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8.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 8:4~9
설교일시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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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렘 8:4-9
(2023/07/09, 성령강림 후 제6주)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누구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누구나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가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떠나갔다.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주의 법규를 알지 못한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공포에 떨며 붙잡혀 갈 것이다. 그들이 주의 말을 거절하였으니, 이제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다고 하겠느냐?]

∎ 참담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강림절기 한복판에 우리는 소설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농가월령가는 “大雨도 時行하고 더위도 極甚하다. 草木이 茂盛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平地에 물이 괴니 악머구리 소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악머구리는 ‘참개구리’를 잘 우는 개구리란 뜻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뭔가 풍성한 느낌이 듭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우리의 내적인 존재가 더욱 아름답게 변형되기를 빕니다.

엊그제 발표된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라는 연구 결과를 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조사결과 종교가 있다고 답한 이는 36.6%에 그쳤다고 합니다. 종교가 없다고 답한 이들이 2017년에는 53.4%를 차지했는데, 올해는 63.4%로 늘었습니다. 신앙을 버린 까닭을 묻는 질문에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39.7%였습니다. 28.1%를 기록한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보다 큰 숫자입니다. 이제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넘어 무관심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입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이 코로나 이전보다 3배가량 늘었습니다. 무엇보다 개신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자기 종교를 제외하고 다른 종교의 호감도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불교에 대한 호감은 32.9%, 가톨릭에 대한 호감은 28.9%, 유교에 대한 호감이 11.3%, 개신교에 대한 호감은 6.8%에 불과했습니다(2023/07/07, 국민일보 36면 기사 참조).

뭔가 오해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은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개신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의 행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배타성, 편협함, 광신, 혐오, 이기심 등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우리가 지금 중병에 걸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마 5:13b)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이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요? 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인지요?

∎ 예레미야의 성전설교
예레미야를 가리켜 우리는 눈물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유다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나라가 망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한 낙관론에 사로잡혀 그가 하는 경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홀로 듣는 자, 홀로 보는 자의 외로움이 컸습니다.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 온다.”(렘 8:18-19a)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렘 9:1)

예레미야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을 찾는 이들 앞에 서서 피눈물을 쏟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진정한 예배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사는 것,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죄 없는 이들을 죽이지 않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사람들은 참 예언자의 외침은 물리치고 거짓 예언자들의 달콤한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거짓 신화에 몸을 맡깁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허위의식을 강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렘 7:4)

그런데도 백성들은 속이는 말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말합니다. ‘우리는 안전하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면서도 성전 예배만 드리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까지도 백성들을 속였습니다. 백성들이 병들어 있는데도 ‘괜찮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역겨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아주 통렬하게 외칩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렘 7:11). 말라기도 동일한 메시지를 내놓고 있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말 1:10)

차라리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다는 하나님의 탄식이 우렁우렁 우리 가슴에 다가옵니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오죽하면 이런 말씀을 다 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른지요?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잠 25:13)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이 믿는 이들의 마땅한 소명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돌아오지 않는 백성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당신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키려 하십니다. 그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세상에 팔렸던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의 주인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감이 곧 회개입니다. 노자도 도덕경 40장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고(反者道之動),
약한 것이 도의 쓰임이다(弱者道之用)”

강하기만 하면 부러집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고집을 꺾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른다고 탄식합니다. 거짓된 것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미혹된 이들은 자기가 미혹된 줄도 모릅니다. 흔히 후회를 부정적 감정이라 생각하지만 후회는 삶을 바로잡고 싶어 하는 건강하고 본질적인 충동입니다.

미국 작가인 다니엘 핑크(Daniel Pink)는 후회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기반성 후회는 삶을 위한 안정적인 인프라를 만들지 못한 것과 관련됩니다. 대담성 후회는 성장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자책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끔 모험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도덕성 후회는 양심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입니다.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누군가를 속였다든지 양심에 반하는 어떤 일을 할 때도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관계성 후회는 더 사랑하고 손 내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입니다(김지수 인터뷰집 <위대한 대화>, p.160). 후회가 후회로 그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자책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각자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그 길의 끝이 몰락임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길을 잃고도 잃은 줄도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윤동주는 ‘길’이라는 시에서 “잃어버렸습니다./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길에 나아갑니다”라고 말합니다. 끝없이 이어진 돌담을 끼고 가보지만 마음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뭘 잃어버린 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걷습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라는 구절과 만나 비로소 우리는 시인이 찾는 것이 ‘참된 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나’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나’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행하는 존재입니다. 시인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고 고백합니다.

∎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
믿음은 나를 찾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감입니다. 탕자가 제 정신이 들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끄럽지만 상한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 내놓고 고쳐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 이들은 자기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합니다. 우리 삶이 사랑의 빚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렘 9:23-24)

지혜가 어리석음으로 변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곡학아세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힘을 자랑하던 이가 어느 순간 무력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많은 재산이 우리의 품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계의 기초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임을 두렵게 자각하는 사람은 경거망동할 수 없습니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 시인인 루미는 “소용돌이치는 버릇이 물에 들었거든/바닥을 파서 바다까지 길을 내어라”라고 노래합니다(<루미 詩抄> 중 ‘나의 가장 고약한 버릇’,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선우, p.103).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었던 것처럼 나를 지켜준다 여기던 것들,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야 합니다. 미가가 말하듯이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때(미 6:8) 비로소 우리는 예배자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이 회복될 때 우리는 다시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를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을 성화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사뭇 싸늘하지만 이제 그 시선을 경탄의 시선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분투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7월 09일 13시 50분 0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