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숲
김재흥(202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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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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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후파국과 공생공빈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정한 환경선교주일입니다. 우리는 급격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가뭄과 대형산불과 폭우와 폭염이 더욱 빈번히 발생하고 있으며 그 피해의 규모 또한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학자들과 운동가들은 ‘기후변화’라는 말을 넘어 ‘기후비상사태’, ‘기후파국’이라는 말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근 3년간 지구의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에 가까운 수준까지 상승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2도가 올라가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까맣게 타버린 나무가 몇 번의 봄이 돌아와도 새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처럼 이전의 상태를 회복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1년 전 경북에서 역대 최대의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내륙에 위치한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삽시간에 동쪽 끝 영덕 바닷가까지 이르렀습니다. 피해 면적은 10만 헥타르였고 산불이 번진 거리는 50킬로미터에 이르렀습니다. 엄청난 산불이었습니다. 산불로 27명이 사망하였고 5,5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주택, 축사, 과수원 등 정들었던 모든 삶의 자리가 사라졌습니다. 산불이 진화된 후 마을로 돌아와 화재로 무너진 집을 바라보시던 어르신들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절망감과 암담함과 무력감이 가득한 얼굴이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세계 곳곳에는 가뭄과 산불과 폭염과 폭우와 같은 자연재해로 경북의 이재민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과 인류가 힘과 지혜를 모아 이 파국적 흐름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도 언젠가 그런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가뭄, 산불, 폭염, 폭우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인재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환경운동가 중에 일본 교토대 공과대학 교수 출신의 쓰치다 다카시(槌田 劭) 선생님이 계십니다. 직접 유기농 농사도 지으시고 생활협동조합을 운영하시기도 하셨고 탈원전 활동도 하셨습니다. 다카시 선생님은 현대문명의 가장 큰 문제를 ‘대량 생산 대량 소비’로 보셨습니다. 필요를 넘어선 탐욕이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선생님은 모든 생명이 공생하기 위해서는 공생공영(共生共營)이 아니라 공생공빈(共生共貧)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공생공빈>, 34쪽) 조금만 생각해도 공생공영은 불가능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Global Footprint Network라는 환경운동단체의 계산에 따르면 현재 세계 모든 사람이 미국 사람처럼 많은 것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지구가 다섯 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공생공영이 아니라 공생공빈이 모두가 살 길입니다.
2. 생명의 포도나무, 예수
예수님은 일생을 비우며 사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구유 안에 놓이셨습니다. 이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살아가실 삶에 대한 예고편이었습니다. 구유가 이 땅의 낮은 존재인 말과 당나귀의 밥그릇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 가난한 사람들의 주린 몸과 영혼을 땅과 하늘의 양식으로 채워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있을 곳으로 내어주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면서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이미 공생애 기간 내내 제자들에게 있을 곳, 집이 되어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늘 그 안에서 머물고 싶은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 당신을 십자가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여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구유, 집, 십자가, 그 셋 모두 예수님이 당신을 비우심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를 관통하는 세 가지, 말구유와 집과 십자가는 모두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삶은 나무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막6:3) 평생 나무처럼 살고, 나무를 다루며 사셨던 예수님은 급기야 요한복음 15:1에서 당신 자신을 ‘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후에 긴 말씀이 이어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나무인 내게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 열매는 주님 안에 거하는 이가 맺게 되는 사랑의 열매를 말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이는 주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며 살게 됩니다.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후에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잘라 버려질 것이고 불에 태워질 것이다’라는 무서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는 결코 그 반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너를 이용하며 사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나무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을 정의하신 말씀이 여러 개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00이다’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고 합니다. 에고 에이미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에고 에이미 구절을 묵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구절을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 선언으로 읽지 않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예수님을 향한 고백으로 읽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포도나무다.”라는 말과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의 포도나무였어.”라는 말 중 어떤 말이 더 의미가 깊은 말이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를 자신들을 살리시기 위해 흘리신 생명의 피로 체험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포도나무’ 그 자체였습니다.
3. 은총의 숲
사과나무와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사과나무는 소년과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둘은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청년이 된 소년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나무는 내다 팔라며 사과를 내주었습니다. 어른이 된 소년이 집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나무는 집을 만들라며 큰 가지들을 내주었습니다. 중년이 된 소년이 멀리 떠나고 싶다고 말하자 나무는 배를 만들라며 몸통을 내주었습니다. 노인이 된 소년이 돌아와 쉴 곳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밑동만 남은 나무는 밑동을 의자로 내주었습니다. 셸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동화에 나온 사과나무만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나무가 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실로 나무는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줍니다. 살아서는 산소와 과일과 약재를 내줍니다. 죽어서는 밥그릇, 집, 가구, 악기, 책, 연료가 되어줍니다. 그리고 썩어서는 다음 세대를 위한 양분이 되어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8에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여기서 다스리라는 말은 지배자처럼 군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라다’(Radah)라고 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그대로 자연을 돌보고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특별한 권한처럼 생각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유일한 청지기가 아니라 유일한 문제입니다. 생태계는 인간 없이도 존속 가능합니다. 아니, 인간이 없으면 훨씬 더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합니다. 프랑스의 식물생태학자인 자크 탁상(Jacques Tassin)은 “지구는 식물의 행성이며 인간은 지구와 식물에게 대단히 불친절한 영장류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무처럼 생각하기>, 자크 탁상. 190쪽) 문제 많은 인간에 비해 나무야말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와 그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인간까지도 목숨 바쳐 지켜주는 충직한 하나님의 청지기인 것입니다.
6월 17일은 세계 사막화 방지의 날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사막화되고 있습니다. 몽골도 예외가 아닙니다. 청파교회는 사막화 방지를 위해 지난 2009년부터 기독교환경운동연대와 더불어 몽골에 ‘은총의 숲’을 조성해왔습니다. 17년간 약 25,000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만 심은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마을 공동체를 살리는 일도 해오고 있습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은총의 숲 사업을 담당하고 계신 이진형 목사님께서 작년에 저에게 사진을 한 장 보내오셨습니다. 야트막한 언덕에 숲이 조성되어 있었고 그 중 제법 큰 나무 아래에는 ‘청파동산’이라는 동판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사진을 보내면서 이런 글도 함께 보내셨습니다. “동판을 설치한 나무는 포플러 나무입니다. 포플러 나무는 빨리 자라 땅에 그늘을 드리워 수분 증발을 막아주고, 새들에게 깃들 곳이 되어주고, 다른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바람을 막아줍니다. 은총의 숲의 맏형 같은 참 고마운 나무입니다. 은총의 숲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신 청파교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몽골의 황량한 대지 위에 청파의 이름으로 심겨진 나무들이 은총의 숲을 이룬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직접 가보지는 못해도 은총의 숲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몽골 은총의 숲은 청파교회가 후원하여 조성한 숲이지만 청파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떤 교회로 존재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청파교회가 하나님이 떠올리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시는 이 땅의 은총의 숲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땅만 사막화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욕망과 욕망이 부딪히며 곳곳이 서걱거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의 뜨거운 바람이 붑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려 할 뿐 자연과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직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우리 청파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충직한 일꾼, 나무 같은 일꾼이 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아낌없이 내주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 청파교회가 그런 나무들이 모여 더불어 숲을 이룬 은총의 숲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