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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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월,토,일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담임목사 김재흥

  • [약력]
  • 감리교신학대학교 졸업
  •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 2003년 1월 청파교회 부담임목사 취임
  • 2024년 4월 청파교회 담임목사 취임
  • [저서]
  • <평등과 영원의 복음, 로마서>
  • <산티아고 다이어리>

   김 목사는 청파교회에 부임한 이래 낮은 목소리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드러난 자리에 서기보다는 늘 낮은 자리에 서서 다른 이들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었습니다.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힘썼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또렷한 메시지를 담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함께 이루어가야 할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진 세상, 낯선 이들과도 사랑으로 소통하는 세상이 아닐까요? 김 목사는 바로 그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참 고마운 인연입니다. 듬쑥한 그의 사람됨을 알기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청파교회 원로목사 김기석

원로목사

김기석 목사

부교역자

이재훈 목사

선교부/예배부
hoon@chungpa.or.kr

김형욱 목사

관리부/재무부/청년부
wook@chungpa.or.kr

이성언 목사

교육부/문화부/평화부
un@chungpa.or.kr

이어진겨레 전도사

사회봉사부/환경부/청소년부
eojin@chungpa.or.kr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

김재흥(2025-11-09)
듣기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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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력과 은총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금요일은 입동이었습니다. 이제 소한 대한 동지만 지나면 올 한 해도 끝이 납니다. 시간 참 빠르지요. 교회력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11월 다섯째 주일인 대림절 1주가 한 해의 시작이니 11월 넷째 주면 한 해가 마무리됩니다. 연말이라고 생각하니 지나온 한 해를 저절로 돌아보게 됩니다. 올 한 해 세계 곳곳에서 무기를 동원한 전쟁과 경제전쟁이 극심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겪었고 무너졌던 민생과 일상을 이제야 조금씩 회복하고 있습니다. 자연 질서도 무너졌습니다. 올해 여름은 참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덥고 길었습니다. 무덥고 긴 여름이 가고는 바로 겨울이 왔습니다. 여름은 점점 길어지고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 우리나라의 정치적 혼란, 무너지는 자연 질서. 그 모두는 우리의 삶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만 우리의 삶을 무겁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 사이의 내적갈등, 나와 너 사이의 외적갈등.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계속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과거, 늘 버거운 현재, 알 수 없어 불안한 미래, 그 모든 것이 끝없이 갈마드는 우리의 일상 또한 우리의 삶을 무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우리는 삶을 좀더 가볍고 자유롭게 살 수 없을까하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소망은 있지만 어떻게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그 방법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시몬 베유라는 유대계 철학자가 말한 중력과 은총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중력은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지만 은총은 우리를 위로 끌어올린다고, 그러니 중력에 이끌려 살지 말고 은총에 이끌려 살아가자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때 했던 설교 중 한 대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욕망이라는 중력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의 욕망에 이끌리기에 이기적이고, 이기적이기에 타자를 배려하지 못하고, 타자를 배려하지 않으니 쉽게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통해 아픔과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세상을 무겁고 살기 힘든 세상으로 만든다. 은총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은총에 이끌리기에 자신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에 매몰되지 않았기에 타자를 배려하고, 타자를 배려하니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니 생명과 평화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세상을 보다 가볍고 살만한 세상으로 만든다.

올 한 해 제 자신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난 지금 은총에 이끌리고 있는가? 아니면 중력에 이끌리고 있는가?’ 저는 ‘나는 지금 은총에 이끌리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순간보다 그렇지 못한 순간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중력의 힘이 얼마나 크고 센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2. 길과 선택
오늘 저는 여러분과 길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인생은 길과 닮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길을 주제로 많은 가수가 노래를 불렀고, 시인은 시를 썼습니다. 가수 지오디가 부른 <길>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후렴부는 이렇습니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시인 프로스트가 쓴 <가지 않은 길>이란 시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두 갈래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지오디와 프로스트 모두 인생과 길의 ‘미지성’과 ‘선택성’을 말했습니다. 그 끝을 다 알 수 없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가는 것이 길이고 인생입니다. 그런데 길을 선택할 때 그것이 은총이 이끄는 길인지 아니면 욕망이 이끄는 길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데 선수이기 때문이고 그 선택의 결과가 나와 너의 삶 모두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길과 선택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많은 길을 걸으며 많은 선택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살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곳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계속 살 수도 있었지만 약속의 땅을 선택하고 먼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번번이 하나님과의 약속 – 많은 자식과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깨어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을 믿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았으며 모든 믿는 이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많은 길을 걸으며 많은 선택을 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형의 것으로 인정하고 살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살기 위해 하란으로 도망가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아들과 많은 재산을 얻었고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형과의 싸움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형에게 나누어주고 그에게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을 통해 야곱은 욕심으로 시작한 길을 은총의 길로 바꾸어냈습니다. 야곱의 아들인 요셉도 고된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나 욕심이 아니라 피붙이인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가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곳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일대에 큰 기근이 찾아왔고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요셉을 찾아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기근 속에서 죽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들을 용서하고 구원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가족을 살리는 길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이 하나의 거대한 민족을 이루는 길이 되었습니다.

길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음으로 배고픔을 면할 수도 있었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음으로 영광을 얻을 수도 있었고, 사탄에게 절함으로 천하를 다스릴 권세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세 가지 갈림길에서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길은 결국 십자가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것에 순종하셨던 예수님도 그 십자가만큼은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할 수 있으시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를 선택하셨고 그 십자가의 길은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였던 이들은 변변치는 않아도 고기를 잡으며 일상을 유지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세리였던 이는 비록 동족의 멸시는 받아도 제법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예수를 죽인 이들이 제자들을 위협할 때, 그들은 예수를 모른다 부인하며 이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선택했고 그 결과 예수의 정신을 이어가는 공동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 또한 그랬습니다. 율법만이 옳고 영원하다고 믿으며 살았던 바울은 계속 그렇게 믿으며 예수 믿는 자들을 율법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그들을 박해하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가다가 자신이 가고 있는 율법의 길이 잘못된 길임을, 그리고 자신이 잘못된 길이라 믿었던 예수의 길이 바른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길에서 길을 돌이켜 예수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를 통해 예수의 복음은 유대를 넘어 세계로 전해졌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들이 다른 길을 갔다면, 정말 모든 것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좋지 않게.

3.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
시편 37편 23절과 2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손을 잡아주셔서 넘어지지 않는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은혜롭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무조건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잡아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갈 때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길, 나만 기뻐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는 일이 비슷하고 근무여건이 비슷하다면 월급이 많은 직장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고 현명한 선택이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이가 옳지 않은 길이라도 돈이 되고 이득만 된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갑니다. 그렇게 내가 기뻐하는 길은 욕망이 이끄는 길입니다. 욕망이 이끄는 길은 또 다른 욕망과 만나 충돌합니다.

그렇게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욕망이 이끄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은총에 이끌려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중력 가득한 세상에서 은총에 이끌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 주님의 은총의 통로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은총을 맛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을 맛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주님의 은총의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길, 하나님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 다른 이에게 주님의 은총의 통로가 되어 주는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런 은총의 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갔기에, 주님께서 그들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그들이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그들의 손을 잡아 넘어지지 않게 하셨던 것이며, 그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도 그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영원한 생명의 지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닌 자기가 기뻐하는 길을 가며 하나님께서 그 발걸음을 지켜주시길 바라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자신들의 손을 잡아주셔서 넘어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며 잘못된 소망입니다.

이번 주 목요일인 11월 13일은 55년 전 전태일이라는 22살의 청년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고자 자신을 환한 빛으로 밝힌 날입니다. 전태일도 길을 선택하고 걸은 사람이었습니다. 재단사였던 전태일은 자신이 받은 월급으로 자기의 일가족을 건사하며 평범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 자기가족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하루에 12시간 13시간 일하고 일당은 짜장면 한 그릇 값도 받지 못하고, 일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던 나이 어린 여공들도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전태일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고자 자신을 환한 빛으로 밝힌 일도 잊지 말아야 하지만, 그가 배고픈 어린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매일 집까지 걸어간 3시간의 퇴근길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걸어간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그에게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전해 준 따스하고 환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욕망의 길을 걷는 자가 아니라 은총의 길을 걷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나는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다른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전하는 길을 가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갈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실 것이며, 우리가 어쩌다 비틀거려도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니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은총의 길을, 누군가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어주는 길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