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3. 포기할 수 없는 평화의 꿈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 33:7-16
설교일시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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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평화의 꿈
사 33:7-16
(2023/10/22, 창조절 제8주)

[용사들이 거리에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평화협상에 나섰던 사절이 슬피 운다. 큰길마다 위험하여 행인이 끊기며, 적이 평화조약을 파기하며, 증인들이 경멸을 받으며, 아무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땅이 통곡하고 고달파 하며, 레바논이 부끄러워하고 메마르며, 샤론은 아라바 사막과 같으며,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이 모조리 떨어진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는 내가 활동을 시작하겠다. 이제는 내가 일어나서, 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 보이겠다. 너희는 겨를 잉태하여 지푸라기를 낳는다. 너희는 제 꾀에 속아 넘어간다. 뭇 민족은 불에 탄 석회같이 되며, 찍어다가 태우는 가시덤불같이 될 것이다. 너희 먼 곳에 있는 자들아, 내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들어 보아라! 너희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깨달아라!" 시온에서는 죄인들이 공포에 떨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사르는 불을 견디어 내겠는가? 우리들 가운데 누가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견디어 내겠는가?" 하고 말한다.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산다. 돌로 쌓은 견고한 산성이 그의 은신처가 될 것이다. 먹거리가 끊어지지 않고, 마실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

∎ 울부짖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분쟁의 땅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도 주님의 손길이 머무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인간이 파괴적인 무기에 의해 잔인하게 스러지고 있습니다. 과격한 무장 정파인 하마스의 선제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이 벌써 두 주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알아흘리 아랍 병원이 공격을 받아 그곳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 50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존귀한 인간의 죽음을 숫자로 환원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을 알지만 이미 팔레스타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의 피해가 극심합니다. 애곡과 비탄, 공포와 두려움이 그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분석 기사가 넘쳐납니다. 그것을 제가 다시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상황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어느 한편에 서서 바라볼 수 없습니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가 철조망과 분리 장벽에 갇힌 거대한 감옥이라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그곳에서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나치에 의해 자행되었던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던 이스라엘 또한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두려움과 두려움이 맞부딪쳐서 폭력과 어둠을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증오는 사실을 압도합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극단주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소모품이나 괴물 취급합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취하는 이방신 몰렉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예전에 부르던 복음성가가 자꾸 슬프게 되뇌어지는 요즘입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이 모든 인간 고통 괴로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

우크라이나 태생의 벨라루스 작가로서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여했던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많은 이들이 전쟁터에는 땅도, 새도, 나무도 다 고통을 당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한 여성은 전쟁에 참여했던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합니다. 꽃은 피고, 새도 훨훨 날아다녔겠지만 거기에 마음을 둘 수 없었던 것일 겁니다. 전쟁에 색채가 있다면 검은색일 겁니다. 거기에 붉은색 피가 더해졌을 뿐입니다. 정찰병으로 근무했던 알렉산드로브나 간티무로바 상사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 세 가지가 있었어. 첫째, 배로 기지 않고 두 다리로 서서 전차 타기. 둘째 흰 빵을 사서 통째로 먹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 침대보 위에서 실컷 자기. 하얀 침대보가 깔린 침대 위에서……”(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p.116)

우리가 무심히 누리고 있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지금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집과 일터를 잃어버린 채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평화가 더욱 절실한 까닭입니다.

∎ 강포한 자의 오만함
난감한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에게 길을 묻습니다. 히스기야 제 14년에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남왕국 유다를 치러 왔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그는 유다의 요새화된 모든 성읍을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더 이상 항전할 능력도 의사도 없었기에 히스기야는 라기스에 와 있는 앗시리아 왕에게 전령을 보내 화친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잘못하였습니다. 철수만 해주시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드리겠습니다.”(왕하 18:14) 매우 굴욕적인 상황입니다. 약소국의 비애가 절로 느껴집니다. 산헤립은 일종의 전쟁 보상금으로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합니다. 한 달란트는 대략 34kg에 해당되는 무게입니다. 금 한 돈이 3.75그램이니까, 한 달란트는 9066 돈이 됩니다. 30달란트가 얼마나 되는지 대충 아시겠지요? 히스기야는 그 요구에 응하기 위해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은을 있는 대로 다 내주고, 주님의 성전 문과 기둥에 자신이 직접 입힌 금까지 다 벗겨서 앗시리아 왕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산헤립은 약속을 저버리고 예루살렘 공격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암담함을 이사야는 이렇게 서술합니다.

“용사들이 거리에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평화협상에 나섰던 사절이 슬피 운다. 큰길마다 위험하여 행인이 끊기며, 적이 평화조약을 파기하며, 증인들이 경멸을 받으며, 아무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사 33:7-8)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강포한 자들은 약자들을 존중할 줄 모릅니다. 평화의 꿈은 강자들에 의해 그렇게 유린되곤 합니다. 땅이 통곡하고 고달파 하고, 비옥한 땅 레바논은 부끄러워하며 메마르고, 샤론은 아라바 사막 같이 변하고, 바산과 갈멜에 있는 나뭇잎이 모조리 떨어집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땅도 나무도 새도 다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절망의 어둠만 지극할 뿐 희망의 불빛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늘 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잠깐 동안은 사람의 뜻이 성취되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끝이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등장했던 모든 제국은 다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오만의 상징인 바벨탑을 허무시는 분이십니다. 계시록은 이것을 아주 선언적으로 표현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은 자기 음행으로 빚은 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한 도시다.”(계 14:8)

∎ 하나님의 개입
오만한 자들은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법입니다(호 8:7). 오만함은 굳어짐이고, 굳어짐은 죽음의 친구입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을 보며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 내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 2:4)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땅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활동을 시작하겠다. 이제는 내가 일어나서, 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 보이겠다. 너희는 겨를 잉태하여 지푸라기를 낳는다. 너희는 제 꾀에 속아 넘어간다.”(사 33:10-11)

제 힘의 강성함을 믿고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화난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을 숭상하는 뭇 민족은 ‘불에 탄 석회’처럼 쓸모없어질 것이고, 찍어다가 태우는 가시덤불같이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판의 때가 이르면 죄인들은 공포에 떨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르는 불을 견디어 낼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산다.”(사 33:15-16a)

누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유다인이라는 혈통 혹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마음에 잇대어 사는가 여부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에 대해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지금 세상 혼란의 태반은 하나님을 오해한 이들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여기는 이들일수록 자기와 입장이 다른 이들에 대해 폭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신’ 하나님을 정말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나와 선 자리가 다르다 하여 누군가를 함부로 심판하고, 배제하고, 억압하고, 폭력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정말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마음조차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더듬어 찾기만 해도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 만남이 우리의 가치관을 뒤흔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지금 우리는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사이에 벌어진 분쟁은 세계가 심각한 분열 속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신 하나님이 서실 자리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여성학자인 현경 교수는 테러리즘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해부해서 몇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 단계는 “나와 많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싫은 감정, 불편한 마음을 키워가다가 그들을 타자, 이방인, ‘왕따’로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러한 “타자들을 극단적으로 소외시키다가 악마화 하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악의 축’이거나 ‘짐승’,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악마는 제거하고 죽여버려야 선이 승리하고 세계의 평화가 온다는 믿음으로 악마화 된 다른 사람들을 영원히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 그러합니다.

그럼 평화는 영 불가능한 것일까요? 현경 교수는 평화의 연금술 역시 세 단계로 요약합니다. 첫 단계는 서로의 진실을 듣고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곡되고 편파적인 정보를 가지고 타자들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부정하지 않고 경청하려 할 때 이해의 단초가 마련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왕따시킨 사람들, 악마화 한 집단들과 친구가 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우리의 다름을 포용하면서 공존·공생·상생할 수 있게 만드는 지혜와 제도를 키워가는 것”입니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웅진지식하우스, p.568-572 참조). 다름을 끌어안을 수 있는 능력이 커질 때 평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러고 보면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유대교의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만나셨습니다. 오죽하면 주님의 별명이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겠습니까? 주님은 미움과 원망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피해자 의식, 희생자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 질서의 단초였습니다. 예수님은 뭇 민족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 행세를 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눅 22:26). 결국 우리가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뿐입니다. 평화의 꿈이 스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 도처에 흩어져 있는 평화의 일꾼들이 평화의 노래를 그치지 않을 때 저 굳센 미움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삶이 무너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과 연대하고 기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의 긴급한 소명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우리를 사로잡아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10월 22일 11시 55분 3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