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설교자 김형욱
본문 사 19:22~25
설교일시 2024-01-28
오디오파일 s20240128-2.mp3 [19465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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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1월 마지막 주입니다. 상투적인 표현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시간이 참 빠르지요. 2024년을 시작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두 달 가운데 하나를 마쳤습니다. 새해에 다짐한 마음을 얼마나 지키고 계시는지요. 올 한해 기도에 힘쓰기로 한 바에 대해 얼마나 마음을 쓰고 계시는지요. 벌써 흐릿해지셨다면 다시금 힘을 내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속상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쑤 일상에 휩싸여 생각해야 할 바를 놓치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바를 결코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아직 열한 달이 남았습니다.

멀고 먼 평화의 길
지난 송구영신 예배를 기억하시는지요. 많은 분께서 예배당에 나오셨고, 또 적지 않은 분들이 각자 댁에서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드렸습니다. 당일 우리 교회는 아주 오랜만에 성만찬을 가졌습니다. 세례받은 교우들이 한목소리로 화답하고 성채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개인에겐 정말 특별한 성만찬이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안수받고 처음으로 집례에 참여한 성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에게 주님의 몸으로 상징된 전병을 나눠드리며 '이는 당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할 때 몇 번이나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았는지 모릅니다.

성만찬과 함께 우리는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결단을 위해 한목소리로 여러 제목을 갖고 기도드렸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함께 드렸던 기도 가운데,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소서'라는 제목의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평화의 도구라니 참으로 근사한 말입니다. 이 말은 13세기 이탈리아의 수도사이자 작음과 청빈을 기치로 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시작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움과 다툼과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의 도구로 나를 사용해 달라는 수도사의 고백이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오늘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바로 오늘날이 그 어느 때보다 평화와 거리가 먼 시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가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증거를 굳이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자명합니다.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전쟁 소식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21세기가 맞는지 의심하게 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이제 국제 뉴스에 잘 언급되지도 않은 듯 단신으로 처리되곤 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해결되기는커녕 중동 지역 전체로 분쟁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서구 강대국들이 저마다의 경제적 계산기를 두드리며 전쟁을 쥐락펴락하고 있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 없겠지요. 한반도 평화는 그야말로 격랑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따금 평화를 향한 물고가 트이는 것 같다가도 지난 수년간의 노력이 일거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습니다. 국내 사정이라고 나을바 없습니다. 연일 보도되는 혐오와 분노 범죄, 테러, 린치 등은 이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평화는 왜 이렇게
교우 여러분, 평화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세계의 분쟁 지역 안에도 평화를 꿈꾸는 시민들이 있을 것이며, 전쟁을 멈추자는 소리가 절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지역에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지역에도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평화는 이렇듯 더디게 오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 시대에 평화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요? 평화는 어쩌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어느 경제학자가 자본주의가 제 기능을 유지하는 한도에서 경제적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것이 현대의 평화라고 말하는 바를 어느 인터뷰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듯 평화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어차피 불가능하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시스템을 보존하는 정도로 타협하자고 말합니다. 거대한 패배주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타까운 것은 우리 또한 평화에 대한 패배주의에 순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평화라는 말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평화를 추구하는 일은 정력적인 활동가들이나 하는 일이니 내 삶의 주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혹은 사는 일이 너무 힘겨워 평화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평화란 너무 진보적인 담론인 것 같아 부담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정 부분 옳습니다. 평화는 무언가 관념적인 단어인 것만 같고, 세상의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끊임없고, 나는 평범한 소시민이기에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은 과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평화에 대한 이와 같은 거리두기는 평화를 싫어하는 세상이 가장 원하는 방식입니다. 전쟁과 힘의 논리로 통치되는 세상이 가장 원하는 삶의 방식이 사람들이 평화와 이렇듯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평화에 대해 고민하기를 중단하라 압박하고 있기에 평화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버거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도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스스로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며 절절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평화에 대한 성찰을 더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본 이집트 심판
오늘 본문은 예언자 이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비전과 말씀 가운데 이집트, 옛한글 성경 말로 더 익숙한 애굽에 내린 예언에 대한 내용입니다. 모두 읽지 않았으나 오늘 본문인 이사야 19장 전체가 이집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다른 여타의 이방 민족과 달리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이집트는 박해와 억압의 원초적 기억입니다. 민족과 국가 단위로 억압한 최초의 국가가 이집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인 출애굽은 결국 이집트의 박해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나 박해의 상징이자 적대의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1절부터 이어지는 이집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정당하며 또 복음입니다. 몇 구절 살펴보지요. 1절에서 4절까지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 이것은 이집트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이집트로 가실 것이니, 이집트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간담이 녹을 것이다.
2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부추겨서, 서로 맞서 싸우게 하겠다. 형제와 형제가, 이웃과 이웃이, 성읍과 성읍이, 왕권과 왕권이, 서로 싸우게 하겠다.
3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의 기를 죽여 놓겠다. 내가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리면, 그들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무당을 찾아가 물을 것이다.
4 내가 이집트를 잔인한 군주의 손에 넘길 것이니, 폭군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주님, 곧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오랜 박해자였던 이집트를 주님께서 친히 심판하겠다니 이스라엘에 얼마나 복음입니까? 다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구절도 비슷한 말씀입니다. 이집트는 우상으로 가득하여 심판하겠다, 유다 사람들을 괴롭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때가 바로 당장은 아니지만, '그날이 오면'이라는 반복되는 삽입구를 통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심판이 임하리란 약속을 이사야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그러니까 이집트 심판 예언 말미에 이르러 매우 놀라운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립니다. 22절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곧 낫게 하실 것이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집트와 또 다른 이스라엘의 박해자 앗시리아가 서로 길을 내어 화해하고 나아가 이집트와 앗시리아 그리고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정한 표현으로 나의 백성 이집트 그리고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25절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시지요.

25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세 나라가 서로 평화롭게 화해하고 복된 나라가 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들을 화평하게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 19장 말미의 이 놀라운 예언은 역설적이게도 평화가 왜 불가능한지, 평화가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판단이라는 형벌
이 말씀이 단순히 평화에 대한 희망의 전망이 아닌 이유는 주님의 예언이 단 한 번도 성취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나라가 화해한 적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고대 앗시리아와 이집트는 서로 오랜 적국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 예언은 애초에 이뤄지기에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유무를 떠나 하나님의 이 말씀이 평화에 대한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 예언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입니다. 말씀드렸듯 이스라엘에게 앗시리아는 물론 이집트는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박해와 억압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이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말씀입니다. 아니 매우 불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따른다 해도 오직 한 가지, 우리 민족과 조상들의 원수인 이집트를 친구로, 함께 평화의 도구로 역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평화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평화를 위해 내 이웃들과 화해할 수 있고, 저 멀리 바다 건너 누군가와도 화해할 수 있으나 내가 미워하는 바로 그 사람과 나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을 내 평화의 파트너로 삼을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합당하고 타당한 이유를 근거로 저 삶들과 평화를 도모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더 어려운 일을 하라면 할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저렇게 몰지각한 자와, 저런 죄인과, 저런 격에 안 맞는 자와, 저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자와 어떻게 평화를 논하겠는가. 여러분, 이것이 평화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집트와 앗시리아를 주님께서 맞아주시고 세 나라가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에 어쩌면 이스라엘은 코웃음을 쳤을지 모릅니다. 우리와 같은 이유에서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평화의 동반자로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 우리가 우리 마음속의 미움의 대상인 그와 화해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가 여럿이겠으나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악하다 판단 내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와는 함께할 수 없다고 내 마음속에 이미 판단 내렸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큰 문제인 혐오 문제, 젠더 간에, 세대 간에, 민족과 인종간에 독버섯처럼 번져가는 혐오의 시작도 결국 나의 판단에서 시작하지요.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라는 판단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그의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나는 인간들이 서로를 판단 하는 대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단이란 인간이 사랑에서 벗어날 때마다 의존하는 형벌이다.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 조르조 아감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정확히 포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이 어떠하셨습니까? 모든 판단을 뒤로하셨습니다.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가 부유하건 가난하 건, 죄인이건 의인이건, 그가 전염성 높은 위험한 피부질환을 앓고 있건 아니건 모든 판단을 뒤로하고 그저 만나 위로하고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말이지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이를 가리켜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기보다 판단합니다. 이 철학자의 말과 같이 판단은 형벌입니다. 너는 죄가 크니까, 너는 나에게 무례하게 대했으니까, 너희 조상이 우리 조상을 박해했으니까, 나는 너와 화해할 수 없다. 이는 매우 합당하다. 타자를 판단한 다는 것은 곧 형벌을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형벌의 열매는 혐오입니다. 증거를 굳이 찾을 필요 없이 온 세상천지가 서로를 판단하고 혐오를 정당화합니다. 주전 8세기의 하나님의 예언이 지금까지 한 번도 성취된 적 없듯 평화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
여러분 이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아니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한 꿈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꿈이 동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주님의 제자들,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애쓰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예언 말씀에서 우리의 위치를 이스라엘이 아닌 이집트에 두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집트에 둔다면 이 예언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이집트라면, 우리가 누군가의 평화를 방해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던 이집트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 사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이집트고 앗시리아입니다. 누군가의 미움의 대상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판단과 미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에게 내가 평화의 훼방꾼이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면 평화의 실마리가 조금은 풀릴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이집트였음을 인정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할 때, 판단을 뒤로하고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이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꿈인 평화가 작게라도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청파교회 교우 여러분. 판단을 멈추고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내가 누군가의 이집트요 앗시리아일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십시오. 우리의 이성이 모든 힘을 다해 저자와 함께할 수 없다고 소리쳐도, 저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니 품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저 사람 역시 예수께서 피값을 주고 건지신 주님의 사람이 아닌가! 라고,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가 미움 대신 서로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불가능해 보이는 주님의 평화가 한 뼘 정도 자라날 수 있습니다. 도처에 전쟁 소식이 끊이질 않고 나의 혐오가 정당한 이유를 쏟아내는 시대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라는 하나님의 꿈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불의에는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이사야 19장이 이집트에 대한 심판임을 잊지 마십시오. 평화는 하나님의 오랜 꿈입니다. 우리가 그 꿈을 이루어야 합니다. 평화라는 주님의 꿈을 함께 꾸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등 록 날 짜 2024년 01월 28일 11시 28분 1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