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3. 기드온의 번제
설교자 이범석
본문 삿 6:25-35
설교일시 202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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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드온의 번제 >

사사기 6:25~35

(2022 08 14 / 성령강림 후 10주)

[25   그 날 밤에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의 외양간에서 어린 수소 한 마리를 끌어오고, 또 일곱 해 된 수소도 한 마리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 상을 찍어라. 26   그런 다음에 이 산성 꼭대기에서 규례에 따라 주 너의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고, 찍어 낸 아세라 목상으로 불을 살라 번제를 드려라." 27   그리하여 기드온은 종들 가운데서 열 명을 데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집안 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일을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야 하였다.28   다음날 아침 일찍 성읍 사람들이 일어나 보니, 바알 제단이 헐려 있고, 곁에 서 있던 아세라 상은 찍혀 있었으며, 새로 만든 제단 위에는 둘째 수소가 번제로 타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29   "누가 이런 짓을 하였느냐?" 하고 그들은 서로 물어 보았다. 그들이 캐묻고 조사하다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30   그래서 성읍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아들을 끌어내시오. 그는 죽어야 마땅하오. 그가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에 서 있던 아세라 상을 찍어 버렸소."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바알의 편을 들어 싸우겠다는 것이오? 당신들이 바알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오? 누구든지 그의 편을 들어 싸우는 사람은 내일 아침에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만일 바알이 신이라면, 자기의 제단을 헌 사람과 직접 싸우도록 놓아 두시오." 32   그래서 그 날 사람들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다. 그가 바알의 제단을 헐었으니, 바알이 직접 그와 싸우게 하라는 말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33   그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사막 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평지에 진을 쳤다. 34   주님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으니,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 족을 모아 자기를 따르게 하고, 35   전령들을 온 므낫세 지파에 보내어 그들도 자기를 따르게 하였으며, 아셀 지파와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도 전령들을 보내니, 그들도 그와 합세하려고 올라왔다.” ]


* 사사 시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비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내일은 광복절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제 강점의 어둠을 몰아낸 지 벌써 일흔일곱 해가 흘렀습니다. 광복, 문자 그대로, 빛 광, 회복할 복입니다. 두 한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저는 조심스럽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 빛을 회복하며 그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은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보다 풍족하게 사는 국가가 몇 되지 않습니다. 근 삼사십 년 만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복고풍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요즘 청소년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진짜 저렇게 살았어요? 다른 나라 아니에요? 라고요. 이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내신 어르신들은 그 변화와 발전이 참 감개무량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간 기록적인 폭우가 드러낸 우리 사회의 실상은 속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2022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이 죽고 다친다는 것이, 참 가슴 아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모순을 잘 알고 있기에, 이 놀라운 풍요 속에서도,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짜증이 가득한 것 아닐까요? 극과 극을 오가며, 한탄과 증오를 쏟아내고, 서로서로 스트레스를 주고받는 것 아닐까요? 여전히 심각한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고, 여전히 목마르고, 궁핍한 것 아닐까요?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갈등 지수가 세계에서 최상위권이라고 합니다. 특히 빈부 격차, 성별 갈등, 세대 갈등 등이 매우 높습니다. 반면, 갈등 관리 능력은 OECD 국가 하위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시대 스케치 앞에 서서, 우리는 진정 어떻게 빛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성경인 사사기의 시대가 지금 우리 시대와 참 닮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압제자 이집트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광야는 사십 년 긴 세월을 집어삼킵니다.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곧바로 새로운 낙원에 들어갈 자격이 갖춰지지는 않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광야의 힘겨운 세월이 지난 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마침내 들어가 정착합니다. 그곳에는, 포도원과 밀밭,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대추야자 나무가 가득한 산, 양 떼를 키우기에 좋은 초원과 샘물이 있었습니다. 이젠 풍요를 누리면서, 만족과 감사가 넘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삿6:1)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벗어났고, 주님의 마음 밖에 서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만족과 풍요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습니다.
모압, 하솔, 미디안, 아말렉, 암몬, 블레셋 등등 때마다 이런저런 외세가 번갈아 가며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지혜롭게 대응할 때도 있었지만, 상당 시간은 외국의 압제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들을 피하고자 “산에 있는 동굴과 요새에 도피처”를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애써 심은 씨앗의 소산을 그들이 빼앗아 가거나 망쳐버리기도 했습니다. 억울하게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주님의 빛이 기드온의 마음에
하나님은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를 세워주셨습니다. 사사는 지도자로서, 폭력적인 약탈자들을 몰아내고, 백성 사이의 여러 갈등을 중재하고 재판을 주재했습니다. 그중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드온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시지요. 아마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 이야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꽤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오늘 그 기드온 사사의 초기 이야기를 세 부분으로 구분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기드온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의 아들입니다. 아마 막내아들인 것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수시로 약탈당했습니다.
기드온은 숨어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면 다 빼앗길 테니까요. 이 얼마나 처량한 꼴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추수 때는 축제의 때요, 감사 제사를 올리는 때입니다. 그런데 일 년 동안 땀 흘린 열매를 거두며 기뻐하기는커녕, 외세의 눈길을 피해 몰래 숨어서 타작하는 겁니다.
그때 기드온에게 주님의 천사가 찾아옵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꼴이 속상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의 천사에게,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선조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는데, 도대체 그 기적은 어디에 있느냐고,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셔서, 미디안에 넘기신 것 아니냐고, 푸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삿6:14)
주님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여전히 미래가 미덥지 않습니다. 그는 므낫세 지파에서도 가장 약한 가문에 속한 가장 어린 사람일 뿐이라고 자신을 규정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약속을 하나 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삿6:16)

기드온은 약속을 보증하는 확실한 증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염소 새끼 한 마리로 요리를 만들고, 무교병을 만들어, 천사에게 가져옵니다. 천사는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을 그 위에 부으라고 합니다. 그대로 했더니, 천사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빵에 댑니다. 그러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빵을 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천사는 홀연히 사라집니다.
기드온은 깜짝 놀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사를 보내셨음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떨면서, 주님을 뵈었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제단을 쌓아 바칩니다. 그 제단의 이름은 주님은 평화, 즉 ’여호와 샬롬’이라 불렀습니다.
저는 여기까지가 기드온의 사사 인생, 첫 단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출애굽의 기적은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는 걸 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가나안 이민족을 두려워하며, 그 지방의 세태와 풍요의 신들을 섬기며, 동화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우상에 얽매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던 기드온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고, 민족 구원의 소명을 불러일으키신 겁니다. 마치 떨기나무에 불을 일으키고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바위에서 불을 일으키며 기드온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불꽃이 기드온의 내면에 당도하였습니다.
기드온 역시 모세처럼 자신의 약함을 변명하며, 감당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강한 능력을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 또렷한 믿음과 정성 어린 헌신을 사용하시는 분인 걸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어쨌든 그는 떨면서, 주의 천사를 뵈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기드온 마음의 중심에 희미했던 하나님의 존재가 이 사건으로 분명하게 새겨졌고, 그는 마음으로 주님을 시인하는 믿음의 첫걸음을 뗐습니다.

* 주님의 불, 믿음의 행위
하지만 그는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주님을 만나 뵙고, 그분께 약속받은 건, 참 좋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주님의 일을 하기에는 아직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주님께서는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일곱 해 된 수소 한 마리를 끌어다가, 아버지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아세라 상을 찍어내어, 산성 꼭대기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찍어 낸 아세라 목상을 땔감 삼아 번제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바알 제단을 허물라니요?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요? 그는 아버지 집안 사람들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일을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야 했습니다.

한 인물이 세워져 가는 과정을 참 멋지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드온은 앞서 지팡이 끝을 대자, 불이 바위에서 나온 장면에서, 이미 주님의 천사를 대면하여 뵈었다고 고백하며, 제단까지 세웁니다. 그는 천사가 전한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혼자 개인적으로는 분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사람들 앞에서 감히 나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그런 이적을 베풀어 주셨는데도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지팡이를 대어, 바위에서 불이 일어난 이적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들을 우리도 이미 체험했지만, 이후 우리의 믿음의 진보는 느리고, 사랑의 수고는 지지부진하곤 하지 않았습니까.
자녀를 키워 보신 분들은 대개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갓난아기가 열이 펄펄 나서, 해열제를 먹여도 도통 떨어지지 않고, 애는 계속 서럽게 울며 보챌 때, 밤에 아이를 들쳐 안고, 응급실로 데리고 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아이를 낫게만 해주시면, 제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뭐든 하겠다고요. 살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너무나도 여러 번 놀라운 응답을 받으며 감사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닙니까.

중요한 점은, 기드온이 두려워서 밤을 틈타 몰래 하긴 했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명령을 실제 감행했다는 사실입니다. 네. 그는 자기가 한 일이 어떤 파장을 낳을지 알기에 두려워 떨면서도, 감히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기드온은 그의 마음뿐만 아니라, 온몸이 하나님께 붙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드온의 사사 인생 제2막이 멋지게 올라간 겁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불은, 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됩니다.
불의 속성을 생각하면,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불은 사물을 태웁니다. 그래서 성경의 불은, 정화, 또는 심판과 파괴의 의미가 있습니다. 악한 것을 태우는 겁니다. 예수님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태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알곡은 남기고, 쭉정이를 태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내면의 악한 마음을 태우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불입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 소돔을 태우듯이 심판의 불이 내려올 것이라고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상을 심판하고 파괴하는 불이 되기도 합니다.
불은 태울 뿐만 아니라, 환히 밝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불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은 사도행전에서 불의 혀와 같이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종종 불의 형상으로 드러납니다. 불은, 어둡고 차가운 세상을 비출 빛과 온기, 열정 등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공생애 내내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또 지르셨습니다. 하지만 가슴에 조금 타오르다가, 온몸으로 옮겨지지 않아, 그 불꽃을 사그라트려 버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기드온이 밤에 아세라 목상을 땔감 삼아, 하나님께 번제를 올린 건, 작은 불꽃이 큰불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심판과 소멸의 불이요, 임재와 새 역사의 불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불꽃이 어둠 가운데 있는 기드온의 마음에 임했고, 기드온은 그것으로 사건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의 불, 예수님께서 세상에다가 지른 불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그냥 사그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음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불을 지르셔도, 사람이 그걸 받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마 복음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 나에게 가까이 있는 자는 불에 가까이 있는 것이요, 나에게서 먼 자는 왕국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자니라.”(도마복음 82)

주님의 불, 즉 초대의 말씀,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불씨를 마음에 품고 머물러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중히 들고 일어설 때, 기드온처럼 몰래 타작하는 이에서, 두렵지만 밤을 틈타서라도 바알 신당을 허물고 아세라 목상을 태워 주님께 번제를 올려드리는 이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세상의 방식에서 동떨어질까 봐 여러모로 두렵지만, 그래도 마음에 심어진 하늘의 불씨를 품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동으로 감히 옮기는 이입니다.

* 바알과 맞붙은 자, 여룹바알
아침이 되자, 성읍 사람들은 바알 제단이 헐리고, 아세라 상이 찍혀 있고, 새로운 제단에 번제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걸 봅니다. 세상의 문법에 자기 욕망을 포장해서 삿된 삶을 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그들은 이 사태의 행위자를 캐물어, 기드온 짓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요아스에게 아들을 내놓으라고, 그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달려듭니다. 의외로 요아스는 아들의 안위를 생각해서인지, 바알이 그를 직접 심판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목숨을 건진 기드온은 이제 ‘여룹바알’이라 불립니다. 바알 제단을 헐었으니, 바알이 직접 그와 싸우게 하라는 말에서 그렇게 부른 겁니다. 이렇게 기드온은 점차 한 명의 지도자로 세워져 갑니다.

때마침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사막 부족이 모여서, 이스르엘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때 주님의 영이 기드온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기드온의 사사 인생 세 번째 단락이 시작됩니다. 그는 이전의 기드온이 아닙니다. 두려워도, 하나님의 일을 감행하면, 그 뒤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그는 밤을 틈타서 제단을 세우는 존재에서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용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드온, 아니 여룹바알은 밤의 어둠 뒤에 숨지 않고, 환한 낮의 사람으로 당당히 나서서, 온 므낫세 지파를 모읍니다.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도 모읍니다.

그는 다시 한번 주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참으로 주님께서 자신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구하려 하시는지 묻습니다. 양털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 뭉치에만 내리게 해 달라고 청하고, 다음 날에는 뭉치만 빼고 땅에 내리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은 그대로 해 주십니다.
기드온, 즉 바알과 싸웠던 여룹바알은 군대를 거느리고 진을 쳤습니다.
주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떨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돌아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만 이천 명이 되돌아가고 일만 명이 남았습니다.
주님은 아직도 수가 많다며, 물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손으로 물을 움켜 핥아 마신 삼백 명만 뽑고, 무릎을 꿇은 나머지 구천칠백 명은 돌려보냅니다.

기드온은 남은 삼백 명을 세 부대로 나누고, 각 사람에게 나팔과 빈 항아리를 손에 들려주고,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적진의 사방을 둘러싸고, 그들은 항아리를 깨뜨려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나팔을 들고 불면서, ‘주님 만세! 기드온 만세!’ 외쳤습니다.
적군은 아우성을 치며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추격하여, 그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던 기드온이 하나님의 전쟁을 마침내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상황을 불평하고 한탄하던 기드온이 주님의 불을 만나서, 그 마음이 변하며,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눈앞의 방해와 고난이 뻔하고, 자신도 두려움에 떨리지만, 그래도, 감히 주님의 옳은 일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룹바알이 되었고, 마침내 한 명의 이스라엘 사사로서 민족을 이끌고 전쟁을 승리로 마감했습니다. 우리도 여룹바알의 삶을 살아내라고 부름 받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 ‘눈 감고 간다’로 오늘의 말씀을 갈무리하려 합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윤동주 ‘눈 감고 간다’)
세상에 여전히 어둠이 지극하지만, 주님의 빛을 사모하며, 온 마음이 환해진 우리는 이 어두운 밤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 밤의 어둠에 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밤을 품고, 주님께서 주신 불꽃의 힘으로 우리는 과감하게 나설 수 있습니다. 넋 놓고 그냥 머물며 사그라들어 꺼지는 유약한 불씨가 아니라, 온몸에 환한 빛을 품고, 아세라 목상을 용감하게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어두운 길을 밝히며, 우리가 가진 바, 아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그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면서, 우리 모두 힘차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사랑의 하나님, 시대를 불평하던 기드온이 주님의 불꽃을 받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회복하고, 두렵지만 용감하게 주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여룹바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민족을 위하여, 삼백 명의 용사를 이끌고 나서서 승전하였습니다. 주님, 우리도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불꽃으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이 땅의 아세라 목상을 태우고,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8월 14일 11시 54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