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돌로 지은 집
김재흥(202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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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존재로서 여러분도 집 짓는 데 사용되어 신령한 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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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신도 주일과 온전한 그리스도인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 주일이며 감리교회가 지키는 평신도주일입니다. 평신도주일. 좀 낯설지요?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79년 총회 결의에 따라 매년 6월 첫째 주일을 평신도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축을 이룬 평신도의 사명과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예전에 우리 청파교회는 평신도주일에 예배 사회를 평신도가 맡아서 한 적도 있습니다. 작년 은평청파교회에서는 곽권희 장로님이 설교를 하셨더군요. 감리교회는 초기부터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해온 교단입니다. 감리교회를 세운 존 웨슬리는 평신도를 설교자로 교회 강단에 세웠습니다. 물론 영성과 실력에 대한 검증을 거친 사람들로 세웠지요. 그뿐 아니라 감리교회의 가장 기초가 되는 모임인 ‘밴드’, 오늘 우리가 ‘속회’라고 부르는 평신도 모임 또한 평신도 리더가 인도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감리교인이, 모든 평신도가 성화聖化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웨슬리는 성화에 이르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거의 그리스도인’ (Almost Christian)이라고 말했습니다. ‘거의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거듭나지 못한 자입니다. 일반인보다 좀 더 윤리적입니다. 성경 읽기, 기도, 예배 출석, 헌금과 같은 경건 행위도 행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은 의무의 대상에 머뭅니다. 웨슬리는 성화에 이른 그리스도인을 ‘온전한 그리스도인’(All together Christian)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거듭난 자입니다. 그에게 윤리는 외부의 규율이 아니라 내면화 된 규율입니다. 그의 경건은 모양으로 드러나지 않고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또 그에게 하나님은 의무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초기 감리교회 평신도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듯이 모이기를 힘쓰고, 자신이 체험한 구원의 은총을 어려운 이들과 나누기를 즐거워했습니다. 하여 초기 감리교회는 날마다 모이는 이들이 늘어났고, 노예해방 · 빈민구제 · 아동교육 · 여성인권운동까지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사회의 성화까지 이루려 노력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초기 감리교회 교인들처럼 ‘거의 그리스도인’을 넘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2. 버림받은 돌이 생명의 돌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다.
오늘은 베드로전서 1,2장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 평신도들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전통적으로는 네로 황제 박해 시기(64~68년)를 배경으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박해 시기(81~96년)를 배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박해 시기에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이유로 지위와 재산을 빼앗겼으며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가 아니라 오늘의 튀르키예 지역에서 신앙생활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인 서신입니다. 튀르키예에서는 로마에서와 같은 큰 박해는 없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로부터 집단적인 차별과 배제를 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국이 박해하는 소수자는 사회적으로 차별당하고 배제당하기 십상이지요. 튀르키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부당하게 헐뜯었습니다.(3:16) 그리스도인이 자기들처럼 술에 취하고 환락을 즐기지 않는다고,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는다며 비방하고 모욕했습니다.(4:4,14) 예수 믿음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예수 믿음은 것은 고난, 고통, 손해, 버림받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그런 배경을 이해하고 읽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주님께 나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있는 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이사야 28:16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과 시편 118:22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튀르키예의 교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아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여러분도 교회를 이루는 생명의 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이라 이름지어 주셨지만 정작 베드로는 예수님을 교회의 반석, ‘머릿돌’로 삼을 때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2:9에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택하신 백성’,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말 하나하나가 튀르키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감동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이 그들이 처한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도 튀르키예도 그들을 백성으로 여기지 않고 배제했습니다. ‘왕’은 고사하고 ‘모욕당하는 자’였습니다. 족속과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고난 받는 소수자였습니다. 소속감과 정체성이 여지없이 흔들리는 튀르키예의 그리스도인을 향해, 베드로는 그들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이 부분이 낭독되었을 때 튀르키예 교인들은 이곳저곳에서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호칭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호칭이 아닙니다. 욕망의 거센 물결에 편승해 살아가는 이는 들을 수 없는 호칭입니다. 세상의 그릇된 흐름과 시류를 거슬러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 이들에게만 허락된 영광된 이름인 것입니다.
3. 생명의 돌로 지은 교회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과 2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돌로 교회를 짓는 법’ 곧 바른 교회를 세우는 방법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곳에서(1:1과 2:11) ‘나그네 됨’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규정했습니다. 나그네가 되어 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을 본향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살라는 말이며, 썩을 것에 집착하지 말고 썩지 않을 것을 추구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나그네의 영성을 가지고 사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지요. 둘째, 고난을 통해 아름답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6,7과 2:19이하에서 고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기뻐하라. 주님은 불의 연단을 통해 우리를 금보다 귀한 것이 되게 하신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놓인 십자가라는 고난을 피하지 않으심으로 아름다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셋째, 서로 사랑하며 살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22와 2:15,17에서 사랑과 선행을 강조했습니다. 거듭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며,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선행은 우리가 이기성을 뛰어넘을 때에야 발휘됩니다. 날마다 그 이기성을 뛰어넘어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신 분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따라야 합니다.
고급 대리석으로 크고 높고 넓고 화려하게 지었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셨지만 늘 하나님 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사셨던 예수님, 나의 구원이 아니라 너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예수님, 사는 내내 있는 힘껏 사랑과 선행을 행하셨던 예수님을 머릿돌로 삼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라 욕망과 그릇된 시류를 거스르며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하나하나의 돌이 되어 세워지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8년 청파교회가 설립 100주년을 맞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 목회사무실 자리는 본래 절반은 관리인 사택이었고 절반은 교사실이었습니다. 각각 8평 정도의 공간이었습니다. 두 공간을 하나로 터서 세미나실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벽을 허물었습니다. 시멘트 덩어리와 벽돌뭉치들이 벽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30여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벽돌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 벽돌들은 저렇게 한 자리에서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 이제 교회가 새로운 공간을 필요로 하니 깨끗하게 자리를 비켜주는구나.’ 그 벽돌들은 자연스레 30년 동안 교회 관리인과 주방봉사자로 수고하시고 은퇴하시는 노용래 집사님과 차혜심 권사님의 얼굴과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작디작은 8평 공간에서 세 식구가 30여년 긴 시간을 사시다가 벽돌들처럼 말없이 떠나시는 집사님과 권사님. 그 두 분으로 인해 청파교회가 얼마나 든든했던가. 저 말없는 성실한 섬김으로 청파가 오늘에 이르렀구나. 슬픔, 아쉬움, 남모르는 눈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차혜심 권사님이 그런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권사님은 늘 미소와 감사와 겸손을 간직하셨습니다.
매 주일마다 예배의 자리를 자신이 지켜야 하는 소중한 자리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교회에 나와 예배를 준비하는 찬양대원들과 방송실 봉사자들과 예배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학원 스케줄에 쫓기면서도 놀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교회에 오는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에게 말씀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주일에 청파가 예배 공동체에 이어 친교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해 정성껏 맛난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청파교회를 생명과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속회, 선교회, 부서, 동호회, 새교우부를 마음 다해 이끄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직장과 학교,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과 평화라는 가치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애쓰고 있는 교우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고맙고 고맙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청파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생명의 돌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삼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릇된 시류를 거스르며,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어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