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고 가벼운 멍에
김재흥(2026-07-12)
듣기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1. 삶의 짐스러움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주중에 많은 비가 내려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충청권의 피해가 컸습니다. 농경지와 주택이 침수되고 실종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속히 피해복구가 이루어져 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길 소망합니다. 비가 그치자 무더위가 찾아왔습니다. 몇 해 전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 떠오릅니다. 버스를 타고 동대문을 지날 때였는데 오토바이 뒤에 원단 두루마리를 산처럼 싣고 배달하시는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오토바이 뒤에 저렇게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위태롭게 달리던 오토바이는 빨간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두 다리로 균형을 맞추며 서 있는 아저씨의 모습은 더욱 힘들고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참 힘겹게 참 열심히 사시는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사람들은 저마다 차이는 있지만 저렇게 무거운 짐들을 짊어지며 힘겹게 또한 열심히 살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오토바이 배달 기사님을 보다가 예전에 해외 토픽에서 보았던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중동의 어느 나라였던 것 같은데 나귀가 짐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짐이 너무 무거워 수레가 뒤로 기울어져 수레에 연결되어 있던 나귀가 공중에 붕 떠올랐습니다. 처음에 그 사진을 보고는 웃음이 났습니다. 그 상황이 좀 웃겨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내 마음이 짠해지고 슬퍼졌습니다. 우리도 간혹 그 나귀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고 가고 있는 인생의 짐이, 끌고 가고 있는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 내 삶이 붕 들리고, 아무리 앞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계속 제자리인 것 같은 때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그리스의 신화 시지프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매일매일 산 정상으로 커다란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가 느꼈던 고됨, 무거움, 반복되는 무의미를 우리도 문득문득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삶의 짐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물론 인생은 선물입니다.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귀한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난다’라는 뜻인데, 인간의 몸으로 태어날 확률은, 수명이 무량겁인 눈먼 거북이가 바다 밑을 헤엄치다가 숨을 쉬기 위해서 100년에 한 번씩 물 위로 올라오는데 우연히 그곳을 떠다니던 나무판자에 뚫린 구멍에 목이 낄 확률보다 더 작다고 합니다. 또한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150억 년인데 그 150억 년의 진화의 끝에 지금 우리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니,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대단한 축복이며 선물인 인생을 때때로 짐스럽고 무겁게 느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2. 짐스러운 삶을 더 짐스럽게
인간이 삶을 짐스럽게 느끼게 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경우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좌절을 경험할 때. 계획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실패했을 때 우리는 삶을 짐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둘째, 갈등을 겪을 때. 관계가 마음대로 되지 않거나 깨어질 때 또한 우리는 삶을 무겁게 느끼게 됩니다. 셋째, 심각한 삶의 변화를 겪을 때. 사랑하는 이의 죽음, 질병, 사고, 재난을 만나게 될 때도 우리는 삶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경우는 조금씩 달라도 그런 일을 겪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동일합니다. 축복과 선물로 주어진 우리의 삶을 아주 무거운 짐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인생을 짐이 아니라 축복과 선물로 느끼며 살고 싶은데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저마다의 종교는 그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도 인간 모두가 함께 인간답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말씀이었습니다. 1.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2.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거짓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아내나 물건을 탐하지 말라. 이 10가지의 계명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계명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주어진 계명입니다. 삶을 힘겹게 만들 수 있는 무질서의 상황과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상황을 줄임으로 인생을 짐이 아니라 축복과 선물로 느끼며 살도록 돕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본정신이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이 율법으로 제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아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유대 사람들에게 인두세, 토지세 등 각종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누구에게든 명령해 짐을 들고 오 리를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학적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절대적 빈곤상태였습니다. 성인의 하루 식사량은 1파운드(450그램 정도)의 빵 한 개가 전부였고(「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에케하르트 슈테게만 · 볼프강 슈테게만, 동연. 147쪽), 평균 수명은 30세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야 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을 어떻게 인도했습니까? 제사장들은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유대인들에게 성전세를 거두어 들였고, 제물을 비싸게 팔아 자기 배를 불렸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안 그래도 인생을 짐스럽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율법으로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모세의 율법 속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 248개나 있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지 규정이 365개나 있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손 씻기와 안식일의 이동범위 제한 등의 구전 율법까지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생명을 주기 위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삶을 더욱 짐스럽게 만드는 또 하나의 짐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3. 편하고 가벼운 멍에
그 당시 유대인들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무겁고 짐스러웠을까요? 예수님 보시기에도 그들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 자체가 위로가 됩니다. 그 방법을 알고 싶지요? 다음 구절을 보면 방법이 나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잠깐 멈칫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쉬게 해주시겠다고 하시더니 멍에를 메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짐을 내려놓아야 쉼을 얻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짐을 내려놓아라’라든가 ‘내가 대신 짐을 짊어지겠다’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고 오히려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알송달송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메면 더 가벼워지는 멍에? 세상에 그런 멍에가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면 그것은 온유와 겸손이라는 멍에입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난폭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럼, 겸손은 무엇입니까?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입니다. 겸손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교만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쉼은 개인적 차원의 쉼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적 차원의 쉼이었습니다. 삶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필히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사셨습니다. 모두가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살아갈 때 우리 모두의 삶은 보다 쉽고 가벼워집니다.
율법은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규율을 부과했지만, 예수님은 그 규율을 두 개로 줄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온유와 겸손의 멍에가 따로 있고 사랑이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온유와 겸손의 멍에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멍에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멍에는 우리 내면의 난폭함과 교만과 이기심과 맞서 싸울 때만 질 수 있는 멍에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난폭함과 교만과 이기심과 날마다 싸우는 것,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더 힘들고 무겁게 만들지 않고 더 가볍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믿음의 신비는 바로 그때 일어납니다. 그의 삶을 좀 더 가볍게 만들어주려고 멍에를 멨는데 그의 삶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도 함께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 싱 이야기가 그것이지요. 선다 싱이 어느 사람과 눈 내리는 겨울 산을 넘을 때, 도중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은 도와줄 수 없다며 혼자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선다 싱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업고 걸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어갔는데 앞에 쓰러져 죽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앞서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다 싱은 업은 사람과 함께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청파청년부가 교류했던 한 공동체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이삼십 대 청년들, 사오십 명이 이룬 청년공동체였습니다.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고 배울 것이 많은 공동체였습니다. 제가 한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청년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2인자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2인자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회의가 열릴 때면 앞에 나서지 않고 미리 회의가 열리기 전에 회의장에 도착해 회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문서를 복사하고 의자와 책상을 세팅하고,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면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그 청년들은 정말 말한 그대로 살았습니다. 수련회를 진행할 때면 제일 힘들다는 식사당번을 서로 맡으려고 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밥을 준비하고, 저녁이면 그 누구보다 늦게까지 뒷정리를 하고 아침 식사 준비하느라 코피가 터지는 그 일을. 그 공동체는 온유와 겸손과 사랑이 가득한 공동체였습니다.
모두가 힘들고 무거운 짐에 짓눌려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모두가 함께 편하고 가볍게 살아가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멍에를 함께 메는 것입니다. 그 멍에를 기꺼운 마음으로 짊어지는 청파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