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2.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
설교자 이범석
본문 고전 12:3-13
설교일시 202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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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유익을 위해서
고전 12:3~13
(2023/05/28, 성령강림절)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임하셔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께서 이끄시는 길을 우리가 따라나서며, 충만한 만족과 기쁨 가운데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 성서일과, 즉 요한복음 20장, 사도행전 2장,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을 통해, 성령강림의 아름다운 뜻과 멋진 역사를 우리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용서 : 성령 강림의 시작
우리가 오늘 함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올해 성령강림절 복음서 말씀은 요한복음 20장 19~23절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으로써, 여러분이 모두 잘 알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었다는 이야기를 여인들이 전하는 겁니다. 베드로와 (아마도)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부활의 ‘부’ 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와서는,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과 대화도 나눴다는 겁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도, 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닫힌 문을 넘어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주님은 구멍 난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20:21)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그냥 빈손으로 세상의 이리 떼 가운데로 내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20:22b~23)

거친 세상으로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그냥 홀로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의 출발점이자 근원이 되는 권능은 타인의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의 능력은, 로마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도 아니고, 왕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아서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도 아닙니다. 용서하는 능력입니다.
용서, 어쩌면 세상 가장 어려운 것이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주님께 구하고 받을 첫 번째 능력이 바로 ‘용서하기’라는 건 분명합니다.
용서는 받아들임입니다. 용서했다고, 잘못한 일이 없던 것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엇나간 관계와 찌르는 듯 쓰라린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함께해 보겠다는 거룩한 시도입니다. 지난번에는 어려웠고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과 용기가 있을 때, 우리는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으로 파송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 또한 바로 엊그제 스승을 못 박았던 유대 사람들을 용서하고 나아가는 담대하고 분명한 한 걸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미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눅23:34) 라고 기원하신 바 있습니다.
성령강림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도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죄든지 용서할 권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용서, 즉 타인을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 소통 : 성령 강림의 사건
우리가 두 번째로 볼 말씀은 사도행전 2:1~21 말씀입니다. 아마 성령강림절 대표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 강림의 사건을 보고, 그 사건 위에 교회가 탄생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유월절 이후 50일이 지나고,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디아스포라 생활을 하던 이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 부는 소리가 나더니, 제자들이 있었던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각각 세계 곳곳의 다른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양한 외국어를 듣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놀라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 갈릴리 어부들이 외국어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터키, 이집트, 북아프리카, 로마, 그리스 등등 정말 다양한 곳의 말들로 각기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언자 요엘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졌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면, 남녀노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받고, 하나님의 꿈을 함께 꾸게 될 것이라고 전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욕망이 극에 달해서, 바벨탑을 쌓고,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이래로, 인간은 서로의 말을, 서로의 진심을 알아듣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령 강림의 사건으로 각기 자기의 말의 방식으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만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삼천 명이나 예수 믿는 이들이 생겼고, 이를 교회의 탄생으로 여깁니다.

우리 시대는 뛰어난 외국어 번역기가 나와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세대 차를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어르신 말씀도 잘 모르겠고, 아이들 얘기도 잘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끼어, 사오정이 된 느낌입니다.
일단 중고등부 학생이나 젊은 선생님들이 하는 줄임말을 제가 알아듣지 못합니다. 몇 개 외우다가 지쳐서 포기했습니다. 얼죽아, 갑분싸, 마상, 소확행, 뭐 이 정도에서 멈췄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수없이 많이 만들어지는 줄임말을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고 했더니, 그 친구들 말이, 자기네들은 이게 어렵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답니다. 간략하고 깔끔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서, 더 좋답니다. 그래도 친절한 우리 청파 중고등부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무지한 제가 물어보고 또 물어봐도 잘 번역해 줍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래로만 치이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자녀분들이 멀리 떨어져 살고 계시는 아버님 걱정이 되어서, 근처로 이사 오시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 아버님께서는 괜찮다고, 잘 지내신다고 하시며, 거푸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분들은 어찌해야 좋나 염려하고 있었는데, 고모님께서 귀띔해 주시길, 아버님께서 전혀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하셨답니다. 자녀들에게조차 폐 끼치기 싫어하시는 어르신이니, 최소 열 번은 여쭤봐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또, 아버님께서 혼잣말하시듯 스쳐 지나가며 하시는 말씀 하나하나를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것도 추가하고요.

성령 강림은 이렇게 서로의 진심을 알아듣기 힘들어진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 중 극악무도한 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모두 착하고 좋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선의로 시작되었으나, 조금씩 어긋난 마음들이 시간과 사건을 다양하게 거치며, 서로 결코 맞닿을 수 없으리만큼 멀어져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때때로 사랑의 마음을 품고, 이번 한 번 내가 먼저 다가가려고 시도합니다만, 시쳇말로 번번이 타이밍이 어긋나서, 더 큰 오해로 쌓이기도 합니다. tv 드라마에서 번번이 엇갈리는 남녀 주인공들처럼, 나도, 너도, 모두 손을 먼저 내밀어 보지만, 하나같이 어긋난 시간 위에서, 그 착한 손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마음만 더 굳게 닫히게 되기도 합니다.
성령님께서 내려오셔서 우리의 어긋난 마음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무리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행2:38)
우리 삶의 곳곳에 갈라진 수렁이 있습니다. 막힌 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회개하고, 즉 마음을 돌이키고, 또 세례를 받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서로의 진심을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주실 것이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나서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 강림의 사건으로,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섬김 : 성령의 활동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갈등이 심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습게도, 그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매우 뛰어난 이들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감이 되는 지혜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훌륭한 지식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가 하며, 병 고치는 능력을 자랑합니다.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고, 영을 분별하는 사람은 각기 자기의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이도, 또 방언을 통역하는 이도 자신을 내세우기 바빴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뛰어난 이들이었고, 모두가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갖지 못한 은사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의 은사가 모두 교회 공동체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각기 다른 다양한 달란트를 주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전12:7)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영,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약속처럼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각 사람의 삶을 통해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 다른 모양새, 다른 쓰임새로 활동하십니다. 그 이유는, 서로의 부족을 나의 능력으로 채워주면서,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온전한 공동체로 서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달란트가 얽혀져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뛰어남을 한껏 드러내는 건, 많은 경우, 자기의 부족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이끄시는 공동체에서는, 나의 부족함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곁의 성도들이 사랑으로 그것을 채워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만 내게 주신 성령님의 은사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섬기면 됩니다. 성령님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각기 다른 잠재력을 활성화시키십니다. 이렇게 받은 자신의 장점, 능력, 시간, 재물, 가진바 모든 것으로 서로를 섬길 때, 그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공동체입니다.

내 능력이 가장 출중하다고, 내 계획과 비전이 가장 뛰어나다고, 내 생각만이 옳다고 나서는 이들이 서로 다투는 곳이 고린도교회였고, 사도 바울의 아픔이었습니다. 저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님들이 교회에 어려움을 주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진심으로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을 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속으로 함께 가지고 들어온 인간적인 이상은 참된 공동체를 방해하므로 반드시 깨어져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참된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꿈을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사람이라 해도, 결국 모든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고 맙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복있는사람, 38-39)
물론 가만히 있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받은바 은사가 있는데도 공동체를 위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은사는, 사랑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힘든 이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나의 은사, 너의 은사, 모두 하나 같이 다 귀합니다. 서로가 받은바 은사로 섬김의 길을 힘차게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성령을 받은 이는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받아들여 주는 마음, 정말 어려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도우십니다. 용서가 바탕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용서의 마음이 있는 곳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참된 소통이 발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교회가 설립됩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 성령님께서는 각기 다른 은사를 부어 주십니다. 각기 다른 능력은 자기 뜻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모두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 계시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들려주신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우리는 부름받았으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으로 말하도록 도전받습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내게 영감을 주시고 나는 은사를 받았다’고 확언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감을 주시고 당신은 은사를 받았다’고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세 가지 변화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소통하십시오. 섬기십시오.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성령님의 은혜로 복된 곳이 되리라 믿습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5월 28일 11시 53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