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약속 임마누엘의 부탁
김재흥(20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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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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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 세상에 참된 생명으로 오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성탄장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도 있고, 리스도 있고, 기다림의 초도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장식은 마구간 장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구간 중앙에 아기 예수님이 누여 있고, 그 옆에 마리아와 요셉이 있으며,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박사들과 목자들도 있으며, 소와 나귀도 있는 장식. 각 교회와 성당은 매해 성탄절마다 교회 마당이나 내부 한 쪽 공간에 그 거룩한 탄생의 장면을 장식으로 만들어 전시합니다. 마구간 장식을 영어로는 내티비티 씬(Nativity Scene)이라고 하는데 13세기에 성프란치스코가 마을의 동굴에서 연극형태로 재현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성탄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의 신비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한 편의 설교입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교회는 교회 앞에 마구간 장식을 해놓았는데 여느 마구간 장식과 좀 다릅니다. 아기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과 동방박사들의 동상이 있는데 그들 사이에 검은 복장을 한 마네킹들이 손에 수갑을 들고 서있습니다. 그 검은 마네킹들은 이민단속국 사람들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메사츄세츠에 있는 한 성당의 마구간 장식도 달랐습니다. 동방박사들과 목자들, 소와 나귀도 있는데 아기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 상 없이 성가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민단속국이 왔다갔다’는 표지만 세워놓았습니다. 일리노이에 있는 한 교회의 마구간 장식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여있는데 손목이 검은색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었습니다. 케이블 타이는 미국 이민단속국이 자주 사용하는 도구로 지난 9월 한국의 근로자들을 단속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도 헤롯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 이민자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마구간 장식들 속에는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셨다면 그런 취급을 당하셨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주민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은 미국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국중심의 정책을 펼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점점 더 많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베트남에서 온 뚜안씨는 올해 10월 공장에서 일하던 중 단속국의 단속을 피하다가 추락사했습니다. 뚜안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였고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하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이주 노동력의 비중이 커져가는 이 때에 현실에 맞게 제도 개편을 하지 않고 단속과 처벌에만 집중한 결과입니다.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문제는 이주민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매일 7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고 있습니다. 지구 평균 기온도 최근 3년 연속 오르고 있어 대형 산불, 폭염, 폭우와 같은 기후 재앙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기후재앙으로 집과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떠돌이로 살고 있는 난민이 4,5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세계는 여러 면에서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찾아간 땅에서 죽어간 이민자들,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이들, 기후 재앙으로 난민이 되어 떠돌고 있는 이들의 절규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아,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2. 임마누엘의 약속
오늘의 설교본문인 마태복음 1:23의 말씀은 이사야서 7:14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본문입니다. 이사야서 7장의 역사적 배경은 이러합니다. 주전 8세기 팔레스타인의 북동쪽에 있던 앗수르 제국이 막강한 군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격해왔습니다. 이에 팔레스타인에 있던 작은 나라들이 연합하여 앗수르에 맞섰습니다. 우선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연합했습니다. 시리아의 르신 왕과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은 남유다의 왕 아하스에게도 연합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아하스는 그 두 나라와 연합하느니 차라리 앗수르 편에 서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여 연합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연합하여 남유다를 공격해 왔습니다.
막상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남유다의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의 마음은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치는 풀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런 아하스를 향해 이사야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 르신과 베가를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아라. 그들은 타다만 부지깽이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가 믿음 안에서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켜주실 것인데 그에 대한 징조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 ‘처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알마almah’인데 ‘처녀’보다는 ‘젊은 여성’이 올바른 번역입니다. ‘처녀’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베툴라betulah’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알마’라는 단어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처녀’로 번역하였고 기독교에서는 그 번역을 채택하여 마태복음 1:23에 ‘동정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알마가 낳은 아들이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이도 있고, 히스기야 왕이라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알마’가 처녀인지 동정녀인지도 아니고 ‘아들’이 누구인지도 아닙니다. 그 아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아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사람들의 절규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고백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 아들을 예수님으로 고백합니다. 마태복음은 앞부분인 1:23에서 임마누엘로 시작하였는데 마지막인 28:20도 임마누엘로 끝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이었습니다.
3. 임마누엘의 부탁
그런데 저에게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임마누엘의 약속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부탁처럼 다가왔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 속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지?’라는 절규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악함과 약함 때문이었습니다. 약탈과 전쟁과 같은 인간이 만든 고난이 없던 적이 없었고, 질병과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없던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마다 인간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인가?’ 절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역사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너희 중 누군가는 그런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이에게 다가가 내가 그와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부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인 동시에 임마누엘의 부탁을 자신을 향한 부탁으로 받아들이신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습니다. 폭력적인 로마제국에 짓밟히고 형식적 율법주의에 빠진 성전체제에 이용당한 채 ‘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절규하던 이들 곁에 다가가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그것이었습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부탁은 예수님 한 명만을 향한 부탁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알마를 통해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향한 부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탄절에 임마누엘의 탄생을 축하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자신이 임마누엘의 존재로 재탄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며, 그 선물을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최고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주님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만 2년 동안 계속되었던 이스라엘과 가자의 전쟁은 지난 10월 휴전에 이르렀습니다. 사진을 보았습니다. 무너진 건물 잔해를 배경으로 가자지구의 아이들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어찌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아이들의 표정이 밝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아이들 사이에 한 어른이 루돌프 사슴 복장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우리 모두가 임마누엘의 존재가 되길 소망합니다. 임마누엘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임마누엘로 뛰어 들어가 그곳을 임마누엘의 공간으로 만드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