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9. 누구를 바라보고 있나?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 12:1-3
설교일시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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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바라보고 있나?
히 12:1-3
(2023/07/16, 성령강림 후 제7주)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 전통의 빛 아래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농경지와 집이 침수되고, 많은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슬픔에 잠긴 이들과 곤경에 처한 이들이 실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국민들의 삶은 위태로운 데 정치인들은 정쟁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비난과 조롱의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초록이 물결처럼 번져가는 무성한 숲을 바라보면 마음이 시원해지다가도 사람살이의 현장을 바라보면 답답해집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턱 내려놓고 편안하게 만나고 이야기하고 삶을 경축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지만, 그런 세상의 꿈은 점점 퇴색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마음이 절로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현실이 어렵다 하여 꿈조차 포기한다면 우리 삶은 정말 빈곤해질 겁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모두가 알고 있는 구절입니다. ‘바라는 것들’은 희망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희망希望에서 ‘희’ 자는 바란다는 뜻도 있지만 ‘드물다, 성기다’는 뜻도 있습니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라봄은 그냥 봄과 구별됩니다. 보는 것은 감각기관인 눈에 들어오는 인상을 그저 지각하는 것이지만, 바라봄은 마음의 지향과 관련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삶으로 입증하여 보여주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지중유산地中有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땅이 큰 산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큰 산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다보면 시야는 협소해지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까맣게 잊게 마련입니다. 자기 상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고후 3:3)라고 말합니다. 아주 아름다운 은유입니다. 이 말 속에 우리의 소명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와 만나는 이들이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순례자들이었습니다. ‘본향 찾는 나그네’, 바로 이것이 신앙인들의 별명입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초기에 주님을 따르던 이들의 별명은 ‘그 도(hodos)를 믿는 사람’ 혹은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길로 믿는다는 말은 그 길을 따라 걷는다는 말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처럼 살 생각이 없으면서 예수를 길로 고백하는 것은 자기 기만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함께 걷자고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 벗어라, 달려가라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과제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먼 길을 걷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은 짐을 줄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할 것 같아 가지고 갔던 것들이 오히려 자기 발목을 잡을 때가 많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은 짐도 줄일 겸, 누군가 필요한 분이 있으면 잘 사용했으면 해서 여벌옷 한 벌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알베르게 침대 밑에 두고 새벽에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길에서 만나 길벗이 되었고 지난 밤 같은 방에 묵었던 프랑스 할머니가 아주 반가운 모습으로 다가오더니 ‘너 이거 두고 갔더라. 그래서 내가 챙겨왔어’라고 말하면서 비닐봉지를 내밀더랍니다.

우리가 순례자로 살지 못하는 것은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무거운 짐이 정말 많습니다. 후회, 누군가에 대해 품고 있는 서운한 감정, 아픈 기억, 미움, 원망, 분노, 적대감, 냉소, 두려움, 걱정과 근심이 우리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것을 벗어버리지 못해 우리는 휘뚝거리며 삽니다. 사도는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자고 말합니다. ‘얽매는 죄’는 교묘하게 우리를 둘러싸서 부자유하게 하는 죄를 뜻합니다. 죄罪는 그물 망网 부와 아닐 비非 자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물에 걸린 상태가 죄가 아닐까요? 벗어버려야 할 것을 벗어버리지 못해 우리 삶이 지리멸렬입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라고도 알려진 곡 ‘넬라 환타지아’가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영화 <미션>에는 노예상인이었던 용병 로드리고 멘도자라는 이가 나옵니다. 그는 우발적으로 동생을 죽이고 복역하다가 가브리엘 신부의 설득으로 과라니족 원주민들을 섬기기로 작정합니다. 그는 노예상인 시절에 사용하던 모든 죄악의 도구들을 커다란 그물망에 담아 끌고 갑니다. 물을 건너고 산을 넘고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그것을 버리라고 촉구하지만 멘도자는 묵묵히 죽을 고생을 하며 그것을 끌고 갑니다. 마침내 마을에 이르렀을 때 원주민들은 자기들의 형제자매를 잡아가던 노예상인을 보고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오랫동안 신뢰 관계를 쌓아왔던 가브리엘 신부가 그들 앞을 막아서며 자초지종을 설명해줍니다. 멘도자가 참회하기 위해 거기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멘도자가 끌고 온 그물망태기의 줄을 끊어버립니다. 그것이 폭포 아래로 떨어져나가자 멘도자는 비로소 속에서 우러나오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가해자의 진정한 참회와 피해자들의 받아들임이 만났을 때 그들은 비로소 해방을 경험합니다. 이 대목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죄를 참회할 때 주님은 우리 생각과 감정과 말과 행동을 사로잡고 있는 죄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십니다.

벗어버려야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율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상냥한 친절함으로 대하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야 합니다. 조금씩만 마음을 넓히면 됩니다.

∎ 바라보라
그러기 위해서는 늘 우리 시선을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나왔습니다. 창시자를 뜻하는 헬라어 아르헤고스archēgos는 ‘출발점, 기원, 모든 존재물의 근거’를 뜻하는 아르케archē라는 단어와 뿌리가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세상의 아르케가 뭔지를 탐구했습니다. 그들은 물, 불, 공기, 수, 원자 등이 세상 모든 것의 뿌리라고 이해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원천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는 예수님을 믿음의 완성자라고 말합니다. 완성자를 뜻하는 헬라어 텔라이오테스teleiōtēs는 ‘목표, 전환점, 완전’을 뜻하는 telos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우리 믿음이 당도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입술은 예수를 닮은 듯하지만 우리 삶은 예수와 무관한 것은 아닌지요?

창세기는 야곱이 형 에서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복을 가로채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한 이삭은 맏아들 에서에게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이릅니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내 그를 축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자간의 그런 이야기를 엿들은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위해 일을 꾸밉니다. 새끼 염소를 잡아 별미를 만드는 한편, 야곱의 손과 목덜미에 염소 새끼 가죽을 둘러 에서인 척하게 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삭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야곱을 가까이 오게 한 후에 그를 만져 보고서 중얼거립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구나”(창 27:22). 이게 우리의 실상이 아닌가요?

교회를 다닌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 마음씀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주님을 닮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믿음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삶의 비결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이병기 시인의 ‘낙화’가 떠오릅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해 삶이 누추해집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 삶이 무거워집니다. 주님의 삶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는 구절로 요약됩니다. 주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행했고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홀가분하게 그분께로 돌아갔습니다. 그 돌아감의 때를 주님은 영광의 때라 하셨습니다. 온 힘을 다해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셨기에 주님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하나님은 그를 당신 보좌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 생각하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히 12:3a) 여기서 ‘반항’이라고 번역된 안틸로기아(antilogia)는 성경에서는 적개심을 나타내는 단어로 주로 사용되지만, 그 본뜻은 인간의 온갖 말들이 뒤섞이는 현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이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술꾼이요 먹보라는 비난까지 들으셨습니다. 정결예식을 하려고 성전에 온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채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한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눅 2:34).

주님도 사람들이 자기에게 드러내는 적개심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내상은 입으셨을 겁니다. 그래도 주님은 지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의 반항을 참아냈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참다’는 단어 휘포메노 (hypomenō)는 ‘아래 혹은 낮은’이라는 뜻의 hypo와 ‘남다, 머물다’라는 뜻의 menō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도종환 시인은 ‘뒷자리’라는 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맨 앞에 서진 못하였지만
맨 나중까지 남을 수는 있어요
(중략)
함께 가는 길 뒷자리에 소리 없이 섞여 있지만
옳다고 선택한 길이면 끝까지 가려 해요”

예수의 길을 따라 걸으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소박한 끈질김이 아닐까요?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힘든 일에서 잠시 눈을 돌려 주님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 6:9) 지금 누구를 바라보며 살고 계십니까?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야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가 더 발전하기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본향 찾는 나그네인 우리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도처에 퍼져나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7월 16일 11시 56분 5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