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 끝까지 견디는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24:9-14
설교일시 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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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견디는 사람
마 24:9-14
(2022/03/06, 사순절 제1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 혼돈의 세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도처에서 일어난 산불로 집과 재산을 잃은 모든 분들, 지금도 공포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순례의 여정 중에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길을 떠나면서 우리는 자선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다짐했습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깊이 자각하는 동시에, 삶의 신비에 눈을 뜨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처형이 예상되는 예루살렘 행을 피하지 않으신 것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증언해야 할 생의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존엄하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류의 역사를 ‘공감 능력의 확대 과정’이라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인권의식이 말할 수 없이 성장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기아나 전쟁 혹은 폭력에 허덕이며 사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을 곤경에서 구해주려는 선한 마음 또한 증대되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정치 행위의 목적은 선하게 사는 것이 쉽고 편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은 분열 속에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주변,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립니다. 성경은 사회가 ‘정의’와 ‘공의’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약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너무 큰 힘을 갖고 약자들을 억압하는 이들의 힘을 약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활동 초반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사명을 세상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 사회가 많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비방과 음해, 조롱과 노골적인 혐오의 표현들이 불꽃이 튀듯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사명 선언을 묵상하면서 어느 후보가 그런 지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야 할 때입니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먼 곳에 있기에 전쟁을 실감하기 어렵지만 이미 많은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러시아 군인들, 우크라이나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피가 땅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이 사람들의 피로 물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출신 운동선수들도 운동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전투에 나서고 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악기를 내려놓고 자기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전투 중에 사망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아비소스의 문이 열리려는 찰나입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고, 중립 노선을 취하던 핀란드와 스웨덴, 스위스도 어떤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핵 위협도 현실적인 공포가 되어 다가옵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 동참하는 나라가 늘고 있고 우리 또한 그 대열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경제계에 큰 위기가 닥친 셈입니다.

• 희망은 죽지 않는다
그렇지만 희망의 조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의 뜻있는 많은 시민들이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반전 시위에 나서고 있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이 그들과 연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이 살벌한 역사의 겨울에도 봄을 선구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7-80년대에 예배실과 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던 찬송가 336장이 제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라는 가사가 어려운 시절을 살던 우리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곤 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와 평화와 생명의 존엄을 일깨우는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봄을 선구하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어제는 경칩(驚蟄)이었습니다. 땅 속에서 동면하던 동물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이 무렵이면 늘 떠오르는 글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통해 민족혼을 깨웠던 김교신 선생님의 ‘조와弔蛙’라는 글입니다. ‘개구리를 애도함’ 정도의 뜻으로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선생은 바위들이 병충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 가느다란 폭포 아래에 형성된 작은 물웅덩이 옆에 있는 평편한 바위를 기도처로 삼고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올리다보면 개구리 몇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늦가을이 되어 엷은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개구리의 기동이 완만해지고, 마침내 두꺼운 얼음이 얼면 기도 소리, 찬송가 소리가 들려도 개구리들은 기척조차 없었습니다. 이듬해 봄, 봄비가 쏟아지던 새벽에 선생은 개구리의 안부가 궁금하여 허리를 굽혀 웅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개구리 사체가 몇 개 보였습니다.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개구리들이 다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선생은 개구리 사체를 수습하여 땅에 묻어주고 혹시 살아남은 게 없나 싶어 자세히 웅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개구리 몇 마리가 살아 있었습니다. 선생은 가볍지 않은 영탄으로 이야기를 마칩니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글은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일제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아 봄을 맞이하는 개구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성서조선>을 폐간시키고 맙니다.

혹독한 추위를 끝끝내 견디다가 기어코 봄을 맞이하는 개구리의 모습은 생명의 장엄함을 보여줍니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정원이나 길가에 돋아나는 새싹을 보며 기뻐합니다. 굳은 대지를 뚫고 돋아난 새싹은 여리지만 강합니다. 전쟁, 폭력, 테러가 아무리 판을 쳐도 인간애의 불꽃, 양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면 세상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 하겠습니다.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죽음의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의 모습은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불꽃도 끄지 않으시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주님(사 42:3)께서 평화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 진통의 시작
예수님은 두려움의 나날을 견뎌야 하는 제자들을 보며 안쓰러워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 24:4). 혼란의 시대일수록 속이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구원자를 자칭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마 24:11-12) 그들은 불확실한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 도무지 열리지 않는 인생의 문 앞에서 좌절한 사람들, 끈 떨어진 연처럼 외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럴 듯한 말과 친절한 몸짓으로 그들을 유혹합니다. 미혹된 이들은 그 속에서 고향과 같은 안온함을 느낍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자기들의 교리의 틀 속에 가두어 반사회적 존재로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을 이상화하거나 신비화합니다. 광신적인 믿음에 사로잡힌 이들은 차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합니다. 결국 그들은 가족들과 불화하고, 시민적인 삶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조종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이들은 악마적 존재들입니다. 참된 종교는 사람을 조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뭔가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풀어주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게 합니다.

지금은 ‘사랑이 식은 시대’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나오는 말세의 징조를 요즘처럼 실감하는 때가 없습니다. 몇 가지만 보아도 우리 시대의 자화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무정하고, 비방하고, 절제가 없고, 난폭합니다. 배신을 서슴지 않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어느 시대든 이런 경향이 없던 시대는 없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때가 또 있었나 싶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거슬러 일어나고, 민족이 민족을 거슬러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받고, 기후 재앙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극복해야 할 위기가 닥쳐왔건만 사람들은 그 현실은 외면한 채 지금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합니다.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미국 영화 ‘Don’t look up‘은 거대한 혜성 하나가 지구와 충돌하는 궤도에 진입했음을 발견한 천문학자들이 지구 멸망을 예감하며 다급하게 경고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보자‘고 말할 뿐 대책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자기들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는 데 이용하려 합니다. 우리 시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늘 하늘에 길을 묻는 사람들입니다.

• 풀과 바람처럼
환난의 때일수록 예수 정신을 올곧게 붙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예수 정신은 곧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들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아픔이고 아픈 상처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는 경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일찍이 히브리의 지혜자는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도 그러하다고 말했습니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 1:8).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 세계를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a), 곧 환등 혹은 주마등(走馬燈)에 빗대 설명합니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이미 있던 것을 기술의 힘으로 화장을 고치고 재등장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도자는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그 실상을 꿰뚫어보아야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고(롬 12:2)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길들이려 하지만 한사코 길들여짐을 거부할 내면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입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제게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시인 김수영의 마지막 시(1968. 5. 29) ‘풀’이 떠오릅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바람과 풀은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람은 풀을 세차게 흔들지만 풀은 그 바람 때문에 더욱 뿌리를 든든하게 내립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르고 풀뿌리가 눕는다”. ‘눕다’와 ‘일어나다’, ‘울다’와 ‘웃는다’가 맞물리고 있습니다.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시련의 시간도 있지만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생명을 이어가고, 눈물의 시간도 있지만 다시 웃음을 짓고 일어서는 것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의 시간에도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하고, 인정의 불모지에도 사랑의 씨를 심어야 하고, 전쟁의 땅에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늘 나라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낡은 시대 정신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3.1 독립선언문은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침략주의, 강권주의는 청산되어야 할 낡은 세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색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 때의 형세”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겨울 한복판에 봄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지치지 않으려면 함께 길을 가는 동료들을 신뢰해야 합니다. 일곱 번 넘어지면 일곱 번 일어설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이들의 태도입니다. 봄이 되어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를 통해 역사의 새 봄이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3월 06일 11시 23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