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6. 미혹됨을 경계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 4:7~14
설교일시 2022-11-13
오디오파일 s20221113-2.mp3 [50955 KBytes]
목록

미혹됨을 경계하라
히 3:7-14
(2022/11/13, 창조절 제11주)

[○그러므로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날에 반역한 것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시험하여 보았고,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세대에게 분노해서 말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미혹되어서 내 길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우리들의 광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입동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계절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색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떨어져 쓸쓸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 풍경을 더욱 쓸쓸하게 하는 것은 잦아들지 않는 라헬들의 울음소리, 슬픔과 분노를 묻어버리려는 이들의 무정함입니다. 무정함이야말로 인간의 퇴락頹落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바울은 말세의 징조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먼저 사랑의 대상을 바꿉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무정함, 난폭함, 비방이 난무합니다(딤후 3:1-5 참조). 막스 베버는 사람들이 더 이상 삶의 의미에 대해 묻지 않고 또 생각하지도 않는 시대에 ‘영혼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가 등장할 거라면서 그들을 가리켜 ‘말인末人’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소명은 자기를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는 것이 인간됨의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한스 큉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잘라 묻건대: 왜 그리스도인인가? 이렇게 우리는 이 책을 시작했었다. 역시 잘라 대답하건대: 참으로 사람이고자!”(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p.358). 사람다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 가슴은 저절로 시원해지고 영혼은 고양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참 하나님Vere Deus, 참 사람Vere Homo’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 말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지만, 이 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표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 살면서 세상의 모든 아픔을 부둥켜안으신 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분을 가리켜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사람’의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을 잘 걷고 있는지요?

오히려 욕망의 벌판에서 서성이느라 마땅히 가야 할 목표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출애굽 공동체가 거듭되는 어려움을 겪으며 애굽을 미화하여 기억한 것처럼, 우리도 두고 떠나온 옛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허울뿐이고,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데 우리는 푯대이신 주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 가운데 사납고, 무정하고, 남을 비방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이들이 이리도 많은 것은 어찌된 일인지요? 허위의식을 믿음이라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세상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립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충분히 경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미래에 자기를 맡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는 압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압도적인 타자들 앞에서 자기들은 메뚜기처럼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는 마음이 중력처럼 그들을 잡아당기자 저절로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미혹되었던 것입니다.

• 우리 안에 있는 부역자
‘미혹迷惑’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림’,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 헤맴’입니다. ‘미’ 자는 ‘쉬엄쉬엄 갈 착辶’과 ‘쌀 米’가 결합된 글자입니다. 여기서 쌀 미 자는 실은 ‘길이 사방으로 뻗어나간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어지럽게 갈래가 져 섞갈리기 쉬운 길을 미로라 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혹’은 ‘혹시 혹或’과 ‘마음 심心’이 결합된 글자입니다. ‘혹시 혹’ 자는 어떤 사람이 창을 들고 성을 지키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미혹할 혹惑 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성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미혹됨의 뿌리에 ‘두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맞설 힘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줄 어떤 강한 힘을 원합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많은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독일인들은 자기들을 이끌어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히틀러는 바로 그런 마음을 파고들어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영적 신비의 가면을 쓴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끌리는 것도 비슷한 이치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의 말은 극단적이고, 확신에 차 있고, 분열적입니다. 그래서 힘 있게 느껴집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는 대중적 명성을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영적인 체하지만 실은 극단적인 유물론자들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기 목적을 위해 돈을 끌어 모읍니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은 자기에게 속한 이들이 다른 이들과 창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자기들 속에만 진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곳에서 벗어나는 순간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사회적 태도를 조장합니다. 악마의 그물입니다. 미혹하는 영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을 보며 분노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박정오 목사님이 가끔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는 목사들을 보며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지 언제 ‘내 양을 먹으라’ 하셨냐”. 모음의 위치 하나를 바꾸자 그 의미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거짓이 진짜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미혹 당하는 까닭은 자기 속에 부역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혹은 이미 우리 속에서 싹틉니다. 마귀는 그 틈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립니다. 마귀는 우리 안에 숨겨진 욕망을 부추기기도 하고, 우리 속에 두려움의 씨앗을 심기도 합니다. 우리가 미혹자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자족하는 마음을 연습해야 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 삶을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과도한 욕망과 두려움이야말로 마귀가 우리 속에 들어올 틈이기 때문입니다.

• 일상이라는 덫
소유나 이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미혹자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 단순한 사랑은 불가능해집니다. 자기애에 사로잡힌 이들일수록 다른 이들과 허심탄회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경탄의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에게 몰두하고 있기에 이웃들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여 참 사람의 길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고후 13:5)

우리는 믿음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깨어 있습니까? 깨어 있다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 우리 삶의 안온함을 깨뜨릴 때가 있습니다. 홀로 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절박하게 도움을 간청합니다. 어떻게 보면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굳게 비끄러매는 끈이 되기도 합니다. 시련 그 자체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시련으로만 맞아들이면 우리는 흐물흐물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더 깊이 접속한다면 그 시련은 복된 시련이 됩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한 야곱은 엉덩이뼈가 탈골되는 부상을 입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경험과 지성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품은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그런 경험을 한다고 하여 우리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만 육욕의 버릇 때문에 우리는 미끄러져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 할 때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사귀어오던 옛날의 헛된 일, 어리석은 일들이 내 육체의 옷자락을 붙들고 소곤대는 것이었습니다. ‘우릴 버리고 갈텐가?’ 또 ‘이제부터 그대와 있기는 영원히 그만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이것도 저것도 영영 그대에겐 당치 않단 말인가?’”(성아구스띤, <고백록> 8권 11장, 최민순 역, 성바오로출판사, p.216).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청구서를 받을 때마다 갖은 핑계를 대며 주님의 요구를 외면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아까워합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부끄러움조차 없어집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참 사람의 길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 공동체를 이루라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아시기에 공동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을 통해 형성된 초기 교회는 이 땅에 이식된 하나님 나라의 모본이었습니다. 함께 먹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는 일체의 장벽이 무너진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하나 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어떤 강제도 없었습니다. 영원성이 그들의 일상 속으로 뚫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사도는 그런 경험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말합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 3:13)

우리 인생이란 어찌 보면 ‘오늘’의 점철點綴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 인생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당도한 빛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은총은 만나처럼 매일매일 내립니다. 그 만나를 먹으며 조바심을 내려놓을 때 참된 안식이 찾아옵니다. 주님은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서로를 지켜주고, 북돋고, 곁에 있어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구원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확신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 뜨거움이 있습니까? 진리를 알고자 했던 그 갈망이 여전합니까? 두려움 없이 믿고 있습니까? 미혹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보다 세상의 갈채에 더 몰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래 전부터 제 마음에 간직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꾀꼬리는 자기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꾀꼬리가 노래를 시작하면 개구리들이 합창을 하듯 개굴개굴 울어댔습니다. 꾀꼬리는 속이 상해서 노래를 멈췄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데 개구리가 자꾸 방해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꾀꼬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노래를 그치니 개구리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구나.” 우화일 뿐입니다. 개구리 소리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기승을 부린다고 하여 선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평화의 노래,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 않기에 악한 이들의 노래가 세상을 울리고 있습니다. 자유롭고, 명랑하고, 단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무정하고 난폭한 세상은 다정한 사람을 부릅니다. 세상과 쾌락을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신음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사 6:8). 이사야처럼 우리도 주님의 선한 싸움에 동참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1월 13일 12시 08분 2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