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든 신앙인
김재흥(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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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통치자들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막는 곳과 같게 될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을 것이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을 것입니다.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경솔하지 않을 것이며, 사려 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아무도 어리석은 사람을 더 이상 고상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며, 간교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하며, 그 마음으로 악을 좋아하여 불경건한 일을 하며, 주님께 함부로 말을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지 않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않습니다. 우둔한 사람은 악해서, 간계나 꾸미며, 힘 없는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거짓말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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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없는 폭염? 철없는 인간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금요일은 입추였습니다. 입추가 가을은 아니지만 ‘가을이 곧 오겠구나’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웠습니다. 그날 노원구는 기온이 40.2도까지 올라갔습니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사상 여름 최고기온은 2018년 41도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여름 양산에서 42.5가 관측되면서 8년 만에 최고기온 기록이 1.5도나 상승한 것입니다. 좋지 않은 지표입니다. 좋지 않은 지표는 또 있습니다. 기상전문가들은 1년 중 30도 이상 기온이 오른 날이 30일이 넘고 최고 기온이 40도에 이르는 극단적 폭염을 해마다 겪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2024년 전까지는 그랬던 해가 세 번뿐이었는데, 2024년부터는 계속 그런 날씨를 겪고 있습니다. 뉴 노멀, 극단적 폭염이 우리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결코 달갑지 않은 일상입니다.
좋지 않은 지표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그런 극단적 폭염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프스에서는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면서 빙하가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고, 유럽을 관통하는 라인강과 다뉴브강 등 물류이동과 발전소 냉각수로 사용하는 강물이 마르면서 유럽의 여러 국가가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야경이 멋진 도시인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전력소비를 줄이기 위해 야간에 최소한의 전등만 밝혀 어둠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경고인데 가뭄으로 말미암아 올 가을 농산물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 내년에는 심각한 식량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사람이 기존 인원에서 4,900만 명이 추가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입추가 되어도 폭염이 계속되는 모습을 보면서 한 신문은 날씨에 대한 기사 제목을 다음과 같이 뽑았습니다. <오늘 입추 맞아? 철없는 폭염> 날씨가 전혀 절기에 맞지 않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입추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더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극단적인 폭염은 폭염이 철을 몰라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철이 들지 않아서 일어난 일입니다. 철은 계절과 시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극단적 폭염은 우리 인간이 늘 눈앞의 이익과 욕심과 편한 것만을 좇아 살아갈 뿐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를 분별하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의 아픔을 살피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철든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철없이 살고 있습니까?
2. 철없는 사람과 새로운 왕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서 32장의 역사적 배경은 주전 8세기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동북쪽에서 앗수르가 일어나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며 제국을 형성했습니다. 앗수르는 점점 팔레스타인 나라들을 점령했고 주전 722년에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자 앗수르의 다음 타겟은 유다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그 누구보다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은 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혼란을 틈타 자기의 배를 불렸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좋아하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1:23) 부유한 자들은 토지를 독점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마저 빼앗았습니다.(5:8) 재판관들은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빼앗고 부유한 자들을 위해 불의한 법을 제정했습니다.(10:1,2)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31장을 보면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이집트를 의지했습니다. 이는 비신앙적인 행위인 동시에 시대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유다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멸망의 조짐은 외부 세력인 앗수르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유다 내부의 부패와 비신앙과 하나님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철없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32장에는 ‘어리석은 사람’과 ‘우둔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시편과 지혜서에 등장하는 악인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는 어리석은 말을 하며, 주님께조차 함부로 말을 하고, 악을 좋아하고 간교한 계략 꾸미기를 좋아했습니다.(6,7절)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자를 고상한 사람과 존귀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5절) 그렇게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자를 고상한 사람과 존귀한 사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 반대로 정말로 고상하고 존귀한 사람을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만 철없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철없던 것입니다. 시편과 지혜서에서 악인의 반대되는 존재로 의인이 언급되듯이 이사야서 32장에도 의인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의인의 모습은 왕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32:1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는 이사야 한 명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부패하고 비신앙적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를 깨닫지 못하던 철없는 유다의 지도자들을 보며 실망했던 모든 유대인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32:2은 유다 사람들이 고대하던 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피하는 곳과 같으며,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으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은 사람.’ 그 당시 사람들은 삶을 광풍과 폭우와 메마름과 사막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그런 지도자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3. 철든 신앙인
성서학자들 중에는 이사야가 소망한 왕을 히스기야 왕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세운 우상을 부수고 성전을 정화했습니다. 흩어진 북쪽과 남쪽의 백성을 모아 대대적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앗수르의 오랜 공격에 대비해 터널을 만들어 예루살렘성 밖에 있던 샘물을 성 안쪽으로 끌어왔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바르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사는 그릇된 삶의 양태를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다른 신들을 버렸고, 그릇된 삶의 기준도 버렸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자신과 국가의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히스기야는 남유다 백성뿐 아니라 나라를 잃고 남으로 내려온 북이스라엘 사람들까지 하나로 끌어안고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만큼 히스기야는 품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예루살렘 성의 최대 약점이었던 물 문제까지 해결했습니다. 그런 히스기야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광풍과 폭우를 피할 곳, 메마른 땅의 냇물,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히스기야에게도 단점은 있었습니다. 굳건하게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고 외세를 의지하여 앗수르와 이집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 온 사절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들을 자랑하듯이 내보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철이 든 왕이었지만 완전히 철이 든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버렸지만 자만심까지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때로는 주변의 강대국과 자신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사야가 기다린 왕은 히스기야였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이치를 완전히 구현할 메시아, 구원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과 이사야가 꿈꾸었던 왕의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광풍과 폭우를 만난 이들에게 피할 곳이 되어 주셨고,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이에게 냇물이 되어 주셨고, 사막을 걸어가는 이에게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철든 신앙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이치를 깨달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생명들에게 내가 광풍과 폭우와 메마른 땅과 사막이 될 수도 있음을 자각하면서 조심히 사는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광풍과 폭우를 만난 이에게 피할 곳이 되어 주고,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이에게 냇물이 되어 주고, 사막을 걷는 이에게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지난 7월말 몽골에 생태기행을 갔을 때, 테를지 국립공원이라는 곳도 들렀습니다. 국립공원답게 산에는 나무도 많고 들판 중앙에는 냇물도 흘렀습니다. 그리고 기암절벽들도 많아 절경을 이룬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과 숲과는 달리 그늘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른 아침이 되자 말들이 들판을 뛰어다니며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뜨거워지자 말들이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 둘레로 모여들었습니다. 바위 밑에 드리워진 작은 그늘 아래로 머리를 디밀고는 마치 반상회라도 하듯이 둥글게 모였습니다.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볕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서로의 몸에 붙어 있는 벌레를 서로의 꼬리로 쫓아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위가 드리운 그늘에 비하여 모여든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말들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며 바위를 중심으로 빼곡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교회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늘 아래 모여 세상의 뜨거운 볕을 피하고 서로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임. 한 사람이라도 더 품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의 모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광풍을 만나고, 누군가는 폭우를 맞고 있으며, 누군가는 메마른 사막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피할 곳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냇물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가 철든 신앙인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려서 안 그래도 뜨겁고 메마르고 광포한 세상에 또 하나의 광풍과 폭우와 사막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러셨듯이 서로에게 피할 곳과 냇물과 그늘이 되어주는 청파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