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5. 믿기에 말한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 4:7-15
설교일시 2022-11-06
오디오파일 s20221106-2_설교.mp3 [49735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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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에 말한다
고후 4:7-15
(2022/11/06, 창조절 제10주, 추수감사주일)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 양가감정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 깊은 애도의 마음과 분노를 품고 사셨을 교우들의 마음이 제게도 아릿하게 다가옵니다. 대형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희생된 이들에 대한 최고의 애도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재난에 대비하는 매뉴얼을 마련하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대책을 세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쟁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은 우리 국민들을 죽음의 위험 앞에 방치했습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할 당사자들은 참사의 책임을 타자들에게 전가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각 정당이 도심 곳곳에 건 애도의 플래카드를 보면 화가 납니다. 누구도 ‘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애도할 일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정치인들에게 권한을 위임했지만, 그들은 애도의 몸짓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스승을 참칭하는 어떤 사람은 이태원 참사는 큰 기회라면서 큰 질량으로 희생해야 세계가 돌아본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차마 인간의 말이라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종교 지도자를 자임하는 어떤 사람은 이 참사가 정권을 흔들기 위해 북한이 보낸 공작원들이 일으킨 일일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이들입니다. 시편 시인의 호소가 천둥소리가 되어 들려옵니다. “하나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소송을 이기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버려두지 마십시오”(시 74:22).

우리는 이런 착잡한 마음으로 추수감사주일을 맞았습니다. 호젓한 평화를 함께 누리고, 따뜻한 감사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기대했습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지키시고, 돌보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셨던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 우리의 소망을 짓부수고 말았습니다. 주중에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매년 첫 열매를 주님께 바쳤던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올렸던 과일 장식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가 예년처럼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곳에 놓인 과일들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입니다. 시련의 시간을 넘어 희망을 파종해야 하는 우리 소망의 상징입니다.

•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
어려운 시간일수록 우리가 누구인지를 꼼꼼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겸허하게 성경에게 길을 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일종의 광기에 휩쓸린 채 히틀러를 마치 메시야인양 숭배하던 시기에 독일의 양심적인 목사들은 성경에 의지하여 그 위기를 돌파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주’는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기드온’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의 제단만을 두고 있다”면서, “우리는 결코 인간을 숭배하는 제단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딘 G. 스트라우드 편집, <역사의 그늘에 서서>, 진규선 옮김, 감은사, p.137ff). 평범한 듯하지만 이 고백 속에 담긴 의미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나치가 득세하고 있던 독일교회의 강단 위에는 히틀러의 초상화를 걸어야 했고 나치의 깃발을 세워두어야 했습니다. 본회퍼는 그 참담한 상징들을 강하게 부정했던 것입니다. 체포와 박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거짓을 거짓으로 폭로한 일단의 신앙인들은 어두운 시대에 밝혀진 인간의 등불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후 3:17)고 말합니다. 우리는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사랑과 능력과 절제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딤후 1:7). 찬송가 336장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리가 자주 불렀던 찬송 가운데 하나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환난 중에서도 맛보는 기쁨을 바라보며 우리는 깊은 일치감을 느꼈습니다. 2절을 부를 때는 더욱 비장해졌습니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양심은 자유 얻었네’라는 구절이 우리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 지금 우리는 무력해졌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삽니다. 보상을 바란다는 말이 아니라, 미래적 희망이 우리를 힘 있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이 누릴 가장 큰 영광을 주님과 같은 모습(eikōn)으로 변화(metamorphoō)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경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점점 주님을 닮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성심껏 사랑하는 사람,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수납하는 사람, 사람들을 가르는 장벽을 철폐하는 사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는 사람, 사람들을 도구로 삼는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사람, 그러면서도 스스로 거칠어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을 닮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예수와 만난 이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배격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간교한 일을 행하지도 않고,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다른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진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냄으로 떳떳한 삶의 본이 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합니다. 저는 지난 주 중에 대구에 있는 동산의료원 교직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잠시 짬을 내서 박태준 선생님의 ‘동무 생각’이라는 가곡으로 유명한 청라언덕에 올라갔습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이 노래 기억나시지요? 청라는 푸를 ‘청靑’ 자에 담쟁이 넌출을 뜻하는 ‘라蘿’ 자를 씁니다. 대구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의료 봉사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심은 것이 담쟁이였다고 합니다. 구한말 그 언덕은 성 밖에 있는 일종의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무연고자들을 묻기도 했고, 도성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가져다 버리기도 했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그곳을 ‘똥산’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그곳에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진료하고 학교를 세우면서 그곳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이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동산이라 하여 여호와이레 동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똥산을 은혜의 동산으로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왜 초기의 선교사들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며 희망을 파종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빼고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고후 5:14). 바울 사도의 이 말은 강력합니다.

• 질그릇에 담긴 보물
그리스도의 빛,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면에 간직한 사람은 떳떳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이런 말로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고후 4:7). 질그릇은 우리의 몸을 이르는 말입니다. 물론 몸이라 하여 살덩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생각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연약함 속에서 허둥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빛이 우리 안에 머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자기가 더 큰 생명에 삼켜진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시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 앞에 자신을 더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기 속에 계신 주님이 비추시는 빛을 따라 겸손하게 걸을 뿐입니다.

저는 노자 도덕경(4장, 56장)에 나오는 한 구절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마땅한 삶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노자는 진리에 이끌려 사는 사람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좌기예挫其銳, 해기분解基紛, 화기광和其光, 동기진同其塵, 즉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엉클어진 것을 풀고 빛을 감추어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빛과 만난 사람은 남과 자기를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날카로움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평화는 그 날카로움을 조금 무디게 할 때 시작됩니다. 자기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스스로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한 광경이 떠오릅니다. 반딧불이를 몇 마리 잡아 호박꽃 안에 넣고 빙빙 돌리면 호박꽃등이 환해졌습니다. 반딧불이를 괴롭힌 것은 미안하지만 그 은은한 빛은 그야말로 평화의 빛깔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과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강력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에 든든한 기둥을 세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질그릇에 보물을 담고 있는 이들은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8-9)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이미 몸에 짊어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의 생명도 나타납니다. 이번 주간에 답답한 마음에 서가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꺼내서 여기저기 눈길 가는 대로 읽었습니다. 나치 시절에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가 처형당한 이탈리아인들의 마지막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었습니다. 한 인물이 남긴 편지에 제 눈길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알도 메이(Aldo Mei, 1912-1944) 신부는 정치적 탄압을 받는 사람들과 유대인 청년을 자택에 숨겨준 죄로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며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이 엄숙한 시간에도 저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저는 결코 죄를 짓지 않았으니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파렴치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면서 그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사랑을 위해서만 살고 싶었던 제가 증오의 어두운 폭풍우에 휩쓸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주는 사랑입니다Deus charitas est’. 그리고 주는 죽지 않습니다. 고로 사랑도 죽지 않습니다! 저는 저를 죽이려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을 것입니다. 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아픕니다…. 주의 위대한 용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저는 자비를 베풀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된 온 세계를 자비로운 영적 포옹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습니다.”(<피에로 말베치·조반니 피렐리 엮음,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 임희연 옮김, Old Ben, p.342)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그는 증오와 원망과 낙심으로 자신을 고문하지 않았습니다.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 근원적 희망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고후 4:14). 이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쓰라린 잔을 원망 없이 마실 수 있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골짜기를 믿음으로 통과했기에 그는 비로소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는 시편의 구절을 담대하게 인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은 시편 116편 10절의 칠십인역 번역에서 인용한 것이라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겨놓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시 116:10)

바울 사도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자기를 멋지게 포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접속한 채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은혜 안에서 살 때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 솟아오르는 법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지나며 우리는 지난 날 우리를 선대하시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신 가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샘물이 솟아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시 84:6).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호 2:15)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도와 슬픔과 격분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희망의 노래를 멈추지 마십시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이 말을 꼭 붙들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1월 06일 12시 13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