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6. 헛되지 않은 수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전 2:1-8
설교일시 2023-11-12
오디오파일 s20231112-2.mp3 [2198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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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지 않은 수고
살전 2:1-8
(2023/11/12, 창조절 11주)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검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마케도니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입동 절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제법 초겨울 느낌이 나는 나날입니다. 스산한 날일수록 마음 따뜻한 이들이 그리워집니다.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해달라던 마종기 시인의 ‘겨울 기도1’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시련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 정도 충격이 표백되어서인지 언론이 덜 주목하고 있지만 전쟁터로 변한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빕니다. 이 난감하고 어려운 시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은 데살로니가 전서를 길잡이로 삼으려 합니다.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교회를 튼튼하게 하던 바울은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한 사람의 청을 듣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유럽으로 선교의 지평을 넓히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를 거쳐 네압볼리로 갔고, 거기서 육로로 빌립보에 들어갔습니다. 로마의 식민 도시였던 그곳에서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귀신에 들려 점을 치는 여종 하나를 고쳐주었다가 그 주인의 모함으로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나 아볼로니아, 암비볼리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올라갔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이자 자유 도시civitas libera였습니다.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데살로니가는 자체적으로 동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로부터 비잔틴에 이르는 로마의 군사 도로인 ‘Via Egnatia’의 한복판에 있었고, 항구도 발달했기 때문에 다양한 문물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이국적인 문화와 축제도 자주 벌어졌고, 특히 디오니소스와 애굽 신들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바울은 세 안식일 동안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전한 메시지를 간략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행 17: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이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듣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가운데는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격분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 사람과 귀부인들은 두 가지 점에서 그들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그 지역 사회와 유대인 사회 사이의 범퍼 구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결고리라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둘째는 회당은 부유한 그들의 후원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회당 공동체를 떠나 바울 일행에 합류하자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다가 패거리를 지어서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바울을 환대한 야손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시청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처벌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행 17:6b, 7b).

너무나 익숙한 풍경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모함을 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이들을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이들, 달리 말해 불순분자로 몰아갑니다. 실은 그건 명분일 뿐이고,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자기들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 왜 사서 고생을 하나?
바울과 실라를 비롯한 전도자들의 삶은 시련과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들이 얻는 유익이 무엇이었을까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르는 곳마다 자기에게 익숙한 가죽 일을 하며 생계를 스스로 벌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2:9). 수고와 고생을 사서 했다는 말입니다. 명예나 권세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는 더 은밀하고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하고 조직화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새로운 일터를 향해 늘 떠나곤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고난과 모욕 그리고 심한 반대였습니다. 바울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살전 2:3).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복음을 성심껏 전할 뿐입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이 그의 동기라면 동기일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 곧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구실을 꾸며서 탐심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부모님이 자녀를 돌보듯 유순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 줄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를 움직이게 만든 내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을 일종의 ‘사로잡힘’이라고 이해합니다. 신학자 Paul Tillich는 믿음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궁극적이라는 말은 ‘극도에 달함’ 혹은 ‘마지막’이라는 뜻이니까 궁극적 관심이란 다른 모든 관심을 부차적으로 만드는 관심이라는 말일 겁니다. 믿음이란 값진 진주 하나를 사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판 상인의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궁극적 관심은 내가 의지적으로 갖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그 궁극적 관심이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아 버립니다. 바울도 동일한 것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 3:12)

예수님의 존재가 그의 마음에 스며들자 그를 온통 사로잡고 있던 마음의 장벽들이 허물어졌습니다. 예민했기에 좀처럼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연하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 분(마 5:45)이십니다. 그 가없는 사랑 앞에 서자 그의 마음에 드리웠던 모든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세상이 돌연 아름다운 곳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경험이 그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게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롬 8:32)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가 아니라 온 존재로 체득했습니다. 그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 뜨거움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모욕과 박해조차 그 열정을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 세상을 이기는 신앙
궁극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는 사소한 문제에 집착합니다. 예수를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무지한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 자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을 모함하고 박해했던 이들은 선민임을 자부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안다는 자부심이 때로는 우리를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해방감을 느낍니다. 자기가 유한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여백이 많습니다. 그는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의 다름을 존중합니다. 존중할 뿐 아니라 기꺼이 그에게 배우려 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던 초대 교회의 아름다움은 이해관계에 충실하던 사람들이 이해를 뛰어넘어 가족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다른 이들이 누리는 기쁨을 조금의 유보도 없이 함께 경축해주고,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려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가족’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범이 됩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합니다.”(4:9-10)

우리 교우 가운데 클래식 음악 연주회를 기획하고 아티스트들에게 공연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회사를 경영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번에 회사 설립 10주년 기념 공연을 기획하면서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공연 수익금 전액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고 싶다며 몇 군데를 추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시설과 쪽방촌에 사시는 분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만 교우들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실천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파괴를 기획하고, 혐오를 선동하고, 사람들을 갈라놓는 이들도 있지만,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사나워져도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 세상이 온통 제 잇속 차리기에 몰두할 때도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세상이 우울함의 늪으로 빠져들 때도 명랑함을 잃지 않고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혐오와 증오의 말이 넘치는 세상에서도 따뜻하고 겸손한 말로 사람들을 북돋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교인들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누군가가 기획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떠올리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살전 2:19-20)

저는 아주 오랫동안 이 말씀 앞에 머물며 제 목회 여정을 돌아보았습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마운 이름들을 떠올리는 일이 요즘 저의 일입니다. 저는 우리 청파 교우들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다.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늘 한 목소리를 내기 때문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도처에서 교회가 추문거리로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 마케도니아는 물론이고 아가야 지방에까지 아름다운 소문이 났던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우리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리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11월 12일 11시 57분 5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