너를 나를 위한 도구로 삼게 합니다.
제주에 가면 폭낭이라는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폭낭은 팽나무를 이르는 제주말입니다. 팽나무는 그 열매를 대나무 꼬챙이에 넣고 날릴 때 ‘팽’소리가 나서 팽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폭낭의 ‘폭’은 팽이 변형된 말이고 ‘낭’은 제주말로 나무입니다. 그런데 제주의 강정효 사진작가는 제주의 폭낭은 ‘폭’이 열리는 나무이기 때문에 폭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그의 사진집 <폭낭>에서 주장했습니다. 폭낭은 마을회관이 없던 시절에 마을회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폭낭은 폭을 넓게 벌려 넓은 그늘을 만들었기에 사람들이 모이기 좋았던 것입니다. 제주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입니다. 그 강한 바람을 맞으며 가지가 부러지거나 바람 부는 방향으로 가지가 휘면서도 폭낭은 사람들에게 품이 되어주었습니다. 폭낭이 그렇게 너른 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로 뻗어 올린 가지들만큼 땅 아래로 수많은 뿌리를 굳건하게 뻗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 땅은 아주 척박합니다. 조금만 파내려가도 돌이 가득합니다. 폭낭은 그런 거친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의 힘으로 가지를 위로 옆으로 뻗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폭낭은 장수목입니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폭낭은 수령이 1,000년이 넘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자신들과 긴 역사를 함께하고 너른 품이 되어 주는 폭낭을 신목 –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나무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사연도 폭낭 아래 가서 털어놓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소망도 꺼내어 놓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도끼 삼아 찍어 버려야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리 안에 있는 ‘안으로 굽은 마음-이기성’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 뿌리를 깊게 내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뿌리를 깊게 내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이라는 가지를 넓게 드리우게 될 것입니다. 2026년 새해, 하나님께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사람들에게 가지를 넓게 뻗어 세상의 선물로 살아가는 청파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