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4. 폭력의 길, 화해의 길
설교자 김형욱
본문 눅 9:51~56
설교일시 2023-10-29
오디오파일 s20231029-2.mp3 [2017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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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시는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올해로 506회째를 맞이했습니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를 세계 개신교인들이 공히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개혁이라는 말

'개혁'이라는 명사 안에는 역동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릇된 것, 부패한 것, 각종 부정과 불의의 벽을 깨는 생명력이 개혁이라는 단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이라는 말에 그와 같은 생명이 살아있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이 도처에 가득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막론하고 너도나도 개혁이라는 말을 자기주장 앞에 세워둡니다. 개혁이라는 깃발을 높이 쳐들기만 하면 개혁이 저 알에서 따라 올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16세기의 신학자이자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가 오늘부터 개혁이란 것을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506년 전 어느 날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아흔다섯 가지 반박문을 내어 걸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루터는 그날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고 교회에 커다란 분란을 일으키기에 너무도 뻔한 그 위험한 일을 도대체 왜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아니, 루터 이전에 이미 14세기의 존 위클리프, 15세기의 얀 후스, 사보나롤라, 에라스뮈스 등 역사적으로 적지 않은 인물들이 개혁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당대 종교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이들의 삶은 고단했고 괴로웠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개혁가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겠으나 저는 이들의 마음에 가득했던 한 가지 있었다면, 그것은 '미안함'이리라 믿습니다. 미안함은 결코 나약한 감정이나 의사표현이 아닙니다. 과거의 개혁가들은 복음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당하는 현실에 대한 미안함, 약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교회가 온갖 권력과 욕망의 투기장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종교와 신앙의 언어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을 공격하고 박해하는 현실 앞에 그들은 미안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이들이 미안하고 죄송하여 얼굴을 들 수 없었던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여 당신의 아들을 주셨음에도 주님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교회에 대한 미안함이 이들을 개혁의 길로 이끌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 아침 우리 속에 미안함이 있는지요.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여러 차례 그리고 열심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안함은 우리 신앙 세계에서 정말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는 것은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미안하다는 것은 나로 인하여 당신이 아픔을 당했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화해와 평화는 각자에 대해 서로가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합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반성과 미안함이 없는 개혁은 너무도 쉽게 상대를 제거함으로 승리를 쟁취하려 합니다. 미안함이 없기에 상대에 대한 배려도, 그의 입장에 서보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개혁도 아니고 옳음도 아닙니다. 정의와 공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폭력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갖고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개혁과 갱신의 길이 상대에 대해 배려와 미안함을 갖춘 화해의 길인지, 나는 옳고 당신은 틀리니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그만이라는 폭력의 길인지 함께 성찰하고자 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움트는 그림자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바로 이전에 일어났던 일련의 장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전에 있었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누가복음 9장 46절부터입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대화가 등장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논쟁 주제가 가볍다면 가볍고 무겁다면 무겁습니다. 바로 누가 더 큰 제자인가라는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내가 더 큰 제자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제자는 내가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더 큰 제자라고 했겠고, 또 다른 어떤 제자는 내가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 더 크지 않겠느냐며 어떻게 보면 조금 유치한 말을 주고받으며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을 테지요. 주님께서 제자들의 이상한 다툼을 가만히 지켜보십니다. 누가는 이 장면에서 "예수께서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라는 말을 기록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에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움트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 사이에 갈등을 해결하셨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곁에 두시고 말씀하시지요.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눅 9:48)

이 말씀을 우리가 조금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표현은 '어린아이와 같아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한다'는 표현은 정확히 말해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마가복음 포함)에서는 누구든지 내 이름,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이 작은 사람, 약하고 때론 어리석고 어쩌면 보잘것없는 사람을 영접하여 맞아들이는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주님 말씀의 해석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습니다. 서로 각자의 이유로 크다고 자랑할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자기를 깊게 낮추고 어린아이같이 작은 자를 환영하고 영접하는 일이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말씀이겠지요. 주님의 이 말씀으로 제자들 사이에 논쟁은 잠시간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피어오른 불길한 그림자는 여전합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시고 다음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막지말아라
시간이 잠시 지난 후, 제자들 사이에서 또 다른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서로 반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었습니다. 개요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도시를 지나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귀사역, 그러니까 귀신을 내어 쫓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당장에 달려가 그 사람에게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면 제자들이 점잖은 모습으로 가서 정중히 제안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무서운 얼굴로 엄포를 놓으며 다시는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다그쳤을 테지요. 한 번만 더 이런 일을 벌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까지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이 사람을 가로막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겠습니까? 누가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눅 9:49)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따르고 우리의 룰에 복종하고 우리의 방식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섬기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제자들의 태도가 일견 납득 가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함부로 사용되거나 남용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잘 타이르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사람을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는 사람, 그러니까 복음의 길을 가로막거나 훼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 이름으로 어떤 사역을 해도 우리 일에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에 어떠한 반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어두운 그림자는 더더욱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 사이의 그림자
저는 이 짧은 두 에피소드가 다음 이어지는 단락과 더불어 누가의 매우 의도적인 배치와 서술이라고 봅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분명히 어떤 좋지 않은 어두움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앞 이야기를 다시 보지요.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논쟁이 일었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논쟁이 일어났겠습니까? 만약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그룹이 어렵고 가난하고 박해까지 받는다면 그 안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이기에 싸움이 나지요.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때론 기적을 베푸시며 그 명성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돈과 물질을 갖다주는 사람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 사건 바로 전에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변화산에서 주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모했음을 제자들이 보았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의 명성과 위세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더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한 높은 자리를 향한 다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역하던 제자 무리 바깥의 사람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껏 명성이 올라 자부심 가득한 제자들이 감히 우리 허락도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으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편이 아니라면 철저히 배제하는 것, 오직 우리 편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아집이 제자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른거리지 않은지요?

꾸짖으시다
제자들 사이에 자라나던 어둠이 비로소 폭발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길 결정하셨을 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야 할 먼 여정 중간에 사마리아를 지나쳐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잘 모시기 위해 사마리아로 먼저 사람을 보내 주님 맞을 준비를 지시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사마리아는 주님 모시길 거부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대 사람들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사마리아의 사정이 어떠하든 간에 지금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거부당했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제자 중에 주님과 가까웠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제안합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눅 9:54)

여러분 요한과 야고보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사람들 불로 태워 죽이자는 겁니다.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에 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의로운 분노로 이 말을 했을까요? 어떤 해석자들은 주님 보시길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하는데요. 아니요. 제자들은 예수라는 허상을 세워두고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우리가 구원자이신 주님을 모시는 데 감히 협조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며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정의로운 일이라면 사람을 불로 태워도 되는 것입니까? 옳은 일이라면 상대방을 몰살해도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과격 무장단체 하마스가 하고 있는 일이 이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벽을 세워 사람을 가두는 일이 이와 다릅니까? 이것이 주님을 섬기고 말씀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정의입니까? 마르틴 루터가 복음의 본질을 세우기 위해 당시 가톨릭을 멸절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역사는 그를 종교 개혁자가 아니라 종교 학살자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정의도 어떠한 옳음도 상대방을 멸절하는 방식으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상대를 죽어도 좋은 악마로 만들어서는 개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악마화한다면 가장 기뻐하는 존재는 악마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즉시 꾸짖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는 꾸짖음의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권위 있는 다른 사본들에는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갖고 계신 성경의 해당 본문 각주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어떤 영에 속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다' (눅 9:55 관주 참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복음의 본질은 사람을 죽이려 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함입니다. 무리 가운데서 높아지려는 마음,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반대자들을 없애려는 욕망은 평화의 길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타자에 대해 미안한 마음, 존중의 마음, 나를 반대해도 넉넉히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화해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철없는 말을 듣고 아프셨을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바로 전에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을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눅9:23). 주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힘의 논리로 평화의 길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엔 수많은 증거가 있지만, 십자가 앞에 순종하신 주님이 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생명과 평화는 화해의 길로 이어져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은 종교개혁을 기념함과 동시에 특별히 더 큰 미안함을 가져야하는 날입니다. 한 해 전 우리는 이태원에서 별빛같이 빛나던 젊은 생명을 너무도 많이 잃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화살을 날렸는지, 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안 그랬다는 말로 숨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교회가 애통해하는 그분들을 위해 설 땅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땅에 떨어지는 지금, 애통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화해의 길을 모색할 때 주님의 평화가 한 걸음 더 가까이 올 것을 믿습니다.

등 록 날 짜 2023년 10월 29일 12시 00분 2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