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 한나의 시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삼상 1:9~11
설교일시 2022-12-18
오디오파일 s20221222-2.mp3 [47786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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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시간
삼상 1:9-11
(2022/12/18, 대림절 제4주)

[한번은 엘가나 일행이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역사적 이행기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기다림의 절기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보여주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 작품에서 부랑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립니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가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 기다림은 절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시는 분을 잘 압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힘 있고 잘 사는 사람만 평화를 누리는 세상이 아니라, 어둡고 그늘진 땅에 사는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참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좋은 날이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진실한 기다림입니다.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무엘기는 기다림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정착했지만 이스라엘은 주변 부족 국가들의 억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늘 연약했고, 경제적으로는 불안정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살았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들의 시선은 풍요를 약속하는 우상들을 향했습니다. 언약을 통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로 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은 그런 지향 자체를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자유인이 되어 사는 평등공동체의 꿈은 퇴색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존 논리가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덕적 혼돈 상태가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초월에 대한 지향을 잃을 때 역사는 욕망의 전장이 되고 맙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풍요와 편리를 누리기 위해 다른 이들의 몫을 빼앗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방편적 사고가 지배하는 곳에서 평화의 꽃은 피어나기 어렵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정언명령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내가 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정당화 되려면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도 괜찮은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슴없이 다른 이들을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대합니다. 인간성의 파탄이 이렇게 일어납니다.

사사시대 말기는 바로 이런 도덕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사사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삿 21:25). 룻기가 중간에 끼어들기는 하지만 사사기의 이야기는 사무엘기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의 실험을 끝내고 왕정으로 이행해야 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서술되고 있습니다.

• 희망의 단초
그 이야기는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 엘가나는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습니다. 4대 조에 이르는 족보까지 상술된 것으로 보아 그는 명문가 출신임이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Hannah)는 ‘은총’이라는 뜻이고 브닌나(Peninah)는 ‘보석’라는 뜻입니다. 사랑스러운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삼상 1:2b)는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고대 세계에서 자녀들은 하나님의 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자녀들이야말로 부모들의 미래의 보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고의 일단을 룻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나자 이웃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말합니다.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룻 4:15b). 요즘은 후세대에게 이런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지만, 이 시대만 하더라도 자녀는 미래에 대한 보증인 셈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엘가나는 아기를 낳지 못해 슬픔에 잠긴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참 인간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청년 시절 이성부 선생의 시 ‘만날 때마다’에 깊이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시의 3연입니다. “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서로들 외로움만 쥐어뜯는가./감싸 주어도 좋을 상처,/더 피흘리게 만드는가.”(이성부, <百濟行>, 창작과비평사, 1977)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주면 좋을 텐데, 오히려 그 상처를 덧내고야 마는 습성이 인간의 죄성인가요?

한나는 브닌나의 도발에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괴로워서 울었고,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엘가나는 그런 한나를 측은하게 여겨 위로합니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 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삼상 1:8b) 그러나 이런 말로도 한나의 괴로움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은 외부의 빛으로 밝히기 어려운 법입니다.

어느 날 엘가나 일행이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한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자리를 떴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기억해 주셔서 아들을 허락하시면,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기도가 길어지자 성막 문설주 곁에 앉아 있던 엘리가 한나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한나는 마음으로만 기도하고 소리는 내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여겨서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 한나는 자기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면서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한나의 사연을 다 들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며 축복합니다. 한나는 엘리의 그 말을 들은 후 그 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습니다. 한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어둔 밤이 엘리의 축복으로 인해 물러갔습니다. 한나는 신뢰의 사람이었습니다.

며칠 전 ‘세움’이라는 단체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세움은 부모의 수감으로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수감자 자녀들을 돌보고 사회 적응을 돕는 사회복지 단체입니다. 세상 도처에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모임에서 한동대학교 이지선 교수를 만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그분은 대학교 4학년 때 학교 앞에서 차에 타고 있다가 술에 만취한 운전자가 몰던 트럭에 받히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차에 불이 붙어 그는 전신화상을 입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재활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조금 더 쓰기 좋은 몸을 갖기 위해 수십 차례의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에 머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슬퍼하기를 멈추고 주어진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냈습니다. 이지선 교수가 제게 건넨 책을 읽다가 한 구절이 마음에 화살처럼 박혔습니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이지선, <꽤 괜찮은 해피엔딩>, 문학동네, p.21). 놀라운 말입니다. 그는 불행한 일을 겪었지만 그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거듭 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도 그러했습니다.

•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닫혔던 태의 문을 여셨고, 마침내 한나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한나는 청하여 얻은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 혹은 ‘그의 이름은 엘’이라는 뜻입니다. 몸에 새긴 문신처럼 사무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엘가나는 매해 매년제사와 서원제사를 드리러 가족을 데리고 성소를 찾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남편에게 자기에게 말미를 달라고 청합니다. 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때가 이르면 주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님을 뵙게 하고, 평생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아기가 젖을 떼자 한나는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 성소에 갔습니다. 엘가나가 동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나가 이 모든 행위를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나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 제사장을 찾아가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킵니다. 자기를 괴롭히던 원통함, 눈물로 기도했던 시간, 엘리의 꾸지람과 축복,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자기에게 임했는지를 다 밝힌 후 한나는 서원한 대로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경외심에 사로잡힌 엘리와 한나는 거기서 함께 주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 하나님의 권능
사무엘상 2장 전반부는 ‘한나의 찬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주님께서 자기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마침내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비통하게 흐느끼던 시간은 지나갔고 기쁨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입니다. 그 놀라운 경험을 통해 한나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저울 앞에서는 어떤 허위의식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련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한나가 깨달은 것은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삼상 2:4)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아주 강력한 고백이 울려 나옵니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삼상 2:8b). 사적인 고백처럼 보이던 한나의 찬양은 이상하게 끝납니다.

“주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님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삼상 2:10)

이 구절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사무엘기가 사사시대로부터 왕정 시대로의 이행기를 다루고 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엘가나 가문의 이야기, 특히 한나의 이야기는 미래의 이스라엘이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지를 새삼스럽게 보여줍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승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사탄이 심어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아픔 속에 있는 이들을 건드려 상처를 덧내는 이들, 자기에게 위임된 힘을 자기와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이들을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힘 없는 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여인의 태를 여셔서 아기를 낳게 하셨습니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현실이 제 아무리 암담해도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새로운 역사의 꿈을 꾸기 시작해야 합니다. 한나의 노래는 마리아의 노래와 연결됩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치기로 한 산골 소녀 마리아는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눈을 뜬 후 잊지 못할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주린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은 빈손으로 떠나보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러합니다.

지금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울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삶이 위태로운 분들이 계십니까? 불모의 시간을 견디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 어두운 시간을 기쁨의 시간으로 바꿔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불평과 두려움과 잘 헤어지십시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왔음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주님이 머무실 자리를 마련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십시오. 주님의 빛이 우리의 안과 밖을 두루 비춰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2월 18일 12시 00분 0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