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1. 서로의 약함을 호명하다
설교자 이재훈
본문 출 4:10-17
설교일시 202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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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약함을 호명하다
출 4:10-17
(2023/07/30, 성령강림 후 제9주)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고 듣지 못하는 이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모세가 머뭇거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모세에게 크게 노하시어 말씀하셨다.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온다. 그가 너를 보면 참으로 기뻐할 것이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주어라. 네가 할 말을 그에게 일러주어라. 네가 말을 할 때에나 그가 말을 할 때에, 내가 너희를 둘 다 돕겠다. 너희가 하여야 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을 할 것이다. 그는 너의 말을 대신 전달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그리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여라."]

∎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에 기준 하나씩을 세우고 살아갑니다. 사람을 대하거나 세상을 바라볼 때 혹은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준을 가지고 사고하고는 합니다. 사실 사람이 살다 보면, 갖가지 경험들이 쌓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이 세워진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들은 셀 수 없이 많겠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먼저 한 가지는 명확성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정답이 있고, 그 정답대로 세상이 흘러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정보력이 가진 힘이 무척이나 센데, 이 정보력을 이용해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이 외에도 돈이나 인간의 이성, 이단과 같은 종교가 명확성을 내세우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한 가지 기준은 명확성의 반대입니다. 바로 모호함입니다. 세상에는 어떤 분명한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는 바로 이 불명확함 속에 있다는 입장입니다. 아마 삶의 우여곡절을 겪어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고, 다양한 해답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어쩔 때는 해답이라도 주어지면 참 좋으련만, 도무지 답이 내려지지 않는 순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한 우리는 이 모름의 순간을 견디는 것을 무척 힘들어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세상에는 우리의 인식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 모호한 일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 외면되어 온 인간의 모습
세상에는 일찍이 눈을 뜬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생의 이면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위대한 예술가나 작가, 종교인, 철학가들은 일찍이 보이는 것 이면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들은 분명하고, 명확하고, 철저함이 강조되는 세상에서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간직해야 될 요소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외면되어 왔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모호하고 불분명하며 뭔가 고상해 보이지 않는 개념들은 수면 아래에 감춰지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느끼는 감정 가운데에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그리고 뭔가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태도 등은 늘 인간관계에 있어서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내가 쿨(Cool)하고 아주 나이스(Nice)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거나 혹은 쭈뼛대고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려 하거나 혹은 쉽게 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래 내 안에 있는 것들이지만 그러한 모습이나 감정들을 꼭꼭 숨긴 채 자기만의 갑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는 태도 혹은 쿨(Cool) 하지 못한 태도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 인간의 약함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여덟 가지 복의 말씀을 보면, 연약한 자들의 모습이 여러 번 언급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또 주님의 일을 하다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연달아 언급하십니다. 이들은 누가 봐도 온전치 못한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님께 무척이나 소중했는데, 어쩌면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모습이 인간의 본질 다시 말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보여줘서 그렇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한 말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선한 일을 다 마친 후에 오히려 마지막에 가서 자신이 걸려 넘어지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전9:27)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도 다시 한번 자신의 약함을 강조하는데, 그는 만약 자신이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약점 말고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고후11:30).

사실 따지고 보면, 그에게 왜 다른 자랑거리가 없었겠습니까?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권한도 있었고, 자신이 가진 탁월함이나 지식, 능력이 출중했기에 그는 내세우고자 하면 내세울 게 아주 많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 덕분임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잘 포장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약함이 주는 유익을 잘 누렸던 자였던 것입니다.

∎ 사회가 요구한 자아
혹시 여러분께서는 다른 사람이 몰랐으면 하는 자기만의 모습, 그런 모습이 있으십니까? 다들 그런 모습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만은 알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 있으실 겁니다.

사실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와 남들에게 감춰진 나 사이에 어느 정도 간극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열적인 모습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낯선 타인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요소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 올라서야 합니다. 그렇기에 연극이 끝나고 나면, 화장도 지우고 옷도 갈아입는 그런, 무대 뒤편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만약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모습이 균형을 잃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소외나 고립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간극이 자꾸 벌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돌출행동과 같은 이상 반응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황야의 이리>라는 책에서 우리의 자아가 수백, 수천 개로 이뤄져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무의식과 관련된 이야기지만, 우리는 평생을 가도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다 파악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를 좀 더 간단히 구분해보려고 하는데, 먼저 하나는 ‘강한 자아’ 다시 말해, 마치 영화 속 ‘보스와 같은 자아’입니다. 나를 딱딱한 껍질로 감싸는 자아를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의 자아 ‘착한 자아’, ‘연약한 자아’입니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은 이 ‘착한 자아’를 날것 그대로 표현하셨는데 이 ‘착한 자아’를 ‘찌질한 자아’라고 불렀습니다. 찌질하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 무슨 말입니까? 바보를 말합니다. 바보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어보실 것 같습니다. 남들은 다 잘하는 것을 못하는 사람, 무능력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뭔가 빠릿빠릿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러 우리는 찌질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장롱에서 잠자고 있던 운전면허를 청파교회 오면서 꺼내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저도 운전을 꽤 늦게 시작한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 다 잘하는 운전을 저는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저도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한 찌질’ 하는 사람이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자신만 알고 있는 찌질한 모습, 무능력하고, 세련되지 못한 그런 모습들이 없다고 자부하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그런 모습이 없다고,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이나 찌질한 구석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연약하고 찌질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내보였다가는 무시당할까 봐 잘 드러내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 ‘강한 나’, ‘보스와 같은 나’입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요구하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하게 하기 위해 강한 자아를 만들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한 마디로 사회적 자아, 강요된 자아인 것입니다.

∎ 약함을 드러내는 인물들
성경에도 보면, 바울 외에도 연약함이 드러났던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초대 앞에 갈등하고, 번민하며 그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예수님 또한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확신을 가진 그런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력감과 자신의 쓸모없음을 먼저 대면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들에서 양 떼를 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의 불로 나타납니다(출3:2). 그리고는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를 바로(파라오)에게 보낼 것이고, 너를 통해 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좋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곧장 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갖가지 변명을 대며, 주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서 확신이 없었는데, 먼저 한 가지는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었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설득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4:10)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짐짓 겸손한 말처럼 보이지만, 허울 좋은 핑계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모세를 타이르며,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니 담대히 나아가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다시 한번 겸손을 가장한 핑계를 대며 주님의 말씀을 못 들은 채 합니다(13). 그러자 주님은 화를 내긴 하셨지만, 결국 그를 홀로 보내지 않으시고, 형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주님이 도와주신다고 해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도망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뭔가 대단하고 확신으로 가득 찬 그런 인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력감을 느꼈던 사람, 어찌 보면 참 바보 같은 인물이 바로 모세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모세를 벌하지 않으셨는데, 주님은 인간은 갈등하고, 번민하며 머뭇거리는 존재임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지만, 때로 흔들리는 나침반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받을 고난의 잔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같다며 직접적인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하셨습니다(마26:38). 그리고 하나님께는 이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드리기도 하셨습니다(마26:39). 예수님도 육신을 입은 존재였기에 인간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 달팽이에게 일어난 두 가지 변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이렇게 연약하고 불안해하며 때로는 바보처럼 행동하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 안 좋은 모습으로 비칠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반대로 상처 입은 인간의 모습 혹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라 몸과 마음에 가시가 돋아난 모습을 보며 안타깝게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리던 날에 000 권사님과 차를 타고 가면서 ‘비 오는 날이면 뭐 생각나는 게 없나’하는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어떤 대상이나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저는 여름철, 비 오는 날이 되면, 종종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청개구리나 달팽이, 지렁이 같은 친구들입니다. 뭔가 별로 호감이 가는 친구들은 아닌데요. 저는 이러한 친구들 가운데, 특히 달팽이를 자주 보며 자랐습니다. 요즘은 점점 더 보기 힘든 게 이 달팽이기도한데, 징그럽게 생기긴 했지만 잘 보이지 않으니 왠지 좀 그립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갑자기 달팽이 이야기를 꺼냈냐 하면, 아도르노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이 달팽이의 모습에서 사람의 형상을 보았는데, 그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이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라는 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우리는 누구나 처음에 달팽이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이 달팽이 이야기를 좀 길게 해 볼까 합니다.

여러분! 달팽이는 어떤 존재입니까? 자기 집 속에 들어가면, 작은 살덩이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저 살덩이와 같은 이 순박한 존재가 집에만 있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살아가려면, 외부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먹이를 찾기 위해, 자기 집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달팽이가 자기 집에서 나오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아무 걱정도 없이, 아주 부드럽게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 모습에는 어떠한 적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달팽이가 자기 집에서 나왔는데, 마침 여러분이 그 앞에 계신다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달팽이의 느릿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며, 그저 감탄만 하고 계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톡 때립니다. 저도 어린 나이에 얼마나 달팽이들을 톡톡 쳤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달팽이는 그 순간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큰 충격을 받습니다. 최초의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자기 몸으로 들어가서 이게 꿈인가 생신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꿈이겠거니 하며, 다시 밖으로 나오는데, 그러면 누가 다시 한번 이 친구를 톡 때립니다. 그러면 또 놀라며 자기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아 이게 꿈이 아니라 생시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 달팽이에게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먼저 한 가지는 불안입니다. 처음에는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의 일을 겪으며,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변화는 부드러운 몸이 딱딱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순박했던 육체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갑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또 누가 때리면 살짝 피해야지”라거나 혹은 “또 그러면 나도 한 대 쳐야지”하면서 점점 딱딱해지는 것입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바로 이게 우리 인간의 마음이고 육체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한없이 부드러운 존재였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그는 보는 것입니다.

∎ 새로운 가능성을 택하는 삶
참 안타깝습니다. 살다 보니, 사람의 몸과 마음이 순수할 수만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달팽이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집에서 나와야 하듯이, 우리들도 살기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달팽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달팽이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현실을 알게 된 달팽이는 내가 있고,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본래 달팽이의 성향은 착하고 찌질한 모습, 순박함 그 자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두 번 맞고 보니까 이제는 알게 됩니다. 상대가 너무 강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됩니다. 그럼 이제 달팽이에게는 단 한 가지의 목표만이 남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생존욕구입니다. 그는 다른 가능성은 모두 닫고, 오직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욕구만 붙들 게 됩니다.

그런데 더 답답한 사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계략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동경입니다. 강한 대상을 닮고 싶은 동경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도르노는 조금 어려운 말로 연극(미믹/mimik)을 뜻하는 미미크리(mimikry)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상처 입은 달팽이는 자신도 강해지기 위해 강한 대상을 동경하게 되거나 아니면 자신은 너무 약하기에 적이 원하는 대상이 되어 살려는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강한 자아를 형성하게 되거나 혹은 남이 원하는 자아만을 갖게 되는 것! 이 두 가지 동경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현실을 무척 잘 반영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암담한 상황이지만, 달팽이 앞에 다른 길이 마련될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한 것과 관계는 맺되 강한 것과는 무관한 삶 그리고 원래의 연약하고 찌질했던 나를 지속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미메시스(mimesis)의 삶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이 미메시스(mimesis)가 아닌, 순응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미미크리(mimikry)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한평생 몸 바쳐 가르치신 삶이 바로 이런 삶, 새로운 가능성을 택하는 삶이지 않았습니까?

∎ 긍휼히 여기는 마음
사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누구나 참 가엾습니다. 누구나 살라고 부름을 받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안내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자꾸만 구석으로 몰아붙입니다. 더 딱딱하고 날 선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는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어린 존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 안에 있는 이 상처받고 돌봄 받지 못한 영혼을 상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1세기 로마나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보며 특히 더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간들이 본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기쁨으로 살아내길 바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적에게 침범당하지 않고 죽임 당하지 않으려는 로마제국의 그 처절한 생존욕구를 보았고 그리고 그런 로마제국 아래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힘의 논리를 배우려는 가엾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막12:28-31)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한쪽 손은 이웃 사랑을 위한 손이 되어야 합니다. 나눔, 후원, 선교, 봉사 등이 바로 이웃 사랑을 위한 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은 하나님 사랑을 위한 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에 성실히 참석하는 것도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사랑은 누군가의 내면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봐주고 감싸주고 그 형상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상처 입은 영혼이 있음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삶이 너무 힘들다는 핑계로 다른 가능성들은 배제한 채, 강하고 힘센 것만을 동경하며 살진 않았는지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삶은 여전히 모호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삭막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나로 인해 그리고 우리 교회로 인해 세상이 조금은 살만한 곳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7월 30일 12시 52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