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처럼 너른 품 되어
김재흥(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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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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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멀어진 고향집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추석연휴 중 맞는 주일입니다.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달맞이는 잘 하셨습니까? 추석날에는 날씨가 궂어 보름달을 볼 수 없었지만 어제는 보름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름달을 바라보노라면 이런저런 세상 일로 군데군데 찌그러졌던 우리의 마음도 다시 둥글게 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 얼굴 중에도 보름달 같은 얼굴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찌그러진 마음이 펴지는 얼굴.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얼굴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추석 보름달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해가 갈수록 명절의 풍경이 바뀌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명절이면 시외버스터미널에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하였고 몇 시간씩 줄을 서서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풍경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추석 명절에 본가나 친척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절반뿐이고 나머지 절반은 집에서 쉬거나 여행을 간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중요한 것보다는 편리한 것을 선택하고 우리보다는 나를 중시하며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4년 전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목표지점인 산티아고가 가까워질수록 내 존재의 고향집,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느낌을 점점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럴 때면 <집으로 오는 길> (가수 토마스 쿡)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떠올라 조용히 읊조리며 걸었습니다.
해가 지는 그곳으로 외길을 따라 무거워진 발길을 재촉해
어지러운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 가끔씩은 두렵기도 했지
저 반짝이는 불빛을 따라 떠났던 길 혹시 너무 멀리 가버린 건 아닌지
무엇이 되려했나 이 험한 세상에서 난 또 어떤 걸 갖고 싶었나 집으로 오는 길
오늘 우리는 반짝이는 것을 쫓아 살다가 점점 우리 존재의 고향집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전쟁과 환경파괴를 일삼는 세계가, 갈등과 분열이 극심한 한국사회가, 그리고 사회에서 신뢰받지 못하는 우리 한국 개신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올해 초에 있었던 한국 개신교회에 대한 신뢰도 조사 발표가 늘 마음 한곳에 불편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개신교회를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에 단 19%만이 ‘그렇다’라고 답했고,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이 75.4%였습니다. 불신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공익보다 교회 이익을 앞세운다’,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다’, ‘정치적으로 극우화되어 있다’. 이기적인 예수, 배타적인 예수, 극우집회에서 깃발을 휘날리는 예수. 상상이 되십니까? 안 어울리지요? 오늘 한국 개신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습니다.
2. 탕자의 참회와 아버지의 용서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유한 아버지로부터 미리 유산을 청해 받은 둘째 아들은 먼 지방에 가서 방탕하게 살며 그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게다가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 하는 수 없이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부정한 짐승으로 여긴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둘째 아들의 삶이 바닥에 떨어졌음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비참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가 고파 돼지의 먹이인 쥐엄 열매라도 얻어먹으려 했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의 품꾼들은 먹을 것이 풍족한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라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추락은 우리에게 좌절감을 주지만 때때로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도와주기도 합니다. 둘째 아들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초라함과 더불어 아버지의 크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새로운 결단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하기로 작정하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거리가 먼데도 둘째 아들이 오는 것을 알아보고는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을 시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완전한 용서, 은혜, 회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테슈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테슈바는 회개, 참회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입니다. 테슈바, 진정한 회개는 다음의 것들을 갖추어야 합니다. 잘못에 대한 인정, 진심 어린 후회,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보상함, 다시 반복하지 않음. 탕자의 비유 속에는 아버지의 용서와 탕자의 돌이킴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범한 잘못을 깨달았고, 진심 어린 후회를 하였고,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일하겠다며 용서를 구하고 나름 피해를 보상하려 했으며,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둘째 아들이 테슈바라는 참회의 언덕을 넘어섰을 때 그는 자신을 향해 품을 열고 달려오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잘못은 쉽게 지적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도 ‘그게 뭐’, ‘내가 언제’라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으니 책임도 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 반성하지 않은 잘못, 사과하지 않은 잘못, 책임지지 않은 잘못이 장벽처럼 쌓여만 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 장벽은 나와 너 사이의 길뿐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길까지 막아버립니다. 잘못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을 반성하지 않음이 커다란 문제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3. 또 한 명의 탕자
탕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한 명의 탕자가 등장합니다. 탕자가 잘못된 것에 빠져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큰아들 또한 탕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음악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알아보니 동생이 돌아왔고, 아버지가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신 것입니다. 큰아들은 화를 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 그를 달랬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분노로 가득 찬 큰아들의 눈동자가 보이는 듯합니다.
큰아들 속에는 동생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보았을 때 동생은 아들의 자격을 스스로 저버렸기에 다시 아버지의 집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랬기에 그의 돌아옴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큰아들의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분노는 아버지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큰아들은 탕자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의 판단과 행동을 정죄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자기가 세운 기준으로 동생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정죄한 순간 큰아들 또한 탕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욕망을 아버지보다 중하게 여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큰아들은 자신의 기준을 아버지보다 중하게 여겨 아버지의 마음을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테슈바, 참회를 통해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큰아들은 테슈바, 참회에 이르지 못한 채 몸은 아버지의 집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성전의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꼭 큰아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정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정한 자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부정한 자들은 성전에 들어 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배만 불릴 뿐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린 성전체제를 비판하셨습니다. 성전 뜰에서 제물을 팔고 사고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주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던 눈 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만나 고쳐주셨습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느새 스스로 하나님 이상의 존재가 되어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까지 성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성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안아주셨습니다.
지난 9월 17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학술세미나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감신대 학장을 지내셨던 변선환 박사의 신학에 대한 세미나였습니다. 변선환 박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된 세미나였습니다. 그런데 일부 학생들이 같은 장소에서 자신들의 행사를 열겠다며 맞섰습니다. 세미나 주최 측과 학생들은 두 시간이 넘도록 대치했고 결국에는 경찰까지 출동했습니다. 학생들은 강단 앞에 모여 찬송을 불렀고 한 학생은 강단 앞에 드러눕기까지 했습니다.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세미나를 반대한 것은 변선환 박사를 예수를 부정한 신학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도 변선환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만난 변선환 교수님은 누구보다 열렬히 예수를 사랑했던 분이었고 복음의 본래적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던 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분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받아들인 사람을 하나님의 집 밖으로 내몰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이상의 존재로 여길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4. 보름달처럼 너른 품 되어
추석 때가 되면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이상국 시인의 <진부령>입니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이상국 시인은 내내 강원도에서 살았습니다.
내 스무살 저 지랄 같은 새벽 아버지 소 판 돈 몰래 들고
서울 가는 디젤버스 기름냄새에 개처럼 헐떡이며 넘던 영
그 큰 소 다 털어먹고 추석명절 달그늘만 믿고 돌아오던 날
먼지 낀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면목없는 얼굴을 비춰보다가
고개말량 이르면 눈물나던 영
스무 살 아들이 겁도 없이 아버지 소 판 돈을 가지고 진부령을 넘어 서울로 갑니다. 그런데 그 큰 돈을 다 말아먹고 맙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버지의 넉넉함을 믿고 다시 진부령을 넘습니다. 먼지 낀 차창을 닦아 얼굴을 비추어 보는데 왜 이리 못나 보이는지, 아버지 얼굴은 또 어떻게 볼 수 있을지, 눈에서는 눈물만 납니다. 회초리를 맞았는지, 크게 꾸중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끝내 아버지는 추석 보름달 같은 얼굴로 아들을 품어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탕자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둘째 아들과 큰아들이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 용서를 받은 이후 그 하나님처럼 너른 품으로 다른 이를 안아주기보다는 어느새 하나님 이상의 존재가 되어 이미 하나님이 받아주신 사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나의 마음 밖으로 몰아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디 진심 어린 참회를 통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맛보고, 또한 서로에게 너른 품이 되어 주는 청파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