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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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흔들리지 않는 믿음

김기석(2020-07-12)
듣기

흔들리지 않는 믿음
살전3:1-5
(2020/07/12, 성령강림 후 제6주)

[그러므로, 우리는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우리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여, 아무도 이러한 온갖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우리는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장차 우리가 환난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고,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다 못하여, 여러분의 믿음을 알아 보려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유혹하는 자가 여러분을 유혹하여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 없이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참 심란한 세월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우리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형성해온 인생관과 가치관이 무너질 때 파멸과도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부끄러움과 회오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을 매도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로 인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도 지키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겸손히 엎드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파트너로 만드셨습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말은 얼토당토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시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임의로 들어와 사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강제로 우리 마음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맞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자유의 선물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늘 경고 하십니다. 가인이 아벨에 대해 분심을 품고 낯빛이 변한 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에게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b)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고는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회수하지는 않으십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 문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라 해도 한 순간 죄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젊은 날에는 내가 내 의지의 주인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른 그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나서 지향을 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길을 함께 가는 동료들입니다. 우리가 비록 친밀하게 얼굴을 맞대고 만나지는 못한다 해도 지속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뉴런(neuron, 신경세포)을 생각해 보십시오. 뉴런은 서로 연결되어 자극을 전달하고 운동, 생각 등의 생명활동을 이어가게 합니다. 그 뉴런이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기억이나 사고력 그리고 운동 능력도 쇠퇴하게 됩니다. 교인들의 사귐 곧 코이노니아는 그러한 신경망의 회로와 같습니다.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선교 활동은 마치 지중해 세계에 어떤 생명의 회로를 까는 행위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들은 서로 든든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저만치 어딘가에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피차 확인하며 그들은 위안과 더불어 깊은 동지애를 느꼈을 것입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이 서신은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문헌입니다. 복음서보다 서신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에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고, 거기서 고발을 당해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로 옮겨가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스의 대도시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서 성경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유대교적 성경 토론의 특색은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특색과도 관련됩니다. 이 언어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발음을 하기 위한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음에 어떤 모음 기호를 적용하느냐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곤 합니다. 모호하고 복잡한 삶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언어입니다. 히브리어는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씁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우뇌의 활성화와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합니다. 좌뇌는 정보를 축적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우뇌는 공감과 감정을 관장하는 영역입니다. 히브리어는 뉘앙스와 미묘한 것들을 다루기에 적합합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의 공부는 시끄럽습니다. 저마다 자기 견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에 능숙했던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들은 지역 사회와 유대 공동체를 연결해주는 통로 구실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말을 따르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든든한 후원자를 잃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도시에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사도들을 붙잡기 위해 바울 일행을 맞아들였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들을 끌어다가 군종 앞에 세우고 일종의 인민재판을 하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미 몸을 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애꿎은 야손을 붙잡아 관원들 앞에 세우고 사도 일행을 고발했습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행17:6). 사도들은 기존 질서의 토대를 뒤흔든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닌 또 다른 왕이 있다면서 황제의 명을 거슬러서 행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난하기 위해 한 말이긴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입니다. 힘이 정의처럼 여겨지는 세상, 그래서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의 인권은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도 일행은 전혀 다른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신분고하, 남녀, 주인과 종, 피부색, 인종, 시민과 나그네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는 세상, 세상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경계와 담이 무너진 채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세상 말입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사도들은 말썽거리였습니다. 자기들의 안온한 삶의 토대를 흔들어대니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힘없는 이들에게 수치심과 굴욕감을 안겨주고, 그들의 설 땅을 빼앗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에 사로잡힌 세상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환난과 박해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요한은 심판에 대해 설명하면서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요3:19)고 말했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에 이르렀습니다.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못내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었습니다. 아직 확고하게 서기도 전에 박해라는 태풍을 만났으니 신도들이 좌절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교회를 향해 최초의 서신을 썼습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자기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와 잇대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바울은 가슴이 벅차올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살전2:19-20)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바울의 존재 이유이자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환난 속에 있는 신도들을 굳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환난(患難)은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근심, 걱정, 고통, 병을 뜻하는 ‘患’을 파자해 보면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통전성이 뒤흔들린 상태라는 말입니다. 환난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누구나 환난이 속히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당연한 본능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과거로 되돌리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출애굽공동체도 광야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옛 질서가 무너지고 아직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기 전에 사회가 혼란 가운데 있을 때면 사람들은 습관처럼 ‘옛날이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옛 질서 속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이들에게 수모를 안겨주고, 고통을 가함으로 지레 지치게 만듭니다. 디모데의 소명은 그들에게서 환난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을 능동적으로 견디면서 복음적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을 회피하는 버릇이 들면 결국 옛 삶의 인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뚫고 나갈 때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립니다. 이전에 민주화를 위해 모두가 진력하던 시절에 많이 불려졌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336장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주중에 이 찬송가를 반복하여 부르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신앙은 사소한 행복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꼈기 때문입니다.

∙유혹하는 자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유혹하는 자들이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었습니다. 유혹은 늘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달콤함이 없다면 이미 유혹이 아닙니다. 달콤한 것은 우리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성경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의 숨바꼭질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자꾸 하나님을 멀리하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좋을 대로 살지 말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상들 앞에 절한 것은 우상들은 그들에게 도덕적인 삶,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지 않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풍요와 다산의 신들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체험해 보라고 제안하고 기분 전환을 하라고 유혹합니다. 정보 과잉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삶을 깊이 통찰해볼 시간조차 없이 정보의 바다를 떠다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와 무관한 일로 지나치게 분주합니다. 화를 내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일로 감정을 소비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조차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경생물학자인 게랄트 휘터는 우리에게 내면의 나침반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각종 유혹과 약속, 인생을 살면서 꼭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에 용기를 내어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해 가용할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깨어 있게 하며, 세상이 말하는 그 모든 유혹과 약속, 상품들보다 더 강인하고 확고하게 뿌리를 내릴 내면의 힘. 바로 이것이 내가 당신과 함께 찾으려 하는 내면의 나침반이다.”(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박여명 옮김, 인플루엔셜, 2019, p.22)

그가 말하는 나침반은 존엄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나침반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입니다. 가끔 목표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기어코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달콤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영혼은 누추해집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유혹과 맞서 싸우며 참 사람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빛이 어두워져 우울감이 안개처럼 우리를 감쌀 때일수록, 그리스도로 옷 입고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다 비틀거려도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조심조심, 신중하지만 즐겁게 사십시오. 모든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길이 보이지 않거든 하나님께 길을 여쭈십시오. 나의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할 때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의 뜻 안에서 생명과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며 사십시오. 아멘.

새컬럼



삶의 프레임을 바꿀 때

김기석

삶의 프레임을 바꿀 때



“삶에 정말 의미가 있나요?” 한 젊은이가 음울한 목소리로 던진 질문이다. 기성세대로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질문 속에는 그가 감내해야 했던 씁쓸한 시간 경험이 응축되어 있다. 열심히, 멋지게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마치 장벽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 그는 절망한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자기 삶을 기획할 수 없다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일마다 안 될 때야말로 ‘의미-물음’ 앞에 서는 때이다.



“죽은 자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서 있는데/벌이 날아와 앉네”. 백무산의 ‘조문’이라는 시의 첫 연이다.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어왔던 이의 죽음 앞에서 비감함에 사로잡힌 채 조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엉뚱하게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꽃향기를 탐한다. 삶과 죽음, 영원과 소멸, 질서와 혼돈 사이의 경계에서 바장이고 있는 참에, 벌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일에 충실할 뿐이다. 그 무심한 현존, 마치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 벌 한 마리가 무거움에 이끌리는 영혼을 잠시 뒤흔든 것이다. 시인은 ‘앉네’라는 평서형 종결어미를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구하고 있다. 꺾여진 꽃조차 생명을 부르고, 한갓 미물로 여겼던 벌조차 제 삶에 충실한 데, 우리 삶은 어떠냐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삶의 의미란 애당초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세상은 그저 무심하고 무정한 공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연히 이 세상에 와서 시간이 부여한 역할을 감당하다가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삶은 온통 우연의 연속이고, 그 우연을 연결하는 목적의 실 따위는 없기에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 이들은 생명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이라고 본다. 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는지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왜?’라는 물음을 삿대로 삼아 시간의 바다를 헤쳐간다. 방향을 잃기도 하고,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권태로운 시간을 견뎌야 할 때도 있지만 가야 할 곳을 알기에 멈추지 않는다. 삶의 부조리 앞에서 흔들릴 때도 있다. 무의미와 허무감에 확고하게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 비틀거리다가도 다시 정신을 추스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라본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삶은 누구에게나 막막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삶의 시간을 구획하고 그 구획된 시간을 구체적인 목적으로 채우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그 충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이들은 사다리를 오르듯 한 칸 한 칸 올라가면서 자기 망각, 존재 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사유하며 살 뿐이다. 세상 문법에 익숙해진 이들은 스스로 유능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바꾼다는 뜻이다. 욕망이 아닌 초월의 눈으로 사람과 사회와 역사를 바라볼 때 세상은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삶의 의미란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발견하고 구성해야 하는 과제이다.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함을 통해 형성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우리를 참 사람됨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이들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변 사람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앞서 인용한 백무산의 시 마지막 연이다. “벌은 하루치의 삶에 몰두해 있고/죽은 자 앞에서 나는 벌겋게 삶에 취해 있고”. 시인은 ‘-고’라는 어미를 통해 삶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암담하고 답답한 세월이라 해도 인식과 사유의 틀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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