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4. 으뜸이 되려는 욕망을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20:24-28
설교일시 2022-10-30
오디오파일 s20221030-2_설교.mp3 [47135 KBytes]
목록

으뜸이 되려는 욕망을 넘어
마 20:24-28
(2022/10/30, 종교개혁 기념주일)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 지금 우리 현실
아프고 참담하고 슬픕니다. 151개의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이태원 참사로 죽어간 이들을 주님께서 품에 안아 주시기를 빕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유족들이 시련의 시간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의 소중한 설 땅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5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로부터 시작되어 15세기 체코의 얀 후스를 거쳐 16세기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이르기까지 개혁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되찾아야 한다는 말은 뭔가를 잃었음을 전제합니다. 개혁자들은 교회와 신학이 신자들의 하나님 체험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생동감 넘치는 구원의 경험은 구원론이 대신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교리 속에 박제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 교회는 점점 부유해졌고 권력의 단맛에 흠뻑 젖어들었습니다. 개혁자들은 그런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전래 이후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던 한국의 개신교회는 그만큼 빠르게 쇠퇴하고 있습니다. 구한말을 거쳐 일제 강점기, 민족 분단 시기, 민주화 운동 시기를 거치는 동안 민족사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응답했을 때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교회 성장주의가 한국 교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는 역사를 하나님 나라 방향으로 이끌기보다는 자기 몸집을 불리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시민사회의 영역과 분리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역사 발전의 걸림돌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개신교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묻는 설문에 사람들이 답한 말은 충격적입니다. ‘거리를 두고 싶은’, ‘이중적인’, ‘이기적인’, ‘사기꾼 같은’, ‘배타적인’, ‘부패한’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이런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신자 수가 200만 명이나 감소했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속상하고 억울하지만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이런 때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를 매년 반복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많이 들어보셨지요?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a scriptura(오직 성서로만), sola gratia(오직 은총으로만),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앵무새처럼 이 말을 반복한다 하여 교회가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한국교회에서 오염되었거나 오용되고 있습니다. 삶과 고백, 세속과 교회, 거룩함과 속됨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위한 갈망, 기도와 성찰, 치열한 노력은 없고 고백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담들을 당신의 몸으로 허무셨지만 교회는 오히려 높은 담을 쌓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 믿음은 거래가 아니다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길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답답한 마음 때문일 겁니다. 한 주간 동안 찬송가 300장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함께 하며 내 짐을 지시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은혜가 족하다고?’ 하지만 이 곡을 반복하여 부르는 동안 제 마음이 더 큰 세계에 접속됨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십자가에 처형당하기까지 하셨지만 한 순간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사랑의 선한 싸움을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을 낙심시킬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에 눈을 뜨자 현실이 달리 보였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을 때, 싸움이 맹렬하여 두려워 떨 때, 번민이 가득 차고 눈물이 흐를 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공급됩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마다 회중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585장(‘내 주는 강한 성이요’) 2절은 우리 희망의 뿌리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우리는 주님의 싸움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싸움에 나서는 사람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삼 년이나 주님과 동행했던 제자들도 여전히 손익을 계산하는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던 어느 날, 세베대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을 찾아와서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마 20:21)라고 청합니다. 주님은 두 제자에게 눈길을 주며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은 그 대답에 자기들의 운명이 걸려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즉각적으로 대답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열 제자가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습니다. 그들이 분개한 까닭은 차마 대놓고 밝힐 순 없었지만 자기들 역시 바라는 바를 두 형제가 먼저 끄집어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미 세 번이나 예루살렘에서 당신이 겪을 고난을 예고하셨지만 그들은 제자들에게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소음에 익숙해진 귀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지 않고, 자기로 꽉 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머물 곳이 없는 법입니다. 믿음은 투자나 거래가 아닙니다. 손익을 계산하는 마음이야말로 믿음의 진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입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게 마냥 기뻐서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믿음의 입구에 들어섭니다.

• 포옹 속에서 피어나는 꽃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몸을 가진 존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중심성이야말로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족쇄입니다. 비애감은 내가 중심이 되지 못할 때, 그리고 다른 이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할 때 찾아오는 부정적 감정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씨앗입니다. 남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턱없는 우월감을 드러내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비하의 감정에 빠지거나 세상이나 이웃에 대한 원한감정을 품고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선망과 원망 사이에서 바장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경쟁은 일상이 되고, 경쟁의식은 우리에게서 참된 쉼을 앗아갑니다.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맑고 따뜻하고 고운 웃음을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삶의 여백이 줄어들면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 혹은 극복해야 할 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힘의 논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힘을 얻기 위해 양심까지 팔아버립니다. 주님은 그런 세상에 속한 이들에게 삶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바라보자고 제안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25-27)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지 않으면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자기에게 위임된 권력을 사욕을 위해 사용하거나,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데 사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불의한 권력은 사람들의 가슴에 원한감정을 심어줍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자기와 소속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 하여 함부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기는 사람, 다른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는 공포심을 심어주면서 절대로 호락호락한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높아져야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상반되는 이 두 가르침 사이에서 서성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조금 더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비겁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정신이라야 진정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사랑에서 비롯된 섬김과 힘에 굴복하여 드러내보이는 비굴함을 구분합니다. 진정한 섬김과 겸허함은 다른 이들 속에 가능성으로만 있던 아름다운 품성을 깨어나게 합니다. 큰 정신과 만날 때 우리 영혼이 자랍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님이 최근에 낸 시집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를 읽다가 ‘포옹’이라는 시와 만났습니다. 거의 80 중반에 이른 노시인의 깨달음이 농축된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게 싹튼다/포옹 속에서./부화하고/태어난다/포옹 속에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시어입니다. 그런데 시의 이 대목에 이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포옹 이외에 이념이 없고/포옹 이외에 종교가 없다)/그리하여/지구는 꽃핀다/포옹 속에서.” 사람들을 달뜨게 만드는 모든 이념의 고갱이는 포옹이어야 하고, 다름을 사랑으로 품어 안는 것이야말로 종교적 가르침의 진수라는 말이 아닐까요? 시인은 오직 포옹 속에서만 지구라는 꽃이 핀다고 말합니다. 그 꽃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에게 품부된 삶을 한껏 살아내고 온갖 생명이 흥청거리는 평화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짧은 시 속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 팔복의 징표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호젓한 평화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기후 위기라는 조종이 이미 울렸습니다. 위기의 조짐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기후 재앙의 규모는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지고 부정의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누리는 것을 다 누리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를 경쟁의 벌판으로 마구 떠밀어댑니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래서 더욱 자기를 닦달합니다. 자기를 성찰하거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는 물론 없습니다. 우리 삶이 기적임을 알아차리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댈 수 있었던 공동체도 하나 둘 사라지고, 우리는 점점 외톨이가 되고 맙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 사느라 지친 이들에게 환대의 공간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품을 열고 사람들을 받아 안고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기 삶이 무한히 값지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 연결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다양한 꽃들이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는 다양한 이들이 어울리는 장소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중심에 잇댈 때 비로소 그 어울림은 가능해집니다.

교회가 팔복의 징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시적으로 드러낼 때 비로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옥중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주님께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주님은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 11:3-5). 이런 생명 회복의 사건들이 곧 주님이 누구신지를 입증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기적입니다.

교회를 통해 잠들었던 생명이 깨어나고, 메말랐던 사랑의 샘이 시원한 물로 가득 차고, 힘겨운 일을 만나도 명랑함을 잃지 않는 이들이 늘어나고,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면서도 스스로 거칠어지지 않는 많아질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제도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변화와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사뭇 따갑지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0월 30일 12시 15분 3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