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 말씀 위에 굳게 세우소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19:129-136
설교일시 202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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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위에 굳게 세우소서
시 119:129-136
(2023/01/01, 성탄 후 제1주)

[주님의 증거가 너무 놀라워서, 내가 그것을 지킵니다. 주님의 말씀을 열면, 거기에서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도 깨닫게 합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시듯이 주님의 얼굴을 내게로 돌리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떠한 불의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사람들의 억압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그러시면 내가 주님의 법도를 지키겠습니다. 주님의 종에게 주님의 밝은 얼굴을 보여 주시고, 주님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들이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립니다.]

• 새해 잡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빕니다. 새해 첫날이자 첫 주일 아침,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시편 찬양이 우렁우렁 가슴에 다가옵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주님을 찬송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칭송하여라.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주님의 진실하심은 영원하다. 할렐루야.”(시 117:1-2) 시간의 새로움은 언제나 낡은 시간과 작별할 때 발생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면서 나타나고(계 21:1), 새 사람은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이 새롭게 될 때 나타납니다(엡 4:22-24).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해돋이를 보러 정동진이나 간절곶을 찾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 한라산 백록담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볼 때마다 제게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박두진 선생님의 ‘해’입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시인은 세상에 어둠이 지극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꽃과 새와 짐승과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에게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는 어둠의 흔적을 떨쳐낸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이고, 밤새 어둠을 살라먹고 새롭게 태어난 ‘앳된 얼굴 고운 해’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이런 얼굴 고운 해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헛된 정욕에 시달리던 어둠의 시간이 물러가고 앳된 얼굴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한다는 것처럼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시인의 고백보다 한결 장엄한 고백이 성경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창 1:2-3)

혼돈, 공허, 어둠, 깊음,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 사고도 많았고, 남북 간의 긴장도 높아가고 있습니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22년의 사자성어는 ‘과이불개過而不改’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수들은 이 말을 통해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소인배 정치를 질타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과이불개는 결국 모든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려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우리는 더욱 ‘빛이 생겨라’ 하신 주님의 은총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우리가 맺는 다양한 관계 속에도, 갈등이 극심한 우리 사회에도, 분쟁이 일상이 된 세계에도 하나님의 빛이 환하게 비치기를 빕니다.

• 한 해의 길양식
오늘의 본문을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일 년을 살아갈 길양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의 문인 오경웅(吳經熊, 1899-1986) 선생이 한문으로 번역한 시편이 있는데, 송대선 목사가 그것을 아주 유려한 우리말로 옮겨 놓았습니다. 오경웅은 오늘의 본문에 ‘한사존성閑邪存誠’이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사특한 생각을 막고 언제나 진실한 세계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악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자장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게도 당당했던 바울 사도의 생의 비밀은 그가 서신에서 자주 사용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 속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산다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본문은 “주님의 증거가 너무 놀라워서, 내가 그것을 지킵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증거’는 주님의 계명 혹은 언약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주님의 증거를 ‘지킨다’고 말합니다. 상을 받기 위해 혹은 벌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에게 있어 주님의 계명은 삶을 옥죄는 강제규정이 아닙니다. 오경웅은 이 대목을 알기 쉽게 옮겨놓았습니다. “거룩한 그 섭리 기묘하시니 제 인생 더욱 더 귀히 여깁니다. 거듭거듭 그 맛 들이노라면 오묘한 뜻 점점 더 깊어집니다.”(129절, 오경웅, <시편사색>, 송대선 옮김·해설, 꽃자리, p.659) 눈을 뜬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 지킨다면 그 속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강제된 것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자발성이야말로 기쁨의 필요조건입니다. 물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다가 예기치 않은 기쁨을 맛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을 오르거나 누군가를 돕는 일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듭거듭 그 맛을 들일 때(反覆玩味) 말씀의 진미가 드러납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가르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정의 방식으로 복 있는 사람을 묘사한 시인은 이제 긍정의 방식으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 1:2). 여기서 ‘묵상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hāḡâ는 묵상하다는 뜻 이외에도 ‘궁리하다, 중얼거리다, 계획하다’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듭거듭 되씹으며 맛을 들이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 말씀의 빛
말씀이 소중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발생하고,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명령과 실행 사이에 틈이 없습니다.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회중들에게 ‘다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하고 말하면 회중들은 ‘왜요?’라고 묻지 않고 일어납니다. 말이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열면, 거기에서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도 깨닫게 합니다”(130절)라고 노래합니다. 오경웅은 이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이 날 때부터 듣지 못하던 이의 귀에도 쟁쟁 울리고,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이도 보게 하고, 어린아이라도 능히 깨닫게 한다고 번역했습니다(振聵發矇, 童蒙悟道). 말씀이 일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사상적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은총의 세계 앞에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통렬한 자기반성이 이어졌습니다. 자기 영혼의 심연을 파헤치고, 자기의 모든 비참함을 찾아내 눈앞에 쌓아 놓았을 때 눈물의 홍수를 동반한 큰 폭풍이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실컷 울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정원으로 나간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쓰러져 눈물 흘리며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오,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당신께서 영원히 노하시려 하십니까? 나의 이전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소서.” 그때 담장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똘레 레게 똘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들고 읽어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습니다.

문득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방으로 달려 들어가 사도의 책을 펼쳐 첫눈에 들어온 구절을 읽었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 13:13-14)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았고,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 즉시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infusa cordi meo)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냈습니다.”(<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제8권12장 28-29절, 선한용, 대한기독교서회, p.272-3) 그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의 진미를 맛본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벌리고 헐떡입니다”(131절). 시인의 이 고백은 절실합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지도 않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주님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시듯이 주님의 얼굴을 내게로 돌리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132절). 주님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야말로 신앙인들의 최고의 복입니다. 그것을 일러 ‘지복직관至福直觀’(visio beatifica)이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고전 13:12a).

• 말씀 위에서 걷는 길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이들은 자기에게 허락된 일상을 순례자처럼 살게 마련입니다. 순례자는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대상들을 순례의 목적지로 안내하는 안내인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성취의 기쁨이나 실패와 고독의 쓰라림도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고자 하는 우리의 안내자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떠한 불의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133절). 오경웅의 번역으로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주의 법에 뿌리 더욱 깊이 내리고 진리 향한 걸음 더욱 굳건해져서 삿된 가르침일랑 이 마음 밭에 영원히 심겨지지 않게 하소서”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선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 말을 주님의 뜻을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의 선한 이웃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선한 이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낌과 존중의 태도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이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다른 이들을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의 종살이에서 해방됩니다. 그들은 남들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턱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투심에 사로잡힐 이유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선 사람들은 더 큰 세계를 바라보며 삽니다. 땅에만 눈길을 주고 살면 우리는 죄의 중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세계와 접속하는 순간 홀가분한 자유가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그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은 편협한 이해관계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기후 위기 시대를 맞이한 인류가 꼭 회복해야 할 가치를 ‘생명애’로 표현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류는 비로소 자각하고 있습니다. 생명 세계 전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아우르는 것이 바로 생명애입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동료 생물체들에 대한 공감적 포용을 의미하는 생명애 의식은 단순히 권장 사항이나 희망 사항이 아니다.”(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안진환 옮김, 민음사, p.330)라고 말합니다. 생명애를 실천하지 않으면 인류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을 넘어,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분노할 때는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나 늘 분노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살벌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대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는 세상을 꿈꾸었던(사 11:6) 이사야처럼, 정의를 뿌려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세상을 꿈꾸었던(호 10:12) 호세아처럼, 우리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꿈이 몽상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그 꿈의 실현을 위해 가장 작은 일 하나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홀로 그리고 함께 걷는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명랑함과 유쾌함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며 세상을 사랑으로 물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1월 01일 12시 06분 0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