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3. 선한 관리인답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벧전 4:7~11
설교일시 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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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관리인답게
벧전 4:7-11
(2023/06/04,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 주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우리 모두 침묵하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장미꽃의 계절이 지나자 수국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교회 화단 가득 달맞이꽃이 환합니다. 아침에 교회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저는 잠시 멈춰 서서 화단의 꽃들과 눈 맞춤을 하곤 합니다. 저는 이 척박한 곳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들에게 무언의 감사인사를 건넵니다. 무심히 피어나는 꽃들은 이런저런 일로 심란한 내게 잠시 멈췄다 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과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 사이에서 우리는 흔들립니다. 마음이 우리를 속일때도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 17:9)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품은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그렇게 신뢰할만하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욕망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이익에 담백하지 못할 때, 권력욕을 내려놓지 못할 때 매우 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희망의 조짐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더 많은 것 같은 세상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거리를 지나다가 정당이나 시민단체들이 내건 현수막들을 보며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온통 부정과 조롱과 저주의 언어가 넘칩니다. 적대감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들에 자주 노출되면 우리 속에 여백이 사라집니다.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의도된 합리화’ 혹은 ‘확증편향’이 사실이나 진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생각에 골똘할 때면 파블로 네루다의 시 ‘침묵 속에서’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오릅니다.

“이제 열둘을 세면/우리 모두 침묵하자/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손도 움직이지 말자”

욕망에 이끌려 살아온 우리의 부박한 삶의 실상을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잠시 동안이라도 멈춰 설 수 있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것 같습니다.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고 싶은 시인의 비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을 어디론가 끌고가는 것에/그토록 열중하지만 않는다면/그래서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면/어쩌면 거대한 침묵이/이 슬픔을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 조심
예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죄와 욕망으로 얼룩진 마음을 씻어주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우리 마음을 풍덩 던지는 시간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잡을 조’와 ‘마음 심’이 결합된 조심(操心)은 두리번거리며 살피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굳게 붙들라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고 새겨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조심은 마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붙들어매는 것입니다.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조심스러운 마음은 거침없는 태도와 구별됩니다. 미리 속단하고 자기 추측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갈등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머물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hesitation)이라고 말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속단하고, 응대하는 이들은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성전 체제가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조차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는 것조차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2:1)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는다면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대감이 가득 찬 세상에서 환대의 공간을 만들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벧전 4:8)라고 말합니다. 죄를 덮어 준다(kalyptō)는 말은 불의를 못 본 체 한다든지, 불의에 가담한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 망신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망신주기를 통해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어깨에 걸친 채 뒷걸음쳐 들어가서 술에 취해 누워 있던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창9:23). 그런 삼가는 태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연대를 더욱 굳게 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기의 도덕적 우월성을 뽐내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잘 드러내는 사람은 실은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를 성찰할 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사도 바울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갈 6:1). 잘못을 사람들 앞에 까발려 망신을 주지 않는 것,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 그리고 자기를 스스로 살피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의 바른 태도입니다.

∎ 불평 없이 따뜻하게
이어서 사도는 성도들에게 진심을 다해 말합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벧전 4:9). 불평(gongysmos)은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것입니다. 불평은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한 공동체의 결속을 내적으로 허물게 마련입니다. 따뜻하게 대접하라는 말은 환대(歡待)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환대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을 찾아온 세 나그네를 정성을 다해 맞아들였습니다. 물을 가져올 테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고 계시면, 잡수실 것을 마련해 오겠다고 말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 18:5). 저는 언제든 이 말씀을 상기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와 만난 사람들이 마음이 상쾌해져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소돔 성 어귀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낯선 두 사람을 보고 일어나서 맞으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가시는 길을 멈추시고, 이 종의 집으로 오셔서, 발을 씻고, 하룻밤 머무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 19:2). 히브리서는 이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히 13:1)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도 환대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동료 인간으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긍정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살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마음을 쓴다는 말입니다. 환대는 우정의 공동체를 만드는 초석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성채>라는 소설에서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란 무엇보다도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다. 방랑자에게 대문을 열어주고, 그의 목발과 지팡이를 한쪽에 놓아주며, 그를 평가하기 위해 춤을 춰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방랑자가 길 위에 활짝 핀 봄을 이야기하면 자신 안에 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그가 자신이 떠나온 마을을 덮친 기근의 끔찍함을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기근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다.”(<생텍쥐페리의 문장들>, 신유진 엮고 옮김, 마음산책, p.48)

이런 친구가 한 둘 있다면 우리 인생은 살만하지 않을까요?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을 나눈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 환대의 공간 만들기
지난 5월 미국 일정 중에 마지막으로 묵은 보스턴의 한 호텔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시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호텔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한 아프리카계 여성 때문입니다.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영화 ‘시스터 액트’에 나오는 우피 골드버그를 닮았습니다. 아침에 식당에 들어가자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나긋나긋하고 그윽한 목소리로 테이블에 마련된 식기를 가지고 가서 음식을 담아오면 된다고 또박또박 말해주었습니다. 말투와 표정에 따뜻함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손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을 맞이하듯 대했습니다. 손님들도 그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체크아웃을 하고도 그를 찾아와 가벼운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공간을 따뜻한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의 일터인 동시에 성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호텔을 떠나면서 “당신은 이곳을 특별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그는 감동어린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고 축복해주었습니다. 사무적일 수도 있는 한 장소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우애의 장소로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산에는 50대의 부부 목회자가 운영하는 ‘살뤼Salut’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목사님 부부가 직접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워 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카페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첫째는 밀가루, 설탕, 버터, 치즈, 과일 등 모든 식재료를 최고 품질의 것으로 정량대로 사용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이들로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카페는 영업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두 분의 성소였던 것입니다. 손님들 가운데는 겸손하고 친절한 이들도 있지만 까다롭고 무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들이 세운 두 가지 원칙을 기억하며 손님들을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홀로 오신 손님에게 주문받은 빵과 커피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빵을 만든 과정과 커피를 내린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자 손님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손님은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그렇게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환대가 그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던 어떤 설움 혹은 얼음을 녹인 것이 아닐까요?

보스턴과 예산에서 만난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환해집니다. 세상을 황무지로 만드는 이들도 있지만, 정성을 다해 세상을 아름다운 정원처럼 만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정과 일터가 그런 환대의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픈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자기 삶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꿈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입니다. 우리는 서로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기를 빕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6월 04일 12시 04분 5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