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4. 서로의 짐을 져주는 마음으로
설교자 김재흥
본문 갈 6:2
설교일시 2023-12-31
오디오파일 s20231231.mp3 [17135 KBytes]
목록

세상 사람들 모두 정답을 알긴 할까
힘든 일은 왜 한번에 일어날까
나에게 실망한 하루
눈물을 보이기 싫어 의미 없이 밤하늘만 바라봐
작게 열어둔 문틈 사이로
슬픔보다 더 큰 외로움이 다가와 ...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옥상달빛이라는 가수의 <수고했어 오늘도>였습니다. 다들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답을 알 수 없고, 힘든 일이 겹쳐 일어나고, 자신에게 실망하고, 때때로 눈물 나고, 슬픔보다 더 큰 외로움을 겪기도 하고, 아무도 나의 슬픔에 관심 가져주지 않던 나날을 잘 견뎌오셨습니다. 그런 우리를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수고했다. 내가 응원한다’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1. 견리망의
교수신문은 올해 2023년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를 꼽았습니다. 이로움을 위해 의로움을 잊었다는 말입니다. 눈앞에 이득 때문에 의로움을 져버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세계가 그러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곡간에서 인심 난다고, 먹고사는 문제가 어려워지자 세계 각국은 자국의 이익 중심주의로 돌아섰습니다. 그 결과 신냉전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중국- 러시아와 미국-유럽이 극한 갈등을 빚고 있고 있으며 전 세계가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자국의 이익 중심주의로 돌아섰다는 것은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한 대의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치인이 본인의 이득을 위해 국민이 부여한 정치적 권한을 오용한 경우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뉴스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정치인뿐 아니라 일반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세사기가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남이야 길바닥에 나 앉든 말든 사기를 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부모의 교권침해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알지 교사 또한 누군가의 귀한 자식임을 생각지 않습니다. 의로움과 바름이 무너진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은 늘 약소국과 약자들에게 먼저 찾아옵니다.

2024년, 가보지 않은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내년에도 세계와 우리사회는 올해와 비슷한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암울하게 한 해가 끝나가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제 맘속에 떠오른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인물은 시지프스입니다. 신이 내린 형벌로 매일매일 똑같이 산 정상으로 커다란 바위를 굴려 올려야 했던 시지프스. 힘겹게 바위를 올려 정상에 서게 되면 그 앞에 새로운 길과 풍경이 펼쳐지고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그 길을 걷고 그 풍경 속에서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바위는 여지없이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 무거운 바위를 힘겹게 다시 산 정상으로 굴려야 했던 시지프스. 시지프스는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2. 가벼운 짐과 무거운 짐
시지프스와 같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거운 짐’은 삶을 무겁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모세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만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다른 인간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은 본 정신을 잃고 변질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계율이 되었습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613개의 계명으로 정리했습니다. ‘00을 하지 말라’가 365개, ‘00을 하라’가 248개였습니다. 그들은 그 많은 율법 조문을 암기했고 그 중 많은 부분을 실천했으며 백성들에게도 그 수많은 계명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종교권력자들이 되었고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난 이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라고 주신 말씀이 사람을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하는 억압의 도구가 되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차별하는 폭력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벼운 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율법은 무겁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사람에게 쉼을 주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계명은 가볍고 편하며 지게 되면 쉼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딱 하나의 계명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무거운 삶을 가볍게, 불편한 삶을 편하게, 쉼 없는 삶을 쉼이 있는 삶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계명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체험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무겁기만 했던 나 자신과 인생이 가볍고 평안해지고, 마음에는 쉼이 찾아왔지요.

3.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초대교회들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사랑의 복음을 다시 무거운 율법으로 바꾸려 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은 바울이 초기에 복음을 전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의 이방인들에게 전한 예수님의 복음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시는 큰 사랑을 보이셨다. 그것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전도자가 왔습니다. 그들은 유대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적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할례를 받으라 강요했습니다. 율법의 식사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정 절기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의 식사법을 따르고,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 소식이 바울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분노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할례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율법 전체를 따라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라고,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예수 믿는 것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할례와 같은 율법적 행위를 통해 의롭게 인정받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이라는 짐을 벗기시고 자유를 주셨는데 왜 다시 율법이라는 짐을 서로에게 지우려 하느냐며 갈라디아 교인들을 꾸짖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에서 이렇게 선언하듯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6장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지침을 여러 개 제시했는데 그중 가장 강조한 것은 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는 일을 그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남의 짐을 져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남의 짐을 져주는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남의 짐을 진다는 것,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미 저마다의 짐을 무겁게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짐을 져준다는 것은 이미 내가 지고 있는 짐 위에 다른 이의 짐을 더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4. 친구, 짐을 져주는 자
작년에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의 일입니다. 운동선수도 아니고 30일만에 800킬로를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걷다가보면 무릎과 발목도 아프고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몸살을 앓기도 합니다. 한 번은 걷다가 발목을 삐어 길에서 쉬고 있는 독일인을 만났습니다. 도와주겠다고 하니, 조금 앉아서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영국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그 독일인이 저희를 앞질러 갔습니다. 그 옆에는 필리핀 신부님이 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 둘은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화하며 꽤 빠른 속도로 걸어갔습니다. 영국 친구와 저는 의아해했습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목이 아파 쉬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잘 걸어갈 수 있을까? ‘같이 걷는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 많은 순례자가 800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힘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은 인종, 국적, 나이, 신분, 성별은 다르지만 서로를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다름보다는 동질감을 크게 느낍니다. 그래서 쉽게 친구가 되고 서로의 어려움을 같이 해결합니다. 빵 하나 가진 이가 빵 없는 자에게 반을 잘라 줍니다. 물 있는 자가 물이 떨어진 자에게 물을 나누어 줍니다. 숙소에 잠자리가 모자를 때는 선뜻 침대도 양보하고 바닥에서 자기도 합니다. 서로 먼저 밥과 음료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다른 이의 물집 터진 발도 자기 발처럼 정성껏 케어해 줍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배낭을 메고 가기 어려워하는 이를 보게 되면 1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선뜻 대신 짊어져줍니다. 물론 자기의 짐을 진 채로 말이죠.

그를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를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짐을 조금도 져 줄 생각 없이, 사랑 없이 그에게 사람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려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율법,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 생각할 때, 그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의 짐을 져 줄 때, 그런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보다 가볍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며 우리 삶에 쉼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모두 시지프스입니다. 매일 하루라는 바위를 산정상까지 굴려야 합니다. 알베르 카뮈는 그 고되고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일을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의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의식만으로는 그 일을 계속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가 시지프스가 아니라 시지프스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과 세상이라는 커다란 바위 앞에 혼자 서 있지 않습니다. 함께 서있습니다. 서로의 짐을 져주려 할 때 바위의 무게는 좀더 가벼워집니다. 인생은 좀더 살만한 것이 됩니다. 인디언어로 ‘친구’라는 말의 뜻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서로의 슬픔과 고통을 등에 지고 가는 친구 공동체’, 특별히 약자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짐을 기꺼이 져주는 공동체, 그것이 예수님이 꿈꾸신 공동체입니다. 우리 청파교회가 더욱 그런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2024년 새해에 우리 청파교회는 두 개의 교회를 새롭게 세웁니다. 은평청파교회와 강서에 숨빛청파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세종에는 세종청파교회가 있습니다. 네 교회가 서로의 짐을 져주는 교회, 친구와 형제자매 교회로 서갈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역에 세워진 교회는 그곳에서 그곳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것입니다. 서로 짐을 져주고, 약자들의 짐을 져줌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감사함 가운데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4년 01월 01일 12시 10분 3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