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0. 사람다운 삶을 위하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전 5:12~15
설교일시 2023-07-23
오디오파일 s20230723-2.mp3 [2443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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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삶을 위하여
살전 5:12-15
(2023/07/23, 성령강림 후 제8주)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을 알아보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해서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 슬픈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아직도 장마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인재로 많은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막을 수도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탓입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실종자 수색 작업에 나섰던 해병대원이 급류에 휩쓸려 죽었습니다. 구명조끼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무사려, 무책임입니다.

한 주간에 기가 막힌 소식이 또 들려왔습니다. 초등학생 6학년 남학생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여교사 이야기는 이 난폭하고 무정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디모데후서는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이라면서 그 징조들을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 뽐냄, 교만, 하나님 모독,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감사할 줄 모름, 불경, 무정, 원한을 풀지 않음, 비방, 절제 없음, 난폭함, 선을 싫어함, 배신, 무모, 자만, 쾌락 사랑, 경건의 능력 부인’(딤후 3:2-5)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제게 유독 크게 다가오는 것은 난폭함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어떤 힘이 사람들을 휘몰아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학부모로부터 지속적인 민원에 시달리던 교사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아직 진상이 다 드러나지 않아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가 느꼈을 모멸감이 얼마나 컸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따뜻한 품에 안아주시기를 빕니다.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교직은 더 이상 천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젊은 교사들이 학부모들의 무례하고 난폭한 성화를 다 감당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교육 현장에 대한 심각한 재고가 필요한 때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교육에 대해 들려준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히브리의 옛말에 따르면 세계는 공부, 예배, 자애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고 한다. 공부는 하늘의 지혜를 더불어 나누는 것이요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며, 자애는 이웃의 아픔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201)

이 기둥들이 무너졌습니다. 하늘의 지혜를 익히는 공부는 변별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변질되었고, 내 인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지각은 흐려졌고, 이웃의 아픔은 외면하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힘이라는 우상이 우리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경쟁의 벌판을 질주하느라 숨이 가쁘다고 말하면서도 행여 남에게 뒤쳐질세라 스스로 멈추지 못합니다. 빠름 속에서는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습니다. 이웃들의 신음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이 은총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 사랑으로 존경하라
오늘 본문을 저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회피해 왔습니다. 누군가 목사인 나한테 잘 하라는 말로 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을 알아보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해서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십시오”(살전 5:12b-13a).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큰 슬픔 가운데 하나로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사실을 듭니다. 시대의 사표(師表)가 되는 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민주화가 진행되던 그 엄혹했던 시기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등불로 우뚝 선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예언자처럼 불의를 꾸짖었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간 정신의 크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한 시대의 스승들이었습니다.

동서양 철학을 회통하면서 기독교의 진수를 일깨워주던 김흥호 목사님은 스승을 가리켜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자꾸 자라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은 삶에 대한 뚜렷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요, 자기를 이긴 사람이요, 스스로 산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산이 있으면 사람은 혼자 올라갑니다. 그 존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저절로 남을 오르게 합니다.”(김흥호 설교집, <하루를 사는 사람> 중에서 ‘스승’, ‘스승과의 만남’ 참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저절로 남을 자라게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존경할 마음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마음의 성소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도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이 거짓예언자들처럼 사람들을 오도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 스승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는 시대이기에 그러한 분별력은 더욱 필요합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딤후 4:3-4)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길로 초대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모임에서 목회자들이 부르는 찬양을 들었습니다. 손경민 님이 만든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라는 곡이었습니다. 목사들다운 선곡이라고 생각하며 듣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해졌습니다.

“나의 평생에 가장 복된 일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
나의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내가 예수님을 주로 섬긴 것이다.
이 세상 살 동안 내가 걷는 길이 때론 험하여서 넘어질 때도
주의 강한 손이 나를 붙드시니 나는 예수님만 주로 섬기며 살리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
내가 걸어온 모든 시간 다 주의 은혜니
내가 걸어갈 모든 날도 주만 섬기며 살리
오직 예수 이름 부르며 살아가리라”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가사처럼 들렸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후회가 없을 수는 있지만 씁쓸함이나 비애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서로 격려하며 함께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는 말도 같은 뜻일 겁니다.

∎ 곁으로
사도 바울은 부름 받은 성도들에게 몇 가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 5:14). 무질서하게(ataktos) 사는 사람은 게으르고 무절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는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린다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서 공동체에 부담을 안겨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이들을 훈계하라고 말합니다. 훈계란 부드러운 꾸지람입니다. 훈계하는 이들은 자기도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사람임을 자각하면서 스스로를 잘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바울 사도의 이런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갈 6:1)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는 것 또한 성도들의 마땅한 책무입니다. 마음이 약하다는 것은 심지가 굳지 못해서 유혹이나 위협 앞에서 쉽게 흔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을 ‘입장이 바로 선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에게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기둥 하나가 들어섭니다. 기둥이 바로 서 있으면 어지간한 무게가 얹혀도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기둥이 바로 서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정신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지만, 그 정신이 꺾인다면, 누가 그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잠 18:14). 마음이 약한 이들은 마치 뿌리가 드러난 식물처럼 위태롭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북돋워주는 일입니다. 우리말로 ‘북’은 식물을 싸고 있는 흙을 이르는 말입니다. 흙을 돋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을 돕는다는 말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는 말입니다. 어린 나무나 작물에 지지대를 덧대주는 농부들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지지대가 있어야 비바람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외로운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이들 말입니다. 외로운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 곁으로 다가가 힘이 되어주는 이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따뜻해집니다. 이 모든 일에 필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조급함은 모든 것을 망치는 적입니다.

∎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라
사도 바울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악(kakos)은 구체적인 행동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생각, 행동의 기초에 놓여있는 태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악은 결국 타자를 해치려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악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사는 동안 그의 내면에 형성된 태도가 굳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거칠게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그런 이들과 함께 살다 보면 우리 마음 또한 거칠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1963년 8월 28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 발코니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는 비폭력 저항을 통해 궁극적인 승리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정당한 위치를 찾을 때까지는 나쁜 행동을 해서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를 향한 갈증을 비탄과 증오로 가득 찬 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달래려 하지 맙시다(Let us not seek to satisfy our thirst for freedom by drinking from the cup of bitterness and hatred). 긍지와 원칙이 있는 높은 곳을 향한 투쟁을 영원히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의적인 항거가 폭력으로 변질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또 다시, 우리의 힘이 영혼의 힘과 맞닿을 수 있는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샘에 잇대어져 있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힘은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할 대상을 우리와 코드가 맞는 사람이나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국한해서는 안 됩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여 늘 감사의 인사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불쾌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과도한 요구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감리교인의 삶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선함이라는 선물이 거절당하거나, 조롱당하거나,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나의 열망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의해 제한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나의 열망은 예수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Rueben P. Job, Three Simple Rules, A Wesleyan Way of Living, Abingdon, p.40)

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이 크게 들려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가르고 욕망을 따르도록 길들이려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흐름을 거스르며 삽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만들고, 지친 이들 속에 힘을 불어넣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겨릿소로 척박한 땅을 개간했던 농부들처럼 우리도 무정하고 사나운 세상을 사랑과 온유함으로 갈아엎고, 생명과 평화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하고 쾌적한 곳으로 바뀔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7월 23일 12시 00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