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4. 생명 있는 이들 누구에게나
설교자 이범석
본문 마15:21~28
설교일시 2023-08-20
오디오파일 s20230820-2.mp3 [19302 KBytes]
목록

생명 있는 이들 누구에게나
마15:21~28
(2023/08/20, 성령강림 후 제12주)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휴가 잘 다녀오셨는지요. 불황으로 인해, 여름 휴가 기간을 비수기로 변경하거나, 휴가 자체를 축소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잘 영위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일상을 벗어나서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며, 다른 마음을 품어보는 것도 우리 영성을 위해 중요합니다. 낯선 존재, 낯선 세계와의 접촉은, 우리 마음 씀씀이의 지평을 넓혀 주고, 나아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형제 자매 됨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초대가 되기도 합니다. 또 평상시 잊고 지냈던 진리의 한 단면을 재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고, 바로 그 때 뜻밖의 도약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의 말씀 속에서 삶의 도약을 경험한 이의 이야기를 잠시 나누겠습니다.

* 두로와 시돈 지방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북부 지역에서 더 북서쪽으로 이동하십니다.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바깥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왜 그곳으로 가셨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갈릴리 사역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피정을 떠나신 것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기에, 그분의 위대하고 경이로운 면모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고백 그대로,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한계를 지닌 인간이셨습니다. 저는 인간 예수님의 소탈한 일상에 대한 상상을 해 보곤 합니다. 우리랑 똑같이 식사를 하며,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님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힘겨운 공생애 시간에 틈을 만들어 내셨을까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목수로 사셨고, 복음 선포자로 사셨던 삶이 팍팍했다 해도, 시간의 숨 쉴 구멍, 자그마한 탈출 같은 것도 하시지 않았을까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의 피정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너무 불경한 상상인가요.

* 까마귀 우는 외침
그런데 간만에 떠나온 피정의 평온함은 곧 깨지고 맙니다. 가나안 여인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외침이 얼마나 거셌는지 모릅니다. 성경의 단어는 krazo인데, 이 말은, 본래 까마귀의 (불쾌한) 울음 소리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뜻으로부터,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는 소리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녀가 이런 듣기 싫은 소리를 내었다고 한 번 더 불평합니다.

먼저, 가나안 여인의 태도와 그가 부탁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이방 사람이면서, 그녀는 예수님의 호칭을 선생님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이 호칭은, 두 사람 사이의 가장 강력한 차별점을 환기시킵니다. 다윗의 자손과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절대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질러 놓여 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정복 시, 절멸을 시키려 했던 관계요, 사사 시대를 거쳐 다윗 때까지의 전쟁은, 블레셋을 비롯한 가나안 사람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당신이 나를 무시하고, 상대하려 하지 않을 거란 걸, 나도 압니다, 라고 분명히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동시에, 그렇지만 나는 이 장벽을 넘어서기로 했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나안과 견원지간인 다윗의 자손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당신께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겁니다.
둘째, 그녀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청원합니다. 원수가 내려주는 알량한 자비라도 간절히 필요한 불쌍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낮춰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베풀 능력이 있는 분의 작은 사랑의 마음에 오로지 기대서 청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 그녀의 부탁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딸이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문제라는 걸 밝힙니다. 이방인이자 여성인 자신이 그 모든 철벽같은 가름에도 불구하고, 그 벽을 두드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소중한 딸을 가진 어미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느 부모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녀 생각에, 자기 딸은 고침 받을 자격이 충분한 존재입니다. 딸을 사랑하기에, 그녀가 치유 받고 잘 살 거라 확신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났으니, 정당한 보살핌을 받고, 자기 생명을 꽃 피울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야수처럼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에게 당신들이 무시하는 가나안의 딸에 대해 이런 부탁하는 것이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 생명을 위해 외칠 수 있다고, 항변하는 듯합니다.

* 잃은 양의 책임자가 짊어진 무게
그런데 예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사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도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반응이 참 야속합니다. 자기 문제도 아니고, 딸을 위해 외치는 엄마의 부르짖음에 한 마디 말씀도 안 하시다니요.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 속에 다른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는 이 사건 바로 전에, 예수님, 제자들과 바리새인, 율법학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갈릴리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나라의 중심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대뜸 시비를 겁니다. 당신 제자들은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아서,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고 있다고, 힐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이없는 계략을 알아채시고,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전통을 지킨답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곤 하는, 모순적인 이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빵과 같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뱃속을 지나 뒤로 나가버리므로, 그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정리하십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친답시고 내뱉는, 입에서 나오는 것들, 즉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 행동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며, 동시에 발화자 자신도 더럽힌다고, 너희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라고 질책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자주 꾸짖으십니다. 그러면서 지치셨을 겁니다. 꾸짖고 또 꾸짖어도, 같은 내용으로 또 꾸짖어야할 때, 얼마나 지치는지요.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축귀와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힘든 일이지만, 소 귀에 경 읽기처럼 반복되는 부정적인 질책은 더더욱 괴롭고 맥 빠지는 일이었을 겁니다. 나아가 사랑의 사역을 계속 했건만, 여전히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남의 눈의 티끌을 지적하며,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들을 보시며, 안타깝고 답답하고 속상하셨을 겁니다. 이스라엘 중심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들의 어둠을 보며, 주님은 이스라엘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아픔이 마음에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잃은 양들을 책임지고 돌보고 계시는 목자로서 예수님의 어깨가 무겁다 못해, 무너질 지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수님의 묵묵부답을 보며, 이것이 가나안 여인에 대한 뚜렷한 거부라기보다는, 예수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픔으로 인한 순간적 소홀함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자, 어쨌든간에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의 피정은 깨졌습니다. 휴가가 망쳐지는 건 한 순간이지요. 제자들은 이 난동에 괴로워하며, 실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압니다. 인간의 계획이 깨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는 걸 말입니다.

*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제자들은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여인이 귀찮은 마음도 있었을 테고, 자신들이 어떻게 도와주거나 처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그 여인을 어떻게든 떠나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라고 냉정하게 대꾸하십니다. 그 불쌍한 가나안 여인도 다 듣고 있을 걸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다 조마조마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그녀의 문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 짧은 문장에서, 그녀의 긴박함, 간절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듯합니다. 이쯤이면, 예수님도 도와주실만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절정을 향해 상황은 치닫습니다.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도대체 왜 이러실까요?

학자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설명하려 합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확장하기 위해 훈련 중이셨다. 그 지역 속담을 속엣말처럼 중얼거리신 것 뿐이다. 개는 들개가 아니라, 귀여운 강아지 같은 반려견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심한 욕을 하신 건 아니다.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중이셨다. 소년 예수님이 키가 크며 지혜가 자라셨듯이, 사역 중인 예수님도 더 발전하고 계시는 중이다. 등등 설명이 많습니다. 모두 한편으로 그럼직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저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자리에는 조금도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듭니다. 참 힘든 순간입니다. 강 대 강으로 대치하며 팽팽합니다.

* 위대한 믿음
그런데 이 막대한 긴장을 깬 건, 가나안 여인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자신을 비하하는 표현에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고 되갚아주어야 공평하다고 여기는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참 유연한 대답입니다. 아마도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님께 모욕당한 상처보다 컸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의지할 마지막 희망이었기에, 그녀는 성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닐런지요. 강 대 강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순간, 가나안 여인은 더 강력하게 소리지르는 방식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예수님께 다가 섭니다. 무릇 극한 긴장을 해소하는 건, 겸비한 태도입니다.
나아가 그녀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며, 그분의 사랑은 늘 그릇에 흘러 넘쳐, 사방을 적신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가나안 여인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었습니다.

이 여인은 평생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세상 가장 위대한 주인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은 종과 같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접고, 이분이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아주 작은 자비의 한 조각이라도, 그 잘디잔 부스러기라도, 자신에게는 충분하다는 태도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 속으로부터 밖으로 발화된 신뢰의 말로 인해, 감동하시고 기뻐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큰 칭찬을 하십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크다. 그리스어로 megas, 우리가 잘 아는 그 ‘메가’입니다. 메가시티, 메가커피, 메가박스, 메가스터디 등등. 영어로 great입니다. 이방 여인의 믿음을 엄청나게 칭찬하시고, 바로 그녀의 딸을 치유하셨습니다.

*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가없는 사랑
예수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이스라엘에 대한 걱정을 뛰어넘게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을 맡기셨지만, 그 경계 너머의 생명들을 위한 계획 또한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경계를 뛰어넘는 더 위대한 도약의 계기를 이미 만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 사람 모두, 서로 큰 믿음의 거룩한 영향을 끼치며, 시너지를 일으킬 시간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롬11:29)
로마 교회에 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또 이방계 그리스도인 중에는 대박해 시절 쫓겨났다가, 고생 끝에 다시 되돌아온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단련의 시간을 거치며, 믿음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자부심이 큰 만큼, 믿음이 약한 이들에 대한 무시 아닌 무시와,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에 대한 적잖은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겸손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약한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순종한 유대인들도 버리시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여, 주님의 자비하심을 입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결코 철회되지 않는다”는 문장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습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8-39) 생명이 있는 이들 누구에게나 이 사랑은 허락되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 신앙으로써, 우리의 얄팍한 계획과 인간적 계산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제한과 경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사랑을 받은 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나누고 가르는 경계를 허물도록 이끄십니다. 경계를 뛰어넘게 하십니다. 큰 사랑의 마음과 손길이 경계선 바깥으로도 전달되게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위대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거룩한 믿음의 사역에 초대 받았습니다. 장벽이 있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한 이름 없는 가나안 여인처럼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세상을 섬깁시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가없는 사랑을 받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참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 듣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8월 20일 11시 57분 2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