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0. 욥의 시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욥 7:1-8
설교일시 2022-12-11
오디오파일 s20221211-2.mp3 [4734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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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시간
욥 7:1~8
(2022/12/11, 대림절 제3주)

[인생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이, 고된 종살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그의 평생이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않으냐? 저물기를 몹시 기다리는 종과도 같고, 수고한 삯을 애타게 바라는 품꾼과도 같다. 내가 바로 그렇게 여러 달을 허탈 속에 보냈다. 괴로운 밤은 꼬리를 물고 이어 갔다.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구나.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구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 버리는구나. 내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가니, 아무런 소망도 없이 종말을 맞는구나. 내 생명이 한낱 바람임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내가 다시는 좋은 세월을 못 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눈을 뜨고 나를 찾으려고 하셔도 나는 이미 없어졌을 것입니다.]

• 세이렌의 노래에 취한 사람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하마다 게이코는 동화 <평화란 어떤 걸까>에서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네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평화는 서로의 있음을 기뻐하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승자독식사회는 그런 평화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초 동구권이 해체되고 냉전 시대가 끝나면서 정말 평화로운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는 부푼 기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현실에 대한 나이브한 낙관론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이념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풍요에 대한 환상이었고, 그것은 이념보다 더 사람들을 갈라놓았습니다. ‘우리’라는 정체성의 자리를 ‘나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차지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이 요정인 세이렌 이야기입니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 노랫소리에 이끌린 이들은 거친 협곡에 부딪쳐 다 죽고 맙니다. 오뒷세우스는 부하들에게 귀를 밀랍으로 막고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젓도록 당부하고, 자기는 돛대에 몸을 묶은 채 세이렌의 노래를 듣습니다. 모험가다운 행동입니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유인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풍요로운 삶이라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애 혹은 욕망이 마음을 지배할 때 가슴이 납작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풍부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더 크고 높고 깊은 세계와 접속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이야기를 들으면 흔히 ‘가슴이 웅장해진다’고 말합니다. 큰 이야기가 사라지고 작은 이야기만 있는 세상에서 사노라면 우리 또한 정신적으로 왜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소해진 정신의 특색은 공감 능력의 상실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손해를 감수할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s라는 게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공감 뉴런empathy neurons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타인의 고통이나 기분에 대해서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일러 사이코패스(psychopath)라고 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은 소시오패스(sociopath)라고 합니다. 이런 이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영성이 깊어진 이들의 특색은 타자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면서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 5:2)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철저한 공감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 죄와 고통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는 ‘남’이 없습니다. 남이 없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그 마음으로 가는 여정에서 오늘 우리가 만날 사람은 욥입니다.

• 무의미의 심연
신중하고 신실하게 살던 욥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난폭한 이들의 습격으로 재산을 잃었고 하늘에서 불까지 내려 남은 모든 것을 다 태웠습니다. 그렇게도 금지옥엽으로 키웠던 아들들과 딸들은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건물이 무너지면서 다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욥은 그 운명의 타격 앞에서 깊이 상심했지만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몸에 악성 피부 질환이 생겨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성한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욥기의 서막은 욥을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1)으로 소개합니다. 욥의 추락 혹은 전락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우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가?’ ‘하나님은 무능한 분이 아닐까?’ ‘하나님은 세상사에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 욥은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잠깐 동안의 고통 혹은 끝이 예측되는 고통은 견딜 수 있습니다. 처음에 욥은 의연하게 고통을 견뎠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면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욥은 자기 자신이 낯설어졌다고 말합니다. 뒤이어 삶에 대한 염증이 찾아옵니다.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욥 9:21) 든든하다고 여겼던 삶의 토대가 다 무너진 후에 찾아온 공허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냉랭해졌고 가까운 친구들도 원수를 대하듯 합니다. 하나님조차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는 항의하듯 외칩니다. “주님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이제 와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욥 10:8) 잊혀졌다는 쓸쓸함, 버림받았다는 상실감,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두려움이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아직 신앙을 거둬들이지 않았습니다. 침묵하고 계시지만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아 주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면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의 무죄를 인정하고 그가 겪고 있는 고난을 그치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욥은 영혼에 드리운 어둠을 밝혀줄 하늘의 빛을 기다립니다.

“하늘에 내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내 변호인이 계신다!”(욥 16:19)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욥 19:25)

그러나 하나님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동서남북 어디에도 그분은 계시지 않은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의 부재 체험이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 도무지 알 수 없는 인생
사방이 막힌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너무 잔인하게 대하시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자기를 너무 세게 치시는 것 같아 억울합니다(욥 30:24). 그는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인생이 떳떳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만 욥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다. 궁핍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 내가 바라던 행복은 오지 않고 화가 들이닥쳤구나. 빛을 바랐더니 어둠이 밀어닥쳤다.”(욥 30:25-26)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욥이 선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시련을 겪고 악인이 형통하기도 하는 것이 부조리한 세상사입니다. 나의 선한 의도를 사람들이 곡해하는 경우도 많고, 나의 선한 의지가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원망한다고 하여 삶이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원망은 자기 속에 검은 그림자를 만드는 일인 동시에 다른 이들을 밀어내는 일입니다. 입을 열 때마다 불평을 터뜨리고 원망의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냉소와 조롱은 약자의 버릇입니다. 이것은 관계의 단절을 심화합니다. 삶이 어렵더라도 작은 빛을 만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다가 조지 오웰의 <목사의 딸>이라는 소설의 한 장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목사의 딸인 도러시는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하녀처럼 살았습니다. 교구에 속한 병자들과 노인들을 간호하는 일도 도맡았습니다.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많았습니다. 작가는 어느 날 도러시가 자전거를 타고 교구의 불쌍한 노파를 간호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붉은 암소들이 무릎까지 길게 자란 빛나는 풀의 바다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바닐라와 신선한 건초를 증류한 것 같은 암소들의 냄새가 도러시의 콧구멍으로 흘러들었다. …… 산울타리 너머에서 자라는 야생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물론 꽃은 없었지만, 들장미인지 확인해보려고 그녀는 살문을 타고 넘어갔다. 산울타리 아래 쪽 키 큰 잡초 사이에서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땅 가까이는 열기가 후끈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곤충들이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뒤얽힌 초목에서 나는 뜨거운 여름 향기가 흘러와 그녀를 감쌌다.”(리베카 솔닛, <오웰의 장미>, 최애리 옮김, 반비, p58-59에서 재인용)

야생 장미 한 송이를 확인하려고 살문을 타고 넘고, 향기를 맡으려 무릎을 꿇고, 곤충들의 윙윙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일상의 곤고함 혹은 무게가 잠시나마 사라졌을 겁니다. 이 대목을 인용한 후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창조한 삶들은 비참함 가운데서도 에피파니로 점철된다.” 여기서 ‘그’는 물론 조지 오웰이고 에피파니는 갑작스러운 자각이나 신의 현현을 뜻합니다. 1930년대 유럽의 비참한 사람들의 삶을 소설과 에세이 속에서 많이 다루었지만 조지 오웰은 그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곤 했던 것입니다. 삶의 지혜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질문 바꾸기
우리도 욥의 시간을 견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둠 속에 웅크린 채 투덜거리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자기에게서 벗어나 세상에 넘치는 기적들에 눈길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여백이 마련되면 삶의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신 ‘이 일을 겪은 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대신 ‘이런 세상을 치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질문을 전환할 때 놀라운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눅 10:29, 36) 하고 물으셨습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요 9:2-3)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동일한 사건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전혀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이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갑니다.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떤 분이 한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나는 문제들을 물에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의 문제들은 수영을 잘했다 I tried to drown my problems, but my problems learned to swim”. 가라앉힐 수 없더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들과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문제들이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무의미의 심연 속에 빠져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심연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분의 빛을 나르는 등잔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희망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을 붙잡아 일으키려고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발이 허공에 뜬 듯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주려고 주님은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설 땅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참된 기다림입니다. 오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머무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2월 11일 11시 57분 5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