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8. 예수 믿음이 후회 될 때
설교자 김형욱
본문 마 11:1-6
설교일시 2023-04-30
오디오파일 s20230430-2_48.mp3 [1129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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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음이 후회 될 때

마태복음서 11:1-6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지시하기를 마치고, 거기에서 떠나셔서, 유대 사람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셨다.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3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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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길 빕니다. 먼저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지난 3년간 청파교회 교우 여러분의 많은 기도와 가르침, 그리고 격려가 없었다면 제가 목사로서 이 자리에 서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한 명의 어엿한 목회자로 첫걸음을 떼는 지금, 저의 첫 번째 공동체가 청파교회라는 사실, 제가 섬기는 첫 번째 교우들이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청파교회 교우 여러분이란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우며 하나님께 더할 수 없이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맡은바 성심을 다해 하나님 뜻 함께 공부하고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 주님 먼저 걸어가신 믿음의 길 함께 걷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믿음의 길을 걷는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겠지요. 그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닮아가는 사람, 이 얼마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찬 말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하나님 찬양하며 오롯이 주님 가신 길 걸어가면 참 좋겠는데, 어째서인지 믿음의 길 어딘가에서 우리는 멈칫할 때가 있습니다. 주저앉을 때, 방황할 때, 나의 믿음을 빼앗긴 것 같을 때, 그래서 주님 믿은 것이 후회스러울 때도 우리 삶에 종종 아니 어쩌면 자주 찾아올 때가 많음을 우리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말씀을 통해 믿음의 길에서 멈칫했던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중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삶을 따라 그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날카로운 검과 같았으며, 그 칼끝은 성전에서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리는 자들을 향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불의에 항거했고 권력자의 으름장에 아랑곳하지 않는 과격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의 삶은 참으로 소박했습니다. 그는 고귀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그 모든 후광을 버리고 광야 사막 어딘가에 은둔하며 살았습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소탈하기 그지없어서 성경은 그가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고 낙타 털 옷을 입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성결해지길 요청했습니다. 그는 바로 세례 베푸는 자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탄생부터 신비로운 축복을 받은 자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 장면이 진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천사 가브리엘이 요한이 출생할 것을 예언하였다는 점, 그리고 이 예언을 들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어머니 엘리사벳이 요한을 출생하고 모두의 염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말을 따라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었을 때 비로소 사가랴의 말문이 즉시로 열렸다는 점 등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1장 66절은 요한 탄생에 대한 요약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이 아기가 대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그 아기와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눅 1:66)

요한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사명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소명은 다름 아닌, '주님의 길을 예비함'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요한이 나이 많은 부모를 떠나 광야로 들어간 이유도, 그가 옛 선지자들의 삶을 따라 정직하고 검소하게 살아간 것도, 당대의 부패한 권력을 향해 거침없이 다그친 이유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성결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푼 모든 이유가 자기 다음에 올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소명에 어떠한 의심도 없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요단강 강가로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 단번에 직감했습니다. 저분이구나.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바로 저분이구나. 저분의 신발 끈을 매고풀 수도 없을 만큼 나는 하찮은 존재라고 요한은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

요한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믿음이라는 굳건한 터 위에서 용감하게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요한은 권력자의 부도덕을 강하게 비판했고 그 결과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요한 당시 갈릴리외 베뢰아를 통치하고 있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취한 일을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고한 믿음과 확신을 가진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 던진 질문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여러분, 세례 요한의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질문이 세례 요한 다운 질문입니까? 이 질문엔 멈칫거림이 있습니다. 마치 평생을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주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펴보았듯, 세례 요한은 메시아로 오실 분이 그 어떤 다른 분 아니라 자신이 요단강에서 세례 베푼 예수임을 누구보다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요한이 기다린 분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분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요한은 예수께 세례 베푼 후에 하늘로부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마 3:17). 그런데 이토록 강고한 믿음을 지켜왔던 광야의 예언자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요?

감옥에 갇혀서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일까요?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요한은 당대의 권력자들을 향해 서슬 퍼런 비판을 숨기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자기 삶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높은 권력에 앉은 헤롯을 비난했고 그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히는 순간 알았겠지요. 살아서 이 감옥을 나갈 순 없을 것이란 사실을요. 따라서 권력자의 박해가 요한의 믿음을 나약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의 질문 속엔 어떤 두려움이, 믿음의 세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느냐는 그의 물음에 요한이란 사람의 신앙 터전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요한을 멈칫하게 했을까요? 요한이 두려웠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제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내가 내 평생을 당신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는데, 그래서 이제 곧 죽게 되었는데, 만약 내가 기다렸던 분이 당신이 아니라면, 실은 내가 엉뚱한 사람을 위해 일생을 사역했다면, 그리스도가 아닌 이를 위해 내 젊음을 다 바쳤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단 말인가? 한마디로 요한은 '무의미의 수렁'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님이 아니라면 자신의 헌신, 노력, 믿음과 투쟁 모두 의미에서 무의미로 바뀌게 되는 것, 요한의 두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의미의 수렁

무의미의 수렁에 빠진 요한을 두고 '믿음 없음'으로 혹은 그가 '시험들었다'라는 말로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이는 누구보다 올곧고 바르게 믿음의 길을 걸어간 이들에게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문제이며, 실은 오늘 이 자리에도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며 괴로운 분들이 절대로 적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주님 가신 길 따라가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우리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는 경험이 우리에게 없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뿌리부터 흔들릴 때, 믿음의 길 어딘가에서 멈칫하며 서성일 수밖에 없을 때, 의미로 가득했던 나의 신앙이 무의미의 수렁에 빠질 때, 우리는 요한처럼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제가 믿어야 할 분이 당신입니까? 내가 다른 이를 믿었어야 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무의미의 수렁에 빠지게 될까요? 우리는 언제 예수 믿음이 후회될까요? 인생의 큰 실패를 경험하거나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사고에 휘말릴 때 우리의 믿음은 큰 위기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온 이들에게 찾아온 사건과 사고라는 불청객은 우리 믿음을 걸어 넘어뜨리곤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내가 다른 분을 기다렸어야 했습니까? 라고 묻게 됩니다.

또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내가 씨름하고 있는 신앙적 고민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지 못하고 배제될 때 우리의 믿음은 멈칫합니다. 지난해 저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읽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인터뷰집입니다. 저자이자 인터뷰어인 이혜성 씨는 교회를 떠나기로 했거나 이미 떠난 8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이의 면면은 흥미로웠습니다. 어떤 이는 선교사 어떤 이는 목사 어떤 이는 목사의 아내 어떤 이는 모태신앙으로 단 한 주도 주일 예배를 빠져 본 적 없는 이였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한 이유도 제각각이었는데 교회의 분란, 목회자의 부정, 내적 갈등, 목회자의 경제적 문제 등 여러 가지였는데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실존적이고 처절한 고민이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고 격려를 나누지 못하고 되려 신앙 없고 시험들었다는 단순한 명명으로 처리되었을 때였습니다.

한 가지 경우만 더 예를 들고자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무의미의 수렁에 빠뜨리는, 어쩌면 지금 우리의 믿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그리고 하찮게 여기는 자들의 승리를 볼 때입니다. 혐오와 배제를 마치 성령의 검인 양 하나님의 이름으로 휘두르며 타자들 마음을 찌르는 자들을 볼 때 우리는 괴롭습니다. 시인 아삽이 타는 듯한 심정으로 노래했던 시편 구절이 떠오릅니다. 시인이 비참한 심정으로 노래 합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시 73:4-6)

예수 정신이라곤 단 한 치도 없는 자들이 복음을 들먹이며 하나님을 말할 때 우리는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매스컴에 연일 보도되는 저 기괴한 교회가 내가 사랑하는 교회와 같은 곳인가 다른 곳인가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상식 밖의 행동을 일삼는 일부 목회자들이 참칭하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 같은 분인가 다른 분인가 우리는 고민스럽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께 묻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것 잘한 일입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믿어야 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 믿지 말고 차라리 돈이나 권력을 믿는 일이 더 솔직하고 양심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주님의 대답 - 복음이 일하심을 바라보라

이제 요한의 질문 그리고 우리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던진 물음을 그의 제자들이 주님께 전했습니다. 주님은 무의미의 수렁에서 괴로워하는 요한에게 믿음 없다 질타하시거나 걱정하지 말고 너는 믿기만 하라는 명쾌한 대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묻는 세례 요한의 질문을 듣고 그저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을 바라보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 곳을 가만히 바라보라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심겨진 곳, 그곳에서는 눈 먼 사람이 보고,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걸으며, 불치병으로 고통받던 환자들이 나음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주님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곳에 이토록 가슴 벅찬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굳건했던 믿음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세례 요한에게 어째서 복음이 선포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는 사람들을 보게 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이 속 깊은 우리 주님의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네가 평생을 바쳐 나의 길을 예비하고 복음을 전하고 이스라엘의 낮은 자들을 섬긴 일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말씀을 가르치며, 성심을 다해 주님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복음을 듣고 다시 살아나는 생명이 있을 수 없었으리란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 요한에게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시며, 네가 살아온 길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위로는 지금 여기에 믿음의 길 위에 멈칫하고 있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울려 퍼집니다. 오랜 시간 주님을 열심히 섬겨왔지만, 예상치 못한 고통으로, 관계의 아픔으로, 신앙적 고민의 외로움으로, 때론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의 승리를 바라보며 무의미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우리에게, 예수 믿은 것을 후회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헛되게 산 것 아니다. 네가 하루하루 착하고 성실하게 신앙을 지키며 흘렸던 눈물이 씨앗이 되어 복음의 싹을 틔웠고,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네가 없었다면 복음의 역사도 없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음이 후회스러워 눈물이 날 때 주변을 바라보십시오. 내 믿음에 무슨 의미가 있나 괴로울 때 우리 주님 행하신 일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언젠가 전했던 위로와 격려, 중보기도, 작은 정성이 복음의 씨앗이 되어 누군가를 살렸음을 기억하십시오. 이 일 별것 아닌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 말씀하신 눈먼 사람이 보게 되는 일이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는 일이며, 죽음의 고통에 있던 사람이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주님 말씀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갈 때 우리는 신앙의 무의미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하나님 얼굴 바라보며 의미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2023년 04월 30일 12시 14분 3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