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

Chungpa Imgs

금주의 설교

교회안내

집회 안내 & 찾아오시는 길.

예배시간안내

유아부예배 11:00 유아부실
유치부예배 11:00 유치부실
아동부예배 11:00 교육관
청소년부예배 11:00 청소년부실
청년부예배 14:00 교육관
1부 예배 09:20 대예배실
2부 예배 11:00 대예배실
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월,토,일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담임목사 김재흥

  • [약력]
  • 감리교신학대학교 졸업
  •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 2003년 1월 청파교회 부담임목사 취임
  • 2024년 4월 청파교회 담임목사 취임
  • [저서]
  • <평등과 영원의 복음, 로마서>
  • <산티아고 다이어리>

   김 목사는 청파교회에 부임한 이래 낮은 목소리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드러난 자리에 서기보다는 늘 낮은 자리에 서서 다른 이들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었습니다.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힘썼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또렷한 메시지를 담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함께 이루어가야 할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진 세상, 낯선 이들과도 사랑으로 소통하는 세상이 아닐까요? 김 목사는 바로 그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참 고마운 인연입니다. 듬쑥한 그의 사람됨을 알기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청파교회 원로목사 김기석

원로목사

김기석 목사

부교역자

이재훈 목사

선교부/예배부
hoon@chungpa.or.kr

김형욱 목사

관리부/재무부/청년부
wook@chungpa.or.kr

이성언 목사

교육부/문화부/평화부
un@chungpa.or.kr

이어진겨레 전도사

사회봉사부/환경부/청소년부
eojin@chungpa.or.kr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김재흥(2025-06-29)
듣기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1. 우울하고 불안한 우리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우리는 6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 화요일부터 7월이 시작됩니다. 한 해의 절반을 지나 새로운 절반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나온 반년을 돌아봅니다. 지난 반년 우리사회와 세계를 지배했던 정서는 우울과 불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지난 반년의 시간을 참으로 힘겹게 보냈습니다. 결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고 국민은 반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몇 달 동안 내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밤잠을 설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한국사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사회구성원간의 갈등지수가 높은 사회입니다. 그리고 업무강도가 높고 어디를 가나 승자독식,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 지수도 높고 우울 지수와 불안감 지수도 높은 편입니다. 얼마 전에 나온 조사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우울감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황장애 발생 비율은 최근 6년 사이에 1.7배 그러니까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조사 내용 중 특별하게 제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었습니다. 강남3구의 만 9세 이하 어린이들의 우울과 불안지수가 다른 지역의 어린이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여러분이 예상하는 바와 같이 지나친 조기교육 때문이었습니다. 지나친 조기교육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기교육이 아니라 우울과 불안에 대한 조기교육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아픕니다. 지금 우리한국사회는 집단적 치료와 국가적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세상의 상황도 좋지 않습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전쟁하는 나라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쟁을 직접 벌이고 있는 나라 이외에도 용병으로 참전하는 나라와 군사적 원조를 하는 나라와 내전 중인 나라들까지 계산하면 전쟁하는 나라들이 10개국이 훨씬 넘습니다. 그리고 강대국들은 자국중심주의를 표방하며 직접 전쟁을 벌이거나 아니면 전쟁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언제든 전쟁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점점 전쟁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자국중심주의를 표방하는 나라가 늘어나면서 국제사회의 갈등과 긴장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울감과 공황장애 발생 비율을 조사를 할 수 있다면, 분명 그 수치는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도 아픕니다. 집단적 치료와 세계적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정치적 혼란, 사회적 갈등, 과도한 경쟁, 전쟁과 자국중심주의, 그리고 그로인한 우울과 불안. 그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해결을 못하고 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는 우울과 불안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디 좀 우울하고 불안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들 인간이 그렇게 우울과 불안한 존재인줄 알면서 왜 우리는 서로를 더욱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이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문제인 우울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2. 절망과 슬픔과 두려움을 속에 놓인 제자들
요한복음 20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문을 닫아걸고 지냈습니다. 요한복음 20:19에 보면,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을 닫아걸고’가 아니라 ‘문을 모두 닫아걸고’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이 성전지도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로 하여금 방안에만 있게 만든 것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났다는 절망감, 오랜 시간 믿고 따랐던 스승이 죽었다는 슬픔 또한 제자들을 무력하게 만든 이유였을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과 불안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 후 예수님께서는 못 자국 난 두 손과 창 자국 난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문이 닫혔던 방 안에 갑자기 등장한 존재에 깜짝 놀랐던 제자들은 그 존재가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고는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복음에서 ‘보낸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상에 보낸 존재로 인식하며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왔던 실로암의 뜻 자체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낸 사람들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좀 무리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상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불안 속에서 모든 문을 닫아걸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흡사 겁먹은 패잔병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예수님도 그걸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세상은 오늘 우리의 세상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이었으며 목자 잃은 양떼 같은 길을 잃고 헤매는 이들이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으며 그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며 아주 특별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창조하셨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을 닫아걸고 방 안에 있던 제자들은 그저 절망과 슬픔과 불안에 잠식당한 흙덩이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절망과 슬픔과 불안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주심으로 제자들을 새롭게 빚어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꼭 닫아 걸었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던 일,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숨,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놀랍지요. 우리들 위에도 제자들에게 임한 동일한 예수님의 숨과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도 새롭게 빚어지고, 새로운 숨을 쉬게 되고, 밖으로 나가 제자들처럼 생명의 말을 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반복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위기의 순간 당신을 배신했던 제자들이 절망과 슬픔과 불안에 짓눌려 방 안에 갇힌 듯 지내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들을 걱정해서 ‘너희들 괜찮니? 정말 괜찮니?’ 반복해 물으신 것입니다. 그 구절을 묵상하며 마음이 찡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아픔보다 제자들의 어려움을 먼저 살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도 제자들을 그렇게 사랑하셨고, 죽어 부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입니다. 불안에 짓눌려 문을 모두 닫아걸고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던 이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로 새로운 숨쉬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겁먹은 패잔병 같이 쓰러진 이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것도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주십니다. 우울과 불안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며 살길 소망합니다.

3.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3년 전 어느 날, 저는 숨을 편하게 쉬고 있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숨이 평소보다 얕고 가빴습니다. 깊은 숨, 자유로운 숨, 평안한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침 김기석 목사님이 저의 청파 사역 20년 근속 기념으로 30일 휴가를 다녀오라고, 지금 안 가면 금방 없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급하게 여행계획을 세워야 했고 그때 결정한 여행이 산티아고 순례였습니다. 저는 순례를 시작하는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800킬로미터의 길을 걸으며 매일 드렸던 기도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숨에 대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깊은 숨, 자유로운 숨, 평안한 숨을 쉬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런 숨을 쉬기 위해서는 진정한 깊음과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평안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숨을 쉬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당신의 숨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에게 당신의 숨을 주신다면 그 숨은 저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전해질 것입니다.”

산티아고 길을 걸어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은 길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걸었던 긴 길도 저에게 깨달음을 주었지만, 거기서 만난 사람들은 그보다 많은 깨달음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은 서로를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다가가 “괜찮아요?”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물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나누어 주었고, 마실 것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모두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했습니다. 배낭을 대신 들어주고, 자기의 지팡이를 내어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침대도 양보하고 바닥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순례자들은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상처도 꺼내 눈물로 서로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탈리아 친구들과 함께 걷다가 일정 때문에 중간에 헤어져 혼자 앞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거의 끝지점까지 왔을 때, 이 속도로 가면 다시는 그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틀 동안 천천히 걸으며 친구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친구들 중에는 무릎이 안 좋은 친구도 있었는데 저를 만나기 위해 이틀 동안 빠른 속도로 걸어왔습니다. 언덕에 서서 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아래서 친구들이 올라옵니다. 다리를 조금 절룩이며 환한 얼굴로 걸어 올라옵니다. 저는 그 세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해준 사랑이 저에게 다가와 새로운 숨이 되었습니다. 그 덕에 저의 숨은 좀더 깊어지고 자유로워지고 평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와 세계를 잠식하고 있는 우울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우선 과도한 경쟁과 욕망의 질주와 이기심과 폭력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더욱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만의 평화와 평안에 매몰되지 말고 서로의 평화와 평안을 물어야 합니다. “괜찮습니까?” “정말 괜찮습니까?” 자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를 보았을 때 그를 돕기 위해 나만의 세계의 문을 열고 그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아픔보다 너의 어려움을 먼저 살피는 것이 사랑임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에게 평화와 사랑이 되어 줄 때 나와 너 사이를 막고 있는 닫힌 문들이 열릴 것이고, 우리는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나, 저마다 깊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숨을 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