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ß27.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 53:1-6
설교일시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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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사 53:1-6
(2023/07/02, 오순절 후 제5주)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 시련의 시간을 지나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광야를 걷는 것처럼 힘겨운 나날이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한가로움과 분주함이 교차하는 인생입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는 이미 수술을 받았거나 수술을 앞두고 있는 분들, 그리고 오랜 질병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붙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떠오르는 시편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시 73:26). 이 한 구절을 음미하노라면 울울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합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교우들을 떠올리며 기도하다가 1515년에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에 그렸던 제단화가 떠올랐습니다. 이젠하임 제단화로 알려진 그림입니다. 지금 이 그림은 프랑스의 작은 도시 콜마르에 있는 운터린텐(Unterlinden)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9년 전에 저는 그 제단화를 보려고 일부러 그곳을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제단화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대개 균형과 조화 그리고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뤼네발트의 그림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충격적입니다.

주님의 몸은 고통으로 뒤틀려 있고, 표정 또한 일그러져 있습니다. 옆구리와 발에는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고, 상처투성이 피부는 부패의 징조인 녹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경직된 손과 발은 주님이 겪고 계신 고통의 깊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뤼네발트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은 당시 맥각병麥角病에 시달리던 환자들을 돌보아주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불(St. Anthony’s fire)’이라고도 알려진 이 병은 곡물에 발생한 균이 빵을 오염시켜서 생긴 병인데, 처음에는 피부 조직을 손상시키고 그것이 곪으면서 속으로 파고들어 신경과 혈관을 상하게 하고 고열과 경련 그리고 환각을 일으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맥각병으로 고생하던 환자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자기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계신 예수님을 보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죄가 없으시지만 세상의 아픔과 서러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야말로 그들에게 희망이 아니었을까요? 십자가 왼쪽에는 제자 요한이 거의 실신한 것처럼 보이는 성모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고, 슬픔에 압도된 막달라 마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립니다. 오른쪽에 서있는 세례자 요한은 집게손가락으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의 위에 적힌 라틴어 문장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입니다. 십자가를 안고 있는 어린양도 보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빕니다.

∎ 슬픔의 사람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로 알려진 4개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수사의문문인 이 구절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놀라움을 예기하고 있습니다. 화자인 ‘우리’는 누구입니까? 학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혹은 사제 계층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누가 되었든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낯선 이야기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입니다. ‘주님의 능력’이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주님의 팔’을 의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이라는 구절을 우리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팔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얼마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가 수첩에 적어놓았던 영어 기도문이 유족들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팔이 등장합니다. “치유의 과정 중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but what can I do in the actual healing process? Absolutely nothing. It is all in God‘s hand.” 신실한 신자였던 주 교수는 환자들을 수술하는 것은 자기이지만 치유하는 능력은 주님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에서 주님의 팔 혹은 주님의 능력은 ‘그’라고 지칭된 분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2)

연한 순, 마른 땅에서 나온 싹은 언제든 시들 수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에 타버릴 수도 있고, 쓸모없다고 뽑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좋은 결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의 연약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이사야는 ‘없다’는 표현을 세 번이나 연속해서 사용합니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 ‘훌륭한 풍채’, ‘흠모할 아름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남들 눈에 들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비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천대받고 학대받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3)

그가 겪는 일들이 세 가지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고통을 겪었다고 번역된 구절 ‘이쉬 마카오브 îš maḵ'ōḇ’는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이란 뜻입니다. 슬픔의 사람, 슬픔에 잠긴 사람, 슬픔에 삼켜진 사람이라니 처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또한 병을 아는 사람(yāḏaʿ ḥŏlî)입니다. 그는 자기 몸으로 겪어 보았기에 병들어 서러운 마음을 압니다. 우리 곁에도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남들에게 천대받으며 산 경험이 있는 이들은 이 구절을 무심히 읽을 수 없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귀족들의 수탈을 당하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으면 풀을 먹으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한 귀족을 붙잡아 입에 풀을 쑤셔 넣습니다. 그들의 한이 얼마나 깊은 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 상처 입은 치유자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손가락질을 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3b). ‘덩달아’라는 부사가 참으로 통렬합니다.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르는 게 안전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약자들에게 수치심과 혐오를 안겨주는 태도는 그렇게 형성됩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보면 사람들은 일쑤 그것이 그들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4b) 이게 사회적 혹은 문화적 통념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는 잘 살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가난하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듣기에는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오만한 편견입니다. 식민 역사나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이 빈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줄다리기를 해봐서 알지만 운동장이 조금만 기울어 있어도 승패는 명확하게 갈립니다. 토라가 공의와 정의를 함께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품고 있는 통념에 타격을 가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5)

구속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대속 교리를 입증하는 본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이 구절 속에 내포된 삶의 신비를 놓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쩌면 인간들이 빚어낸 아픔과 모순과 더러움을 자의든 타의든 자기 속으로 끌어들여 정화하는 이들을 통해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사이긴 합니다만 제 아버지는 1990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화장이 일반적이지 않은 때라 매장을 했습니다. 하관식은 대개 관을 모신 후 셋째 횡대를 열어놓고 진행합니다. 가만히 바라보니 그 자리가 아버지의 가슴 부근처럼 보였습니다. 문득 아버지가 겪었던 가슴의 아픔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 내가 견뎌야 했던 고통과 절망을 아버지는 당신 가슴으로 함께 앓으셨던 것입니다.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조롱과 수치를 당했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 덕분에 역사는 조금 맑아진 것이 아닐까요? 메시지 성경은 5절 하반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가 벌을 받아들였기에 우리가 온전해졌고, 그가 입은 상처를 통해 우리가 치유를 받았다.”

∎ 탓하는 삶을 넘어
묵묵히 고난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이들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맑아집니다. 고생하는 이가 있어 우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희생과 고생 덕분입니다. 새벽에 이슬이 내린 좁은 논둑을 걸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른 아침 그런 길을 걷노라면 바지가랑이가 다 젖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먼저 그 길을 걸었다면 다음에 오는 이들의 바지는 젖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앞서 이슬 길을 걸어간 이들을 일러 이슬떨이라 합니다. 이슬떨이들이야말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모셔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6).

양들이 길을 잃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먹이를 찾는데 정신이 팔렸기 때문일 겁니다. 주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온통 집중하느라 삶의 더 깊은 차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욕망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마음입니다. 욕망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욕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게 마련입니다. 탓하는 마음은 사람을 이어주기보다는 갈라놓습니다. 욕망이 중심이 되면 평화가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평화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욕망을 잠시 유보하는 이들을 통해 세상에 유입됩니다. 이익에 담백한 사람,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 공동체는 따뜻해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셨다고 고백합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이 적실하다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짊어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벧전 2:24-25)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미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들고, 기쁨과 감사가 깃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7월 02일 13시 06분 5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