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 삶과 죽음의 경계
설교자 김기석
본문 대상 21:27~22:1
설교일시 2023-02-12
오디오파일 s20230212-2.mp3 [4753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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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
대상 21:27-22:1
(20233/02/12, 주현 후 제6주)

[그리고 주님께서 천사에게 명하셔서, 그의 칼을 칼집에 꽂게 하셨다. 그 때에 다윗은, 주님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그에게 응답하여 주심을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 때에,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주님의 성막과 번제단이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다윗은 주님의 천사의 칼이 무서워, 그 앞으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그 때에 다윗이 말하였다. “바로 이 곳이 주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 곳이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다.”]

• 벼랑 끝에 선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그리고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 피해자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사망자가 2만 5천 명에 이른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건물의 잔해에 갇힌 채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구조대원들에게 힘과 능력을 더해주시기를 빕니다. 대형 재난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가 긴급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입니다. 우리 교회도 최선을 다해서 그들의 설 땅이 되기 위해 힘을 모으려 합니다. 사건에 대한 성찰은 꼭 필요하지만 지금은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대규모 재난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의 행태를 연구했던 레베카 솔닛은 그런 참극의 순간이야말로 순수한 인류애가 발현된다고 말합니다. 종교, 이념, 국가, 문화, 피부색을 넘어 모든 이들이 함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류의 하나됨이라는 꿈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서 시민들의 열정이 식으면 피해자들은 자기들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레베카 솔닛은 2005년 8월 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의 남동부를 강타했던 사건을 떠올립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뉴올리언스는 홍수로 인해 제방이 붕괴되면서 혼돈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카트리나의 진정한 폭력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고립된 수만 명에게 상처가 된 것은 단지 끔찍한 폭풍우와 도시를 덮친 홍수,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독사가 우글대는 물, 살갗에 물집이 잡힐 만큼 살인적인 무더위, 더러운 물에 둘러싸인 고가도로에서 사람들이 출산을 하고 죽어간 종말론적 날들, 많은 사람들이 축축하고 더러운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탈출하기를 포기하거나 아이들을 먼저 대피시키기 위해 떠나보내야 했던 끔찍한 경험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정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상처는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한 때에 자신들이 동물로 취급되고 적으로 취급되는 현실이었다.”(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p.367)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동정 피로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열정은 식고 일상이 힘들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피해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고, 그들과의 대면을 꺼리고, 심지어는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에게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역정을 내거나, 모진 말로 상처를 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지긋지긋해 하는 곳, 자비의 마음이 사라진 곳,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이런 때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설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설 땅이 되어주고,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벼랑 끝에 선 채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삶이 아닐까요? 믿음의 사람들이 서야 할 자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입니다.

• 인구조사 속에 담긴 오만한 자부심
오늘은 다윗의 생애 말년에 벌어진 한 사건을 통해 이러한 진실에 접근해보려 합니다. 사울 왕이 죽은 후에 다윗은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부스 사람들이 살던 성을 빼앗아 다윗성이라 명명하고, 밀로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을 쌓아 든든한 요새처럼 만들었습니다. 그의 곁에 있는 장군들은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역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성경은 그 모든 성공의 원인을 한 마디로 정리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으로, 다윗은 점점 강대해졌다”(대상 11:9).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이야말로 그의 형통의 비결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습니다. 언약궤야말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징표인 셈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될 때야말로 위험한 때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자기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잘 들어맞아서 찾아온 행운을 자기 능력으로 치환하는 순간 오만함의 함정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오만한 이들은 특권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특권의식이 찾아오는 순간 공감의 능력은 쇠퇴합니다. 자기가 빚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기능력을 과신하고 허세를 부릴 때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눈빛이 흐려지면 하나님이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노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부귀이교富貴而驕면 자유기구自遺其咎라’, 재물이 많고 벼슬이 높아서 교만하면 스스로 그 허물을 남긴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참 절묘합니다. ‘공성명수功成名遂거든 신퇴身退하라 그것이 天之道니라’(도덕경 제9장). 즉 어떤 일을 이루어 이름을 얻었거든 얼른 몸을 빼는 것이 하늘의 도리라는 뜻입니다.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많은 전리품을 거두었습니다. 암몬과 시리아와의 전쟁에서도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대상 21:1)고 말합니다. 미묘한 지점입니다. 다윗이 실시한 인구 조사를 사탄의 부추김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인구 조사는 대개 두 가지 목적에서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왕들은 누구나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에 대해 현황을 파악하고 싶어 합니다.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군마를 의지하고, 많은 병거를 믿는 것을 불신앙으로 간주합니다. 그것에 의지하는 순간 사람들은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충언을 합니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 이런 일을 명하십니까?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받게 하시려고 하십니까?”(대상 21:3b)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요압의 두려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지부동입니다. 요압은 왕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와 인구 조사를 완료한 후 “칼을 빼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온 이스라엘에는 백십만이 있고, 유다에는 사십칠만이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다윗은 그 상황을 흐뭇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풍찬노숙하던 시간, 아둘람 굴에 은거하며 근근이 버텨야 했던 시간, 가드 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그 신하들이 자기를 없애려는 것을 알고 미친 척하며 위기를 넘겼던 일(삼상 21:13) 등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겁니다.

• 오르난의 타작 마당
그러나 바로 그때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행위를 용납하실 수가 없었기에 벌을 내리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삼 년 동안의 기근, 원수의 칼을 피하여 석 달 동안 쫓겨 다니는 것, 사흘 동안의 전염병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하셨습니다. 다윗은 비로소 사태가 엄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주님의 자비에 기대어 주님의 손에 벌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전염병이 그 땅을 휩쓸었고 무려 칠만 명이 쓰러졌습니다. 그의 자부심의 근원이었던 백성들이 속절없이 스러진 것입니다. 참 무서운 경고입니다. 왕의 잘못된 선택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치려 할 때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만하면 됐다. 이제 너의 손을 거두어라”(21:15) 이르셨습니다. 15절이 하나님의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했다면 16절은 다윗의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합니다. 다윗은 천사가 칼을 빼어 들고 예루살렘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 옷을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다윗은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엄청난 악을 저지른 것은 자기이고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다면서, 자기와 자기 집안을 치시고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전염병을 거두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파하심과 다윗의 호소가 절묘하게 공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갓을 통해 오르난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제단을 쌓으라 명하십니다. 다윗이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위해 갔을 때 오르난은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알아본 그는 달려와 절을 하며 왕을 영접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주님의 제단을 쌓기 위해 그 타작 마당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오르난은 그런 뜻이라면 왕께 기꺼이 바치겠다고 말하고, 왕은 반드시 충분한 값을 치르고 사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 사이에 아름다운 거래가 성립되었고 다윗은 그 땅을 구입한 후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그에게 응답하셨다고 말합니다. 타작 마당은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수확의 자리인 동시에 심판의 자리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망설이다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로 타작 마당에 양털 뭉치를 놓아둘 터이니 그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다른 땅은 말라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삿 6:37). 그 청은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사야는 바빌론의 억압이 끝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아, 짓밟히던 나의 겨레요, 타작 마당에서 으깨지던 나의 동포여”(사 21:10)라고 탄식합니다. 여기서는 타작 마당이 심판의 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르난의 타작 마당은 그런 의미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입니다. 심판과 은총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다윗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가 느낀 두려움은 형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놀람입니다. 호기롭게 인구조사를 명하던 다윗은 사라졌습니다. 그 깨달음의 자리야말로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언합니다. “바로 이 곳이 주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 곳이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다.”(대상 22:1)

• 교회의 자리
역대기 기자는 솔로몬의 성전이 바로 이 자리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성전 터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이 바로 이곳이라는 전승도 있습니다(대하 3:1). 경외심이 없다면 세상은 욕망의 전장 혹은 욕망이 거래되는 장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세상의 거짓 신들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차별을 지우고, 모두 사람이 고귀하다는 사실을 혼신의 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과 속,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거룩함의 방향으로 인도하고, 삶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전 6:19)

과감한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성령을 모셔 들인 우리 몸과 마음이 곧 성전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롬 12:15).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고,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외로운 사람의 곁에 머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안온한 일상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귀찮은 일에 연루될 수도 있고,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그런 일을 수행할 때 우리 속에 잠든 하나님의 성품의 씨가 싹을 틔우기 때문입니다. 낙엽을 들추면 수선화 싹이 올라올 때입니다. 하늘의 빛을 받아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선한 가능성들이 깨어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2월 12일 12시 05분 1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