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4. 허망한 장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 14:27-31
설교일시 2023-04-02
오디오파일 s20230402-2.mp3 [47286 KBytes]
목록

허망한 장담
막 14:27-31
(2023/04/02, 종려주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모두가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힘주어서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모두도 그렇게 말하였다.]

∎ 외로운 길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미세먼지가 걷히고 모처럼 화창한 날입니다. 난분분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답습니다. 꽃들이 앞 다퉈 피었다가 지는 계절이지만 우리는 주님이 겪으신 수난의 골짜기 깊은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로마군의 행진을 배경으로 볼 때 그 의미가 오롯이 드러납니다.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서 소요가 일어날 것을 염려한 로마 기병과 보병들이 로마 군단의 깃발을 앞세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했습니다. 허튼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시위였습니다. 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로마군의 위풍당당한 행진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하고 외쳤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맞이한 것처럼 보도하는데 비해 누가복음은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찬양했다고 말합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눅 19:38) 누가가 전하는 이 노래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의 노랫소리와 상응합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 로마의 평화와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도드라지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뭔가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며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은 그 들뜸과 설렘의 이면에 있는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고난주간을 맞을 때마다 예수님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했던 해의 고난주간 채플 시간이 떠오릅니다. 별 기대도 없이 채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대표 기도가 끝난 후 한 선배가 부른 응답송이 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아주 청아한 테너 목소리였습니다. “감람산 깊은 밤 중에 별빛은 희미하여라 주 예수 고민하시며 외로이 기도하시네”. 저는 그 소리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님의 심정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2절을 들으며 제 속에서 뭔가 왈칵하고 올라왔습니다. “주 홀로 깊은 밤중에 고민에 싸여 계시나 그 사랑 받던 제자도 스승의 괴롬 모르네”. 그 때 처음으로 주님을 외롭게 하지 말자는 생각이 제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이 찬송가가 개정 과정에서 지금 찬송가에서 누락된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주님은 외로우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이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했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이적과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입니다. 들뜬 그들의 마음에 고난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욕망을 주님께 투사할 뿐,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간저송澗底松’입니다. 계곡의 시내 낮은 곳에서 어둠과 그늘 그리고 추위를 홀로 견디는 소나무 말입니다.

∎ 두려움의 폭풍
주님은 제자들이 겪을 혼란을 예감하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막 14:27). ‘걸려 넘어짐’과 ‘흩어짐’은 공생애를 통해 하신 예수님의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자기들에 대한 불신으로 여겼던 것일까요? 앞장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항의를 하듯 말합니다. “모두가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막 14:29). 주님께서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더욱 힘주어 말합니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막 14:31). 다른 제자들도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이런 장담이 거짓이나 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물리적인 폭력과 죽음의 위협이 관념이 아니라 실체로 다가올 때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대의를 위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이성이나 의지를 압도합니다. 오래 전부터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마음의 방비를 단단히 하더라도 두려움이 쉽게 스러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것은 불시에 습격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큰소리치는 이들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죽을 각오로’, ‘내 한 몸 다 부서져도’, ‘절대로’라는 말은 비장하지만 실체 없는 말일 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야바의 집에서 하녀가 그를 노려보며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 하고 말하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눅 22:56-57). 다른 사람이 그를 보며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하자 베드로는 더욱 단호하게 부인합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란 말이오”(눅 22:58). 또 다른 사람이 강경하게 “틀림없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소.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니까요” 하고 말하자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듯 말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눅 22:59-60). 베드로가 아직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곧 닭이 울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베드로는 비로소 꿈에서 깬 것처럼 자기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바깥으로 나가서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꼭꼭 숨겨둔 채 살았던 자기의 연약함과 비루함이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자기 모멸감에 베드로는 무너졌습니다.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죽음과도 방불한 체험이었습니다. 자기가 쌓아왔던 그럴싸한 자기 이미지는 무너지고, 마치 깨진 거울에 비쳐진 이미지처럼 그는 뒤틀리고 이지러지고 조각난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망한 장담의 쓸쓸한 결말입니다.

∎ 불확실함을 견디는 힘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의 딸 사샤 세이건은 아주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피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진 소녀는 저녁 잠자리에 들 때마다 엄마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잊지 마! 죽지 마!” 엄마는 그때마다 “약속할게!”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아빠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사샤 세이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홍한별 옮김, 문학동네, p.93). 사샤는 아빠의 이런 대답이 자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합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고 그 시간은 불확실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 시간이 먼 미래에 올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병이 깊어져서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불시에 찾아오는 죽음도 있습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가 세웠던 모든 계획은 다 허사가 되고 맙니다. 삶은 선물이고 죽음 또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그분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야고보도 그런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약 4:13-15)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확실성을 인생무상의 증거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삶이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허세를 부릴 수 없습니다. 오만에 빠질 수도 없습니다. 이럭저럭 견디는 게 삶이 아닙니다. 삶이 아무리 부조리해 보여도 항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누가 보더라도 꿈의 종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입구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 도구이지만 하나님은 그 도구를 생명의 나무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사느라 자주 넘어집니다. 그래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후 바깥 어두운 데서 통곡했습니다. 그 뉘우침과 회오를 통해 그는 조금씩 맑아졌습니다.

∎ 가없는 은혜
저는 주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깊이 감동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눅 22:31-32). 주님은 시몬 곧 베드로가 겪게 될 혼돈과 공포를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바야흐로 사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마치 사탄의 손아귀에 들어가 밀이 까불리듯 체질을 당할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넘어짐을 내다보면서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련 속에서도 제자들이 꺾이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요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유행이라지요? 개그맨인 박명수 씨는 이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을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 정신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꺾여도 그냥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택하신 이들을 쉽게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용도 폐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끝없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감싸 안으십니다. 그 사랑 안에 그들의 존재가 녹아들 순간을 기다리십니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이 가없는 신뢰가 그들을 부활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작고한 철학자 김진영 선생의 글을 읽노라면 마음이 아릿해집니다. 그는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택하고 살아온 삶에 대한 고집스러운 충성심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실함’(Treue)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그 성실함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늘 회의하고 자신이 없었으므로 매번 새롭게 각오를 다져야 했다”(김진영, <조용한 날들의 기록>, 한겨레출판, p.257). 저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매 순간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서 주님이 앞서 걸으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를 믿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 나를 맡길 뿐입니다. 그 손길을 신뢰할 때 우리 속에 다시 시작할 힘이 생깁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라고 말했습니다. 날마다 죽기에 날마다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물질 그리고 자기 몸을 바쳐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외로운 이의 설 땅이 되어주고, 불의에 항거하고, 가장 연약한 사람의 힘이 되어줍니다. 심연의 가장자리에 몰려도 명랑함을 잃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조롱거리로 변한 세상이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주님의 길 위에 설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4월 02일 12시 01분 2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