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4:23-25
설교일시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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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마 4:23-25
(2023/02/05, 주현 후 제5주)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 희망 한 톨 불어넣는 사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현절기 한복판에서 입춘을 맞이했습니다. 이미 남녘에는 성급한 매화 몇 송이가 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겨울이 아직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봄은 벌써 저 모퉁이를 돌아 우리에게 지싯지싯 다가오고 있습니다. 눈석임물이 얼음장 밑으로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습니다. 지금 인생의 겨울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봄볕처럼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전에 저는 믿음의 사람이란 누군가에게 고향을 선물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경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지친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면 언제라도 맞아주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오늘은 믿음의 사람이란 누군가에게 봄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겨울이 안으로 움츠러드는 시간이라면 봄은 자기 속에 있는 가능성을 싹 틔우는 계절입니다. 대지의 품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씨앗이나 알뿌리들은 햇빛과 햇볕의 초대에 응해 싹을 틔웁니다. 봄은 생기의 계절입니다. 죽은 것 속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야말로 생명이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등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죄책감, 세상에 대한 원망, 외로움에 시달리는 동안 마치 고치 속에 들어간 번데기처럼 생기를 잃어버린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은 패배자처럼 취급을 받지만 그들을 귀히 여기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그들 속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이들 말입니다. 우리 교우 조호진 권사님은 그런 이들을 일러 ‘토막 낸 제 몸으로 화톳불을 피워서/추위에 떠는 이웃들을 덥혀준 장작’같은 사람들, ‘희망 한 톨 나눠주시는 봄볕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조호진, <희망 한 톨>, 동연, p.7).

저는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는 말씀에 늘 경탄합니다. ‘생명의 기운’을 뜻하는 히브리어 네샤마nᵊšāmâ는 하나님의 숨을 가리킵니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것은 하나님의 숨이 그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숨은 쉬는 게 아니라 쉬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쉬는 숨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쉬는 숨입니다. 지금 우리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 속에 숨을 불어넣고 계시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함부로 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 지켜봐주는 사람
시편 시인은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 104:29b-30). ‘호흡’과 ‘영’은 모두 히브리어 rûaḥ의 번역어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고 그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요 20:22). 숨은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스데바나와 브드나도 그리고 아가이고가 자기에게 와서 기쁘다면서 “이 사람들은 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고전 16:18)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몬 1:7).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를 주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티 없이 맑고 명랑한 사람일까요? 과도할 정도로 유쾌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도하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생기를 주는 사람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그들이 자기 속도로 성장하도록 기다려주고, 필요할 때 도움을 아끼지 않고, 늘 따뜻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사람들을 대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삶으로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세상에는 정반대로 사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안겨주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사람들, 그들은 삶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들입니다.

미국 교사들의 교사라 일컬어지는 파커 J. 파머는 자전적인 글에서 젊은 날 우울증에 시달렸던 일을 털어놓습니다. 꽤 잘 나가는 교수요 작가였던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일상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그는 우울증은 관계 단절의 극단적인 상태이며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선인 관계성을 끊어버린다고 말합니다. 그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 벗들이 찾아와 우정 어린 충고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날씨가 아주 좋네요. 밖에 나가서 맘껏 햇볕을 쬐며 아름다운 꽃이라도 보는 게 어때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파커. 가르치는 일도, 글쓰는 일도 아주 잘하잖아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구요. 당신이 한 좋은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당신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이런 말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이라는 친구는 달랐습니다. 그는 파커의 허락을 얻어 매일 오후 집에 들러 그를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긴 다음 삼십 분 동안 발을 마사지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직 감각이 살아 있는 그의 신체 중 한 부분, 그래서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빌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말을 할 때도 충고 따위는 절대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느끼는 그의 상태를 말해 주었습니다. “오늘 네가 얼마나 힘든지 느껴진다.” “네가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 파커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말이 당시에 정말 도움이 됐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홍윤주 옮김, 한문화, p.125)

• 가르치고 선포하다
생기를 준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이야말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생기를 주는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生氣는 ‘날 생’과 ‘기운 기’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날 생’과 ‘일어날 기’가 결합된 生起도 있습니다. ‘생기다’는 단어는 ‘없던 것이 있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지친 사람 속에 누군가 생기를 불어넣으면 그는 일어선 사람이 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그러했습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시입니다만 강은교 선생의 ‘당신의 손’은 이것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예수님은 시대적 울분에 사로잡혔던 갈릴리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 곧 ‘베드로’를 보시고 그것을 호명하여 불러내셨습니다. 겨우 제 밥벌이에 여념이 없던 이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고통과 슬픔에 짓눌린 채 살아가던 병자들을 일으켜 세워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로 삼으셨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악마를 몰아내심으로 온전한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던 세리와 창기와 같은 이들을 일으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태는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신 주님이 마침내 갈릴리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들을 세우신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준 후 예수님의 사역을 간단한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주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didaskō). 매일매일 해결해야 할 문제에 붙들려 살다 보면 삶의 방향을 잃기 십상입니다.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자꾸만 일깨움 받아야 그나마 완전히 엇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기생하면서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사는 이들이 종교로 사람들을 어떻게 얽어매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굳어진 종교는 사람들을 해방하기는커녕 속박하기 일쑤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조문에 매인 채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이르셨습니다. 홀로 자족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속한 마음임을 가르치셨습니다. 특별한 것도 없는 일상 속에 깃든 거룩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kēryssō). 예수님이 엄중함과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basileia)는 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실체입니다. 로마 제국이 자랑하던 로마의 평화는 위로부터 규정된 평화, 피로 물든 평화, 희생자들의 신음 소리를 침묵시킴으로 얻는 평화였습니다. 로마는 정복한 땅에 일단 불안과 공포감을 조성하여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 후에야 로마의 발전된 문화로 정복당한 이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나눔과 돌봄을 통해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은 자기중심주의 혹은 자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삶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당당하게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친밀하게 사귀면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땅에서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현실 속으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 예수에 대한 소문
주님은 또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같은 단어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질병을 뜻하는 단어는 ‘nosos’이고, 아픔을 뜻하는 단어는 ‘malakia’입니다. 말라키아는 기본적으로 연약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 의혹, 죄책감, 무력감, 무의미함, 자기 비하의 감정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겁니다. 주님은 병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고, 아픔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질병을 고치는 것은 우리 능력 밖인지 모르겠지만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는 일은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되는 일들입니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4:24)

여기서 느닷없이 ‘시리아’라는 지명이 등장하여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시리아는 로마 통치하에 있던 갈릴리를 포함하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마태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던 장소였기 때문에 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5절은 ‘온 시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을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건너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을 수런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절망의 어둠 속에 있던 이들을 꿈틀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해골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오자 그들이 일어나 하늘 군대를 이루었다는 에스겔의 비전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이들에 대한 소문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조롱과 냉소가 사뭇 차갑습니다.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주님의 마음에 접속된 이들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먼 데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가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는 이들 속에 잠들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깨우는 봄바람과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 소망을 품고 사십시오. 마음의 가난, 슬픔, 온유, 의에 주림, 자비, 마음의 청결, 평화에 대한 갈망이 우리 속에서 스러지지 않는다면,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런 가치들을 굳건히 견지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주님의 생기가 될 것입니다. 입춘 절기에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 봄소식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2월 05일 12시 02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