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2. 선한 일에 전념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딛 3:3~11
설교일시 2022-10-16
오디오파일 s20221016-2.mp3 [5136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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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일에 전념하라
딛 3:3-11
(2022/10/16, 창조절 제7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미혹을 당하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참됩니다. ○나는 그대가, 이러한 것을 힘있게 주장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에 전념하게 하기 바랍니다. 선한 일은 아름다우며, 사람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관한 싸움을 피하십시오. 이것은 유익이 없고, 헛될 뿐입니다.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은 한두 번 타일러 본 뒤에 물리치십시오. 그대가 아는 대로, 이런 사람은 옆길로 빠져버렸으며, 죄를 지으면서 스스로 단죄를 하고 있습니다.]

• 버림과 붙잡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온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여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이 기적이고 복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가슴 깊이 다가오는 나날입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시 16:2-3). 이런 기쁨과 행복이 있기에 우리는 암울하고 어지러운 세태 가운데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네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보다 떠날 때의 세상이 더 아름답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 ‘티쿤 올람tikkun olam’입니다. ‘세상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고 남북 간의 긴장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대화의 길이 막혔습니다. 세계도 요동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 모두가 자기가 심은 포도나무 열매를 따먹고,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사는 세상의 꿈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분열된 세상에서 우리는 화해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소명에 따라 살려면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날카로운 것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김준태 시인은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시에서 땅 위에 살아있는 것들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우리 현실을 안타까워합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 기울이자”

우리가 도무지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흐르는 강물에 발이 좀 젖으면 어떻습니까? 먼저 우리 가슴에 깃든 날카로운 칼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땅 위의 칼들도 녹슬게 됩니다. 누군가를 베고 찌르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달팽이 풀여치 장구벌레 물새 등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세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신중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전우익 선생님은 ‘모든 참된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할 때 삶이 누추하고 무거워집니다. 붙잡아야 할 것을 꼭 붙들지 않을 때 삶은 경박해집니다.

• 옛사람
새로운 삶은 언제나 옛 삶과의 결별을 통해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이제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권고합니다(롬 13:12). 그가 말하는 빛의 갑옷은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지으심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엡4:22-24).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부정적인 계기들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단어를 죽 열거할 때 사람들이 그 하나하나의 심각성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갔을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비슷한 유물들이 너무 많이 전시된 것을 보자 자세히 보기의 욕망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사유를 위한 여백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지요? 텍스트의 경우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열거된 악덕들은 하나하나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몸에 달라붙어 마치 피부처럼 우리 일부가 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음’(anoētos)은 ‘깊이 생각하다’, ‘마음으로 깨닫다’는 뜻의 헬라어 noeō의 부정형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정보를 분석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견해를 따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대세를 따르는 게 처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게 어리석음입니다. 순종하지 않음(apeithēs)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도 않고 귀 기울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듣지 않는 것은 마음에 고요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대면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서도, 지진 속에서도, 불 속에서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후에 그는 비로소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용한 소리(dᵊmāmâ)는 침묵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속에서 들끓던 것이 잠잠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말씀과 만나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그것이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그 말씀을 한사코 듣지 않으려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 욕망을 거스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음의 씨가 자라 순종하지 않음이라는 싹이 틀 때 우리 영혼은 허망한 것에 이끌립니다. 그것이 바로 ‘미혹 당함’입니다. 미혹된 영혼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어둠 속으로 달아납니다. 어둠은 우리의 도덕 감정을 마비시키거나 가려줍니다. 정욕을 따라 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정욕은 ‘끝없는 욕망’입니다. 정욕에 사로잡힌 영혼은 감각적 즐거움을 탐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허망합니다. 잠언은 정욕에 따라 사는 이들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불을 가슴에 안고 다니는데 옷이 타지 않을 수 있겠느냐? 숯불 위를 걸어 다니는데 발이 성할 수 있겠느냐?”(잠 6:27-28)

허망한 열정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은 악의와 시기심으로 이웃을 대합니다. 그래서 미움을 받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옛 삶의 관습을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불에 탄 옷을 입고, 성하지 못한 발을 가지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주님의 은총 앞입니다. 그 앞에 엎드려 우리의 비참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 구원의 신비
하나님은 솔직하게 자기 참상을 인정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더러워진 발을 닦아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죄로 인해 얼룩진 우리 마음을 씻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에스겔도 그 구원의 신비를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겔 36:25-27)

물을 뿌려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신 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주십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사람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옛사람은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노자, <도덕경>, 76장)라고 말했습니다. 초목이나 인체만 그런 건 아닙니다. 사상도 종교도 정치도 굳어지면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그들의 굳은 얼굴 표정이 영혼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온유하고 따뜻하고 겸손한 얼굴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이란 어떤 걸까요? 자기를 너무 고집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예민함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옛 삶의 인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욕망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미혹하는 이들의 노래에 이끌려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욕망의 수레바퀴를 굴리느라 지쳤으면서도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좇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돈이 많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신화에 많은 이들이 사로잡혀 삽니다. 돈은 편리한 도구이지만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돈이 많아도 정신이 빈곤하면 그는 불행합니다. 정신이 빈곤한 이들은 다른 이들을 환대할 줄도 모르고 공감할 줄도 모릅니다. 따뜻한 사랑과 이해가 우리의 오아시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입니다.

• 구원받은 이의 삶
믿는 이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널리 알려진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동료와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다른 고수敲手의 북소리를 듣기 때문일 것이다”(<월든>, 18장, 맺는말, 신재실 옮김, 삼협종합출판부, p.424/If a man does not keep pace with his companions, perhaps it is because he hears a different drummer).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의 북소리에 발맞추어 산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연약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심정을 모른다면, 맨 나중에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일꾼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른다면 우리의 믿음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의 북소리에 따라 발을 맞추느라 정신이 팔려 이미 선물로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정말 기적들 사이를 앞 못 보는 사람처럼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까닭은 우리를 불법(anomia)에서 건지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도덕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선한 일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b). 다른 이에게 삶의 기쁨을 더해주려는 마음, 인생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선한 일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갈라놓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만나 함께 기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자기로부터 자꾸만 벗어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기 상처만 바라보는 이들은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비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상처를 싸매 주기 위해 내 몸에 감았던 붕대를 풀 때 오히려 우리 영혼에 새 살이 돋아납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 사도는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율법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싸우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소한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사랑을 저버리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요? 믿음의 사람들은 선한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망가진 세상, 사람들이 온통 신기루 같은 행복을 찾아 방황하는 세상을 치유하자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온 세상을 밝힐 수는 없어도 우리 주변을 밝힐 수는 있습니다. 작은 희망과 환대의 공간을 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야말로 새벽별과 같은 이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일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0월 16일 12시 03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