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있다
이재훈(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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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있다
<마태복음서 6장 29-34절>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32.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아쉬움 없는 인생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요즘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날이 참 좋습니다. 가끔 선배 목사님이 해 주셨던 말씀이 기억나는데, “죄는 다른 게 아니다. 이렇게 좋은 날, 실내에만 머무는 것이 죄다.“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러다가 금방 무더위가 올 수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좋은 봄날을 한껏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없는 때가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아쉬움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아쉬움이 없을 순 없지만, 그래도 아쉬운 순간을 조금씩 줄여나간다면 그래도 잘 산 인생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끝이 주는 양면성
여러분께서는 ‘끝’ 혹은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부터 드십니까? 먼저 드는 생각은 아쉬움입니다. 슬픔의 감정 말입니다.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슬픔을 안겨줍니다. 졸업이나 퇴사, 이별, 이사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끝은 늘 아쉬움을 동반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순간부터,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된다.“라는 말 말입니다. 모순된 말 같긴 하지만,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누구도 이 진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삶의 종착지는 ‘이별 혹은 헤어짐‘입니다. 이별은 모든 산 자가 맞이해야 할 하나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끝은 반드시 슬픔의 감정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끝이 주는 선물도 있습니다. 끝이라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고 또 꿈꾸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대만 출신의 작가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의 한 챕터에는 ‘외계인과 인간이 만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날, 지구에 외계의 존재들이 나타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인간이고, 언어학자입니다. 주인공은 외계인의 언어를 해독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받고 연구에 착수합니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외계인들은 ‘시간‘을 인간처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계인들은 ‘시작과 끝‘을 동시에 인식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시간의 순서대로 삶을 경험합니다. ‘과거-현재-미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외계인들은 달랐습니다. ‘과거-현재-미래‘의 순서가 아니라 ‘시작‘과 동시에 ‘마지막‘까지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삶을 통째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외계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인식하게 됩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주인공은 머지않아 자신이 딸을 낳을 것을 알게 되고, 앞으로 태어날 그 딸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쁠지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슬픈 사실도 알게 되는데, 자기 딸이 젊은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소설은 질문합니다. ‘끝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갈 것인가?‘, ‘끝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그 길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주인공은 그 길을 선택합니다. 주인공은 딸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 아이를 낳고, 사랑으로 키우기를 결정합니다. 그녀는 슬픔으로 끝날 인생이라도 그 인생을 사랑하고, 선택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참된 삶‘이란 기쁨과 즐거움만 가득한 삶이 아니라 슬픔까지도 끌어안는 것이 바로 ‘참된 삶‘, ‘진정한 삶‘임을 보여줍니다.
단편적인 예였지만, 바로 이러한 것이 ‘끝’이 주는 선물입니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집중할 수 있습니다. 끝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선물과 같은 순간임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많은 끝의 순간은 새로운 시작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참 믿음에 이르라
그런데 아쉽게도 늘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이 주는 선물을 잘 알고 있음에도, 늘 우리는 ‘이것‘에 발목을 잡힙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미련과 집착’ 그리고 ‘염려’ 말입니다. 우리는 늘 많은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물론 걱정 없이 사는 인생이 꼭 좋은 인생을 말하진 않습니다. 적절한 긴장과 불안은 삶의 좋은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지나친 염려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며 늘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질책하고는 하시는데, 주님은 우리를 향해 “이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안타까우셨습니다. 우리가 사사로운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길 바라셨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 수훈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사람들을 향해 ‘믿음의 핵심 요소’ 몇 가지를 전하십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향해 훈계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은 가난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느라 가족이나 생계를 돌보지 못한 자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사정은 늘 원점이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들을 향해 너희의 목숨이 음식이나 옷보다 소중하니, 사사로운 염려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책임하게 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민해야 할 때는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때는 준비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 걸까요? 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믿음에 굳건히 서라‘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우리 안에 ‘주님의 빛‘이 들어오면, 우리가 ‘사사로운 근심‘에서 벗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연결되면, ‘내일이 주는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그럼, 우리는 어떻게 ‘참믿음‘에 이를 수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참믿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삶이 선물임을 알 때라야 가능합니다. 삶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인식이 있어야만, 우리는 ‘참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삶이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삶의 모든 순간을 귀하에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단순히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무지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던져진 자들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잊고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아는 자들은 이것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3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33)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이 두 가지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전적으로 이뤄지는 곳을 뜻합니다.
예언자 <이사야>와 <미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시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사 2:4; 미 4:3)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힘과 권력으로 앞당길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배가 아니라 분쟁과 갈등을 해결함으로 도래하는 그런 나라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화약의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그런 나라인 것입니다.
<미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미가>는 평화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고,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미 4:4)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곁눈질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누군가의 몫을 빼앗지도 않고 또 다른 누군가에 자기 몫을 빼앗기지도 않고, 서로서로가 충분히 자기 몫을 누리며 사는 세상이 바로 ‘평화의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께 속한 삶임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의 도래를 함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이것을 또한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말할까요? 의는 옮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옮음‘이 세상에 실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옳음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거창고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상황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에는 늘 미소가 있습니다. 웃음꽃이 만개합니다. 그 세상에서는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흥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있는 곳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온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임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옳음‘이 실현된 장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속한 삶임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을 꿈꾸고 또 실현해야 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우리가 염려하던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낱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메시지 성경>이 훨씬 더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로 동요하지 마라. 어떠한 일이 닥쳐도 막상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34) 두 버전 모두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해야 할 몫은 바로 이것입니다. ‘넘기는 것‘입니다. 오늘의 것을 내일로 넘기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책임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내일로 흘려보내되,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바티칸이 있는데, 그곳의 변호사 출신의 한동일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 대목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임계치가 있습니다. 그 임계치는 고통에 대한 임계치인데, 인간에게는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고통의 임계치가 있기에 그것을 내일로 넘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가 됐습니다.
많은 사람은 무엇 하나에 꽂히면 하루 종일 그 생각밖에 안 납니다. 그래서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룹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임계치가 있기에 그것이 가득 찼다면, 내일로 넘길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들일까요? 절망의 마음,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의 마음 등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들을 내일로 넘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끝장을 봐야 해결되는 일도 있지만,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오늘의 감정을 내일로 넘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십니까?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말이 쉽지 실행에 옮기는 게 무척 어렵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이 말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문장입니다. “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라틴어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윗의 일화 속에 등장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세공사에게 반지 제작을 부탁하는데, 그는 세공사에게 자신이 승리했을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자신이 시련에 빠졌을 때 용기를 줄 글귀를 그 반지에 넣어달라고 명했습니다. 이 세공사가 고민 끝에 솔로몬을 찾아가게 되고 솔로몬으로부터 얻은 글귀가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였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설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에는 끝은 있습니다.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끝은 있습니다. 물론 그 끝이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망감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분노를 내일로 미뤄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힘겨운 시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행복도 없고, 영원한 불행도 없습니다. 계속되는 기쁨의 순간도 없고, 계속되는 고난의 순간도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38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에게 고난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의 현장 한복판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홀로 버려두지 않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믿음을 가졌고, 끝끝내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간구
여러분, ‘참믿음’ 안에 머무십시오. ‘참믿음‘은 우리의 삶이 선물임을 알 때라야 얻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속한 삶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채울 것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이 돌볼 것입니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합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심을 믿으십시오. 모든 것에는 반드시 끝이 있음을 기억하며, 언제나 주님 편에 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