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2. 창조적 계승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4:12-17
설교일시 2023-08-06
오디오파일 s20230806-2.mp3 [2027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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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계승
마 4:12-17
(2023/08/06,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 배턴 터치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제 이틀 후면 입추입니다. 벌써 아침과 저녁, 바람결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이 여름에게 자기를 내주었던 것처럼, 여름도 가을에게 자리를 내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저는 세상사가 이어 달리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앞 사람들이 이룬 성취를 누리며 삽니다. 오늘 우리 삶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한 씨 뿌림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요 4:37-38)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누군가의 수고 덕분임을 알 때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의식이 제게는 매우 귀하게 생각됩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유월절 의식서인 하가다(Haggadah)는 그날의 의례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반복되는 그 의례를 통해 자기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 부분임을 자각합니다. 큰 이야기 속에서 자기 삶의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말입니다. 유월절 의례는 애굽에서 해방되던 날의 감격을 오늘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오감을 다 사용합니다. 정결한 물에 손을 씻고, 음식을 축성하는 기도를 바치고, 가장이 들려주는 유월절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쓴 나물과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고, 다시 올 엘리야를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집 출입문을 열고,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이 의례를 통해 자기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 부분임을 자각합니다. 자기들의 삶을 큰 이야기 속에서 이해할 시각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세대를 연결하는 효과도 얻게 됩니다.

제가 CCM 찬양도 좋아하지만 찬송가에 더 끌리는 까닭은 세대를 이어주는 기억이 그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주 나를 박대(외면)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280),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갑니다’(272),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273). 이런 곡들을 부르면 어머니의 목소리와 음색이 떠오르고, 함께 신앙 생활하던 벗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진실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젊은 세대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옛 것을 낡았다고 하여 무조건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옛것을 익히고 미루어 새 것을 배우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 옛것을 본받아 새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 세대가 가면 다른 세대가 그 뒤를 잇습니다.

∎ 요한이 잡힌 후에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전합니다. 마가복음의 보도는 매우 간략합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막 1:14). 마태복음은 그보다 상세한 경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던 요한의 사자후가 무도한 공권력에 의해 잦아들 무렵,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진리는 침묵 시킬 수도 없고 감옥에 가둘 수도 없습니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나자렛 예수’라는 영화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엇갈린 운명을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요한이 실랑이 끝에 체포되어 군인들에게 끌려갈 때 요한의 겉옷이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이 슬그머니 다가가 그 옷을 들고 홀연히 현장을 떠납니다. 감독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감독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며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떠올리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 일컬어지던 엘리야는 홀연히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한 세대가 저문 것입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들고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겉옷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소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이러한 연결은 참 아름답습니다.

1997년에 제가 청파교회 담임목사로 선임되었을 때 당시 담임목사이셨던 박정오 목사님은 저와 마주앉은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 27년 동안 나는 무엇이 기독교가 아닌지에 대해 가르쳤어. 그런데 무엇이 기독교인지는 가르치지 못했어.” 회한에 찬 자기 성찰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말씀은 없었지만 제가 감당해야 할 목회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일러주신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박정오 목사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한국교회에 만연한 그릇된 신앙적 태도와 위선과 싸우시던 분입니다. 목사님은 제가 성도들과 함께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실천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된지 만 26년이 지나 27년을 향해 갑니다. 과연 저는 그 소명에 충실했던가 돌아봅니다. 모름지기 구원받은 기독교인의 삶의 내용은 생명과 평화여야 한다고 말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목표에 공감한 많은 분들이 우리 여정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시대적 소명에 따라 저를 사용하여 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제가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던 일입니다. 건강의 어려움 때문에 목회자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정도는 제가 타성에 젖었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조금은 젊고 역동적인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지난 1년간 청빙위원들이 고심 끝에 제 후임을 결정하였습니다. 21년 동안 저와 함께 목회를 해온 김재흥 목사가 내년 4월부터 제 뒤를 이을 예정입니다. 그는 우리 교회의 지향과 목표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덕망 있는 목회자입니다. 많은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교회는 주님이 머리이신 교회이고, 각 지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 새로운 땅으로
다시 본문으로 가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서북쪽에 있는 해변 마을로 납달리 지역에 속했고 스불론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유언을 통해 스불론은 “바닷가에 살며, 그 해변은 배가 정박하는 항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납달리는 “풀어 놓은 암사슴이어서, 그 재롱이 귀여울 것”(창 49:13, 21)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곳이고, 풍요로운 곳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그 땅은 ‘그늘진 죽음의 땅’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일까요? 성경에서 ‘그늘’은 이방 통치자들의 지배와 그 부역자들의 가혹한 수탈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로마의 강압적인 통치와 경제적인 수탈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늘진 죽음의 땅’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이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파괴 이후에 쓰여진 책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그늘진 죽음의 땅, 희망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던 그 땅을 성경은 굳이 로마의 식민지 도시로 기술하지 않고, 지파의 이름인 스불론과 납달리로 호명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픔의 땅이지만 본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임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이 하나님이 주신 땅임을 잊지 않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희망을 파종할 용기를 냅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시 16:6)라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척박한 곳이어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면 그곳은 기름진 곳이고 빛나는 유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삶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야말로 주님이 머무시는 땅입니다. 사람들은 ‘그늘진 죽음의 땅’을 회피하지만 주님은 바로 그곳에서 당신의 소명을 펼치려 하십니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마 4:16)

이것은 물론 이사야서 9장 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윤동주는 일제 치하의 억압에 질려 어둠 속에 자기를 가두지 않았습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칠흑 같은 어둠에 짓눌리지 않고 작은 등불 하나라도 밝히는 것, 그것이 윤동주의 다짐인 동시에 신앙인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
주님은 홀로 타오르는 외로운 등불이 되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늘진 죽음의 땅에 머물며 절망과 원망 그리고 어둠에 침잠하고 있던 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등불이 타오르게 하려 하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님이 외치신 말씀은 단순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 마가복음은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 이 말만으로는 주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지가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이런 말씀을 찾아 읽으셨다고 전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

‘가난한 사람’, ‘포로된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 바로 이들이야말로 ‘그늘진 죽음의 땅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들이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뭔가에 붙들린 채 사는 사람들을 일체의 속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누리게 살게 하는 것, 욕심에 가려진 눈을 열어 하나님의 신비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 이런저런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바로 이 마음으로 사는 삶이 빛을 발하는 삶입니다. 작은 시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숙명론을 떨치고 일어나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참된 회개이고,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가 끝내지 못한다면 내 뒤를 잇는 사람이 그 일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도처에서 일어날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8월 06일 11시 54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