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6. 희망은 든든하다
설교자 김형욱
본문 고린도후서 1:3-11
설교일시 2023-06-25
오디오파일 s20230625-2.mp3 [1993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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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4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6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7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9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11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우리가 받게 된 은총을 두고, 많은 사람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희망은 든든하다

우리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예배에 나오신 모든 교우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교우 여러분들께서는 희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심상이 떠오르는지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 같은 기대, 위로와 격려, 회복, 힘을 나게 하는 소망과 같은 그야말로 우리 마음 한편을 따듯하게 만드는 단어가 희망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희망의 등불보다 절망의 그림자가 더 센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세대에게 희망이란 단어를 던지면 '그런 낭만적인 단어가 아직도 있는가?' 라며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희망보다 절망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성적으로 희망을 탑재한 사람들입니다. 궁극의 소망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과연 이 어두운 세상에 희망의 등불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가 희망의 방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엄중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도입부를 함께 읽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쓴 두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고 성찰할 때 주요하게 다루어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세기 도시 공동체의 특성이라든지, 각 교회의 개성과 역사, 또는 로마제국과의 관계 등 여러 고려해야 할 것이 많고 이는 모두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바울 서신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며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바로 편지를 쓴 이의 심정입니다. 즉, 사도가 이 편지를 지금 어떤 심정으로 한글자씩 써내려가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을 사는 성도로서 바울 서신을 대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이었기에 이렇게 써야만 했는가. 도대체 사도와 교회 간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또 사도는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썼을까를 우리는 깊게 성찰해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서두의 축복과 안부 인사 부분은 다른 바울 서신의 안부 인사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바울의 사상과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로마서, 빌립보서, 갈라디아서 등을 살피면 서신의 첫 시작은 주로 감사와 찬송, 안부와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에는 다소 무거운 단어와 표현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온갖 환난을 겪었다. 고난과 고초를 겪었다라는 묘사가 등장합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사역간에 겪게 되는 고단함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후반부는 그 내용이 자못 심각합니다. '우리가 힘에 겨워 짓눌렸다'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이다'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다' '죽음의 고비를 겪었다'와 같은 교회 성도들을 향한 편지의 도입부라 하기엔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지는 기록을 바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떤 상황이었기에 바울은 이런 처절한 심정의 편지를 교회에 보내게 된 것인가?

오늘 우리 본문 고린도후서 1장 8절이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1: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어떤 환난을 겪었던 것일까요? 서신에서 명확히 다루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으나 여러 학자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겪었던 박해와 투옥 정황과 경험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행 19:21-27). 또한 바로 이어지는 9절 말씀에서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라는 표현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은 감옥에 투옥 후 사형 선고를 받았거나 그에 준하는 고통을 겪었으리라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어떤 종류의 고초를 겪었는가에 있다기보다 그의 심정입니다. 사도로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고 교회마다 전해야 할 말씀이 많은데, 사도와 그가 전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옥에 갇히고 생명의 위협을 실제로 당했던 바울의 심정 말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바울이 박해가 두렵고 처형으로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 무서웠을까요? 물론 바울도 사람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마스쿠스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그때 이미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온몸으로 자각했던 사람입니다. 다마스쿠스에서 주님은 당신의 음성으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16절입니다.

행 9:15-16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주님께서 직접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예수의 전파자, 즉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은 순간부터 자신의 길 앞에는 오로지 고난과 고초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바울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담은 사도행전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박해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가는 곳마다 죽음과 동행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 극심한 괴로움은 단지 육체의 고통을 당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괴롭히고 두렵게 만들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을 잠시 한편에 두고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전해드리겠습니다.

거짓 사도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생각했을때 그를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아시아에서 어떤 환난을 당해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에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을 더욱더 괴롭고 고통스럽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슬프게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였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 다음의 서신입니다. 문제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일이 바울을 심각하게 괴롭히고 아픔을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아름다운 사건이 벌어졌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박해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스데반에게 했던 것과 같이 동족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비방과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의 외적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바울은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고난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을 교묘히 변형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사도로서의 권위를 의심케 하는 자들,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아 영적으로 충만하니 저 보잘것없는 바울은 더는 주님의 교회의 사도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통칭하여 거짓 사도들의 등장한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의 마음을 쓰라립게 만든 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둘 그 거짓 사도들의 달콤한 말에 현혹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전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으로 세워졌던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이자 목회자로 여겼던 사도 바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그가 전하는 복음을 믿을 수 없겠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망 속의 바울 그러나
이제 앞서 말씀드렸던 바울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극심한 고통과 함께 다른 복음을 전하고 사도를 음해하는 거짓 사도들의 등장으로 고린도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은 바울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육체의 고통도 괴로운데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된 바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청파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비로소 사도의 심정을 조금 더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구석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사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두려움, 회한, 후회, 혹은 분노였을까요? 저는 절망 가운데에 있는 바울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 한 가지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 고린도 교회와 교우들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도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며 세웠던 교회, 이런저런 문제도 많고 사도의 마음을 힘들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조금씩 자라났던 그 교회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정하신 일이다. 하지만 홀로 남게 될 고린도 교회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고린도 교회가 거짓 사도들의 그릇된 복음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을까? 굳건히 복음위에 서서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이 바울을 사로잡았고 무엇보다 괴롭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심정을 이해한다면 오늘 본문 8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고후 1: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사도의 심정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 괴로워하는 사도에게 희망이 존재할까요? 바울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죄가 없으니 이제 감옥에서 나가도 좋다는 석방 명령문이었을까요? 당신의 신분이 복권되었으니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는 박해자들의 약속이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효율을 따진다면, 저 문제 가득한 교회 고린도는 포기하면 그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말고도 말씀을 전해야 할 교회가 많았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그는 이제 주님의 사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선한 목자가 되신 주님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조금 더 따라가 보겠습니다.

9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살아갈 희망의 등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것 같은 심정에서 건져주셨다고 말합니다. 위험한 죽음에서 살려주셨고 앞으로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하나님께 두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실체적인 위험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건져 주셨다는 믿음을 어떻게 해서 갖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바울에게 다시 살 수 있는 소망이 되었을까요? 다름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다시금 복음 위에 굳건히 서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와 그의 가르침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도를 음해하는 거짓 사도들을 물리쳤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로, 이 소식이 바울을 다시 살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구체적으로 고린도후서 서문에서 기록하지는 않지만, 7장에서 디모데와 더불어 자신의 가장 아끼는 제자 디도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고 그들의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준 장면에 등장합니다. 서신의 정황상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 그러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와중에 온갖 고난과 박해를 당하던 때였으며,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보내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라 말했습니다. 이윽고 디도가 바울에게 되돌아왔고 바울은 그제야 꿈에 그리던 답을 듣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6절과 7절의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6 그러나,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7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디도의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다시금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기 시작했다는 말이 바울 사도를 살린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가 교회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날로 커져서 근사한 건물을 새로 올렸습니다. 헌금함이 가득 차 넘칠 지경입니다. 온 인근 사람들이 모조리 우리를 우러러봅니다. 이런 말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가 듣고 싶은 말, 절망의 소용돌이에 고통받는 바울을 살렸던 유일한 말은 교회가 복음 위에 온전히 서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를 살리며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기는 일이라면, 우리 주님께서도 이 말 듣기를 가장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교회로부터 듣고 싶은 말, 보고 싶은 장면,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오직 교회가 복음 위에 서서 이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든든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 본문 서두의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의 고난을 이해했으며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함을 바울은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교회와 사도가 서로의 고난을 끌어안을 때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바울은 4절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순회 선교사로 고린도 교회를 다시 떠나야 하지만 이제는 두렵거나 걱정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는 희망이 이제는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청파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각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의 등불이 되어 복음 위에 온전히 설 때 환난 중의 이웃들이 다시 살아보자,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 청파교회가 복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설 때 사도에게 살 희망을 주었듯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하며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인 이 세상에 희망의 방주가 될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2023년 06월 25일 14시 02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