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5. 사랑의 그물망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전 3:6~10
설교일시 2023-06-18
오디오파일 s20230618-2_48.mp3 [1217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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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그물망
살전 3:6-10
(2023/06/18, 성령 강림 후 제3주)

[그런데 지금 디모데가 여러분에게서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또, 여러분이 우리를 늘 좋게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 싶어한다고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보고, 우리의 모든 곤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때문에 누리는 모든 기쁨을 두고, 여러분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또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줄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 길 위에 선 사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계절은 망종과 하지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벌써 여름이 온 듯합니다. 논에 심긴 어린 모들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성령강림 절기에 우리 믿음도 그렇게 성큼 자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아프리카 이주민을 태운 난민선이 그리스 필로스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바다에서 뒤집혀 최소 79명이 숨졌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 푸른 바다에서 한 생을 마감한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크신 품에 안아주시기를 빕니다.

성경은 온통 이주민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근과 정치적 억압 그리고 경제적 수탈을 피해 사람들은 낯선 땅으로 이주하곤 했습니다. 율법은 나그네를 박대하거나 학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계의 역사를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것이 아니라, 박해받던 이들이 투쟁을 통해 어렵게 획득한 것입니다. 세상의 희망은 중앙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전도자 바울은 신생 종교인 기독교를 로마 제국 곳곳에 전하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을 로마 제국의 핵심 도시들에 전하는 일에 진력했습니다. 기후 조건에 상관없이 로마의 기병과 전차를 보낼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천후 도로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거슬러 가며 그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쟁과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길을 창조적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한 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길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를 통해 시작된 교회는 마치 논에 옮겨 심어진 어린 모처럼 연약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떠나온 교회의 형편을 살폈고,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전해 듣고 가슴 아파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한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를 따라 빌립보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에서 암비볼리까지 67km, 거기서 아볼로니아까지 40km, 거기서 데살로니가까지 60km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차로 불과 몇 시간 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이 때는 상황이 사뭇 달랐습니다. 길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강도를 만날 수도 있었고, 머물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는 테르마이코스 만의 북쪽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도시는 마케도니아 왕 카산테르가 주전 315년에 자기 아내인 데살로니키를 기념하여 세웠습니다. 데살로니키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입니다. 기획도시답게 이 도시는 국제 교역의 교차로로 번성했습니다.

∎ 디모데
바울은 그곳에 세 안식일 동안 머물며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과 토론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몇몇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고,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귀부인들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건한 사람’이란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방 세계와 유대인들의 세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자 유대인들은 분노했습니다. 시기심에 찬 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다가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찾으려다 찾지 못하자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시청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그들을 모함했습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은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행 17:6b-7)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이라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현상 질서 유지에 급급한 이들은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의 존엄성에 눈을 뜨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기들이 특권을 누리던 세상의 기초를 뒤흔들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 일행을 모함하는 유대인들이 정말 두려워한 것은 자기들의 이익이 침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한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선동입니다. 그게 대중들을 동원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이들은 진실과 무관하게 선동을 통해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 합니다.

바울 일행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로 떠났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거기까지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을 떠나 아테네로 향했습니다. 그때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참 중요한 인물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길리기아 지방인 루스드라에서 만나 자기 여정에 동참시킨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디모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빌 2:20)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빌 2:22)

바울은 서신에서 여러 번 디모데를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고전 4:17),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딤전 1:2), ‘사랑하는 아들’(딤후 1:2)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그래서 디모데를 자신의 특사로 여러 번 파견합니다. 고린도교회와 빌립보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 연결
디모데는 노심초사하고 있는 스승을 대신하여 데살로니가교회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데살로니가에 갔다가 돌아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비록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서도 그들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고, 바울 사도가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들도 바울을 매우 그리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깊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살전 3:8)

저는 이 구절 앞에서 전율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존재 의미를 욕망 실현에 두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굳게 서 있는 이들이야말로 바울의 모든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번역한 헬라어 ‘자오zaō’는 ‘산다’는 뜻 외에도 ‘숨 쉬다’, ‘활력이 넘치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삶의 보람 혹은 활력을 느낍니까?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속되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버리지 않을 때 비로소 자기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만날 수 없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바울 일행을 굳게 연결해주었습니다. 세상의 지배자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고립시키려 합니다. 고립시켜야 지배에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고립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낳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겨자풀과 같은 이들이 어깨를 겯고 세상의 풍파를 함께 이겨나가는 세상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엡 2:21)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엡 4:16)

연결이야말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해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과 미생물이 없다면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은 생태계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사슬의 고리가 끊어지면 생태계는 위험에 처합니다. 지금 지구가 앓고 있는 몸살은 인간의 과도한 경제행위로 인해 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져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그물망을 복구해야 합니다.

뇌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거대한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 “1280억 개의 신경세포가 거대하고 유연한 구조로 연결된 네트워크”(리사 펠드먼 배럿,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변지영 옮김, 더 퀘스트, p.60)라고 말합니다. 그 신경세포들이 시냅스라는 틈을 통해 정보를 전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뭔가를 인식하고 기억하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냅스가 만들어내는 연결이 무려 500조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 연결이 끊어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어가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어려움도 감당하려 했습니다. 그가 겪었던 박해와 시련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그물망을 만드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8-29)

이 마음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기초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명이 있다면 나뉜 것들을 연결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연결하는 이들의 특색은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공감의 능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 기본은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겸허함입니다. 오만과 냉혹함, 자기 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오히려 연결을 끊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물 깁는 사람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서로 연결되는 이들이 느끼는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그리워합니다. 얼굴을 대면하여 보면서 그들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확장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살전 3:12)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 성도들 간의 사랑이 물결처럼 번져서 주위를 감싸고, 그 사랑이 더욱 커져서 우리와 무관해 보이던 사람들까지 품어 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사랑의 그물망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앞장서서 그 그물을 기워야 합니다. 연결이 끊어져 외로운 사람들, 삶에 지친 사람들을 우리 사귐 속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오만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부르던 오래된 노래가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주의 은혜 나누며/예수님을 따라 사랑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하나님이 가르쳐준 한 가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 우리는 이 사랑의 세계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사랑의 그물망을 더 크게 만들며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6월 18일 11시 56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