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할 안전지대
눅 7:31-35
(2024/08/25, 성령강림 후 제 14주, 왕국절 시작)
[“그러니, 이 세대 사람을 무엇에 비길까?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가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
* 다른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
주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화재와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신음하고 있는 피조세계를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우리는 교회력의 가장 긴 절기인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딱 중간에 ‘왕국절’이라는 절기가 시작됩니다. 왕국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며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정신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오늘부터 왕국절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왔다는데, 여러분은 그 평안을 느끼며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 같은 기분을 좀 느끼며 사셨습니까?
1년 전인 2023년 8월 24일에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오염수를 방류했습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오염수 방류 때문에 세계가 시끄러웠습니다. 우리나라 수산물 업계도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했고, 실제로 한동안 수산시장에 발길이 끊겼다는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적어도 제 주변에선 해산물을 먹을 때 오염수 방류를 걱정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사람 마음이 참 단순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당장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오염수 방류에 여러 우려가 있었음에도 바다로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선택은 가장 값싼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제적 손실을 조금 본다는 선택 때문에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후쿠시마 원전에 빗물과 지하수가 유입되며 연료봉의 잔해물과 만나 매일 90~140톤에 이르는 오염수가 새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염수가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연료봉의 잔해물을 모두 제거하는 일입니다. 핵연료 잔해물에서는 매우 높은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들어가면 수분, 내에 사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봇팔을 이용해 조금씩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잔해물 880t 중 3g 시험 추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앞으로 이 원전이 언제 폐로 될지, 오염수 방류를 언제까지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장에 오염수 방류가 일으키는 파장을 우리는 느끼지 못합니다. 오염수 방류를 선택한 이들이 살아있을 때는 오염수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에 오염수가 흘러드는 것은 자연의 흐름이 아니고 매우 인위적인 행동이기에 생태계에 어떤 균열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인간은 금전적 이득을 위해 환경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와중에도, 못 알아듣는 척하고 있습니다. ‘인간이야말로 고등생물’이라는 착각 때문에 자연 위에 군림하여 마주 짓밟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별에 태어나 잠시 살면서 자연환경을 빌려 쓰다가 가는 것인데 빌린 것을 다 부수고 돌려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은 자연을 대할 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물질적, 사회적 이익에 따라 구분하여 대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과 ‘나에게 쓸모없는 사람’. 이런 구분을 하는 세상에서는 편안한 숨 한 번 내쉬기 어렵습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마음 편히 숨 돌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꿈꾸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왔고 또 아직 오지 않았다 말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기에 이 세상이 완전을 향하여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가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던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놓고 보았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더 아파지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곳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사랑, 평화, 정의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는 하나님 나라처럼 지내고 있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실상을 폭로하고, 심판 이후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내내 등장했던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살아내셨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으로 가 생명을 주셨고, 평화의 부재 속으로 뛰어들어 평화를 이루어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세상 속으로 뛰어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은 그 세상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눅 7:32)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음악, 특히 피리가 결혼식과 같은 축하 행사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결혼식은 개인이 아닌, 온 마을의 축제였기 때문에 피리 소리는 공동체의 기쁨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피리를 불면 이웃들이 춤을 추며 기쁨에 동참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웃의 축하할만한 일을 무시하거나, 축하를 거부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례식이나 공동체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통곡하거나 함께 우는 것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실제로 집단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전문 애도인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울거나 애도하고 있다면 이웃들이 함께 울며 슬픔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이해가 있는 와중에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것은 이웃의 슬픔에 대한 무관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웃의 경계
그렇다면 이 당시 사람들이 이웃의 기쁨에 무감각하고,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비인간적이고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이었을까요? 물론 타자의 감정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공감의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격 장애를 꼬집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피리 소리에도 함께 춤추지 않고, 애곡하는 소리에도 함께 울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 피리를 불고 애곡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각자 기준은 다르겠지만 내 이웃, 내 공동체, 내 사람을 정해놓는 것입니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꾸려진 이웃의 범주에선 이들도 얼마든지 함께 기뻐하고, 함께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과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만 이웃이고, 그 이외에는 다 걸림돌이고 도구이기에 그들에게 공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 시대만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거칠기를 따진다면 현대인들이 예수님 당시 사람들보다 훨씬 거칠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는 내 이웃이 아닌 이들의 피리 소리를 무시하고, 슬픔에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별 다른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설정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웃에 속해있으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자꾸 편안한 곳에 있고 싶어 합니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있고 싶고, 불편한 상황은 도무지 맞닥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이웃을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 설정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를 내 이웃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일상생활에도 있지만, 하나님 나라 구성원이 누구일지를 떠올릴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산이 평탄해지고, 골짜기가 메워지고, 아픈 사람이 낫고, 저는 자가 일어나고,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고, 귀신이 쫓겨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곳이라 묘사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나라는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고, 온갖 “안 좋다”라고 여겨지는 것은 다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완전한 선으로 가득 차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안 좋은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안 좋은 것과 좋은 것을 나누다 보면 소외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이 생기고, 일반과 비일반이 생깁니다. 대개 정상과 일반의 기준은 기득권이 정합니다. 기득권에 들지 않은 사람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기득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이고 ‘비일반’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기준대로 작동하는 인간의 나라입니다.
안타깝게도 작은 하나님 나라여야 하는 교회도 인간의 나라 작동 원리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로 명시해 놓지는 않지만 소위 말하는 믿음 좋은 사람, 번듯한 직업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고, 노숙자, 범죄자, 성소수자 같은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안 들어오면 좋겠다는 마음을 은연중에 품습니다. 그들을 배척하는 느낌을 자아내기에 실제로 교회에 그런 분들이 잘 안 계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밀어내는 곳을 안전하다고 느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聖)과 속(俗)을 인간의 기준으로 나눠 놓으니 나와 다른 사람을 자연스레 밀어낸 집단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있어야 하는 사람과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을 범주화시켜 공동체를 구성하면 편리할 수는 있습니다.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감수하지 않아도 되고, 희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 심리는 일상에선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억지로 만나며 살다가 교회에 와서는 편안하게 나와 비슷한 사람만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굳이 수고롭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이면 좋겠다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안전지대에서는 그 긍정의 범주를 벗어난 순간 도태됩니다. 그러니 완벽한 안전지대라고 할 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며, 세리와 몸 파는 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하시니, 교회공동체에 안에서 인간의 임의로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범주화해서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 같을 수는 없습니다.
* 불편할 안전지대
예수님은 가만히 있어도 당대 최고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서기관들이 늘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수고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뒤로하곤 오히려 죄인에게 찾아가고, 몸 파는 사람의 친구가 되고, 당시 부정하다 여겨지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친구는 다 날 것 그대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와 몸 파는 사람과 술꾼들 사이에서 기원한 기독교가 어쩌다 이렇게 고상해지고 밋밋해졌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기를 자처했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안전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 안전지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인 사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안전하다 느끼게 된 이유는 그들을 뜯어고치려 하지 않고 그 존재 그대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옳음에 맞춰, 그 공동체의 기준에 맞춰 재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이웃도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곳에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느낍니다. 나와 남을 갈라놓았던 깊은 골짜기가 메워진 느낌을 받습니다. 나의 존재가 재단되지 않으니 너무나 안전한 곳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있습니다. 불편함을 자처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가 그 불편함을 기꺼이 겪는 이유는 그도 누군가에게 용납받아 안전지대를 누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용납해 주신 예수님의 안전지대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여성을 만났고, 안식일에 법을 어겨서라도 장애인과 연대했으며, 노동자들과는 친구가 되어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그들 자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이자 완벽한 안전지대가 되었던 예수. 구역 밖으로 어느 누구도 밀어내지 않는 환대가 하나님이 이 땅에 주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안전지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높고 낮음으로 가르지 않고 누구나 평탄함을 누리는 곳. 다수에 속하지 못한 타인을 위해 다수로서 누리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곳.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안전지대가 잘 유지될 수 있는 곳. 이곳은 우리의 불편할 안전지대입니다.
더 나아가 이 아늑한 안전지대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도 사회의 기준에 밀려 삶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에게 갑시다. 아무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줍시다. 그들이 세상 앞에서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자기의 인간적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되어줍시다.
정호승 시인의 <당신에게>라는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밤하늘을 위해
나의 작은 등불을 끄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별들을 위해
나의 작은 촛불을 끄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홀로 편안하게 빛나는 곳이 아닙니다. 내 빛을 끄게 되더라도 모두가 밤하늘과 별을 공유하는 곳입니다. 소외되는 이 없이 모두가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불편을 감수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곳을 꿈꿀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그 꿈이 꿈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삶의 방식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저와 여러분이 모든 이들을 위한 진정한 안전지대를 세워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생명은 돋아나고 사랑은 피어날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