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에는, 해나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민족들의 영광과 명예를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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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는 목요일인 8월 15일은 광복 79주년입니다. 오래전 식민의 어둠에 짓눌려 있던 이 땅 위에 해방과 독립의 빛을 허락하신 주님께서, 오늘 분단의 철책에 짓눌려 있는 이 민족 위에 화해와 통일의 빛을 주시고, 매일 갈등과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이 나라 위에 화합과 안정의 빛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해방에 대해 이렇게 쓰셨습니다.
“어련히 오고야 말 해방인 줄 믿었지만 또 못 믿었다. 그러므로 정작 온 때는 모두 꿈인가 하였다. 연대표 위에는 틀림없는 35년이건만 느낌으로는 350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일제(日帝) 35년’하면, 그렇게밖에 아니 되었던가 의심이 난다. 그 고난은 그렇게 심하였고 영원히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것 같았던 고난, 35년이었지만 350년도 더 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고난의 시간이 일제 식민지배의 시간이었습니다. 해방의 소식이 경성에서 전국 곳곳으로 전해지면서 온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풍악을 울리며 환호했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찾아옴을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빛은 온전한 빛이 아니라 불완전한 빛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얻은 빛이 아니라 외세에서 유입된 빛, 그것도 이념과 권력의 대립을 벌이던 미국과 소련에서 얻은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이내 조국을 분단시켰고, 분단은 동족간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불완전한 빛이 만든 어둠은 오늘까지도 한반도 위에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빛이라고 다 빛이 아닙니다. 빛 중에는 8.15 광복의 빛처럼 불완전한 빛도 있고, 얼핏 보면 빛과 생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둠과 죽음인 빛도 있습니다. 시인 유하는 캄캄한 바다에 대낮같이 밝은 집어등을 켜고 오징어를 잡는 고깃배를 보며 <오징어>라는 짧은 시를 지었습니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빛난다고 다 빛이 아닙니다. 다 생명이 아닙니다. 어떤 빛은 우리를 죽음과 절망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 펜데믹은 우리 인류가 그릇된 빛을 보고 살아왔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만 여겨왔던 발전, 개발, 편리가 사실은 유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동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그 결과 동식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코로나 펜데믹은 알려 주었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 교수는 몇 년 전,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을 살기 어려운 세상, 헬조선이라고 이야기할 뿐 나라를 옳게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지금의 한국을 떠받치고 있는 성공주의 신화를 내면화하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2,30대만 그런 게 아니죠. 정말 많은 이가 갭투자, 비트코인과 같은 죽음의 집어등을 생명의 빛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성서가 말하는 빛
그럼, 성서가 말하는 참된 빛은 어떤 빛일까요?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이 빛은 태양과 달과 별이 비추는 물리적 빛과는 다른 빛입니다. 창조의 과정을 보면 해 달 별이 창조되는 것은 빛이 창조된 이후입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빛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빛 이전의 상태, 곧 창조 이전의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2을 읽어보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성서가 말하는 창조 이전의 상태는 세 가지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빛은 그 세 가지 상태의 반대 개념, 반대 가치입니다. 혼돈에 맞선 질서와 안정, 공허에 맞선 의미와 보람, 어둠에 맞선 빛과 희망과 같은 것들, 그 모두가 창세기가 말하는 빛입니다.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던 시절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바빌론은 해 달 별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그 신들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격하시켰습니다. 바빌론이 신으로 섬기던 존재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격하시킨 것은 바빌론이라는 나라 자체를 격하시킨 것입니다. 바빌론은 해 달 별과 같은 빛을 섬겼지만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바빌론은 이스라엘에게서 안정과 의미와 빛을 거두어가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를 통해 바빌론은 그들이 신으로 섬기던 빛이 모든 인류의 빛이 아니라 바빌론만의 빛임을 드러냈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참빛은 제국과 같은 강자가 폭력적으로 내뿜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강자들이 말하는 빛이 어둠임을 폭로하고 그 어둠에 의해 삶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변한 이들에게 새로운 안정과 의미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빛이었습니다.
그런 빛은 이사야서에도 등장합니다. 이사야 60장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제국에 의해 온 나라들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짓눌릴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침해처럼 떠오르는 주님의 빛을 받아 이 세상에 안정과 의미와 희망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빛은 결코 강압적이고 지배적인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은 오히려 섬기는 빛입니다. 이사야 58:10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이사야 61:1,2 말씀도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제국의 빛은 지배하는 빛이었지만, 하나님의 빛은 주린 자, 불쌍한 자, 가난한 자,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고 섬기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과 비슷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어그러진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생명의 빛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에 의해 자신을 제국의 소모품으로 여기게 된 사람들과 유대교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성전의 소모품으로 여기게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이 말씀 속엔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는 소중한 존재다.’입니다. 그 당시 소금의 가치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는 월급을 소금으로 주기도 했습니다. 라틴어로 소금은 Sal인데 그 Sal에서 월급Salary란 말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호명을 통해 자신을 하찮은 존재에서 귀한 존재로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자체가 마법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소금과 빛과 같이 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자녀로 대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는 말 속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는 ‘너희는 귀한 존재답게 살아야 한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소금과 빛’이라 호명해 주시고 또한 그렇게 귀한 존재로 여겨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새로운 존재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강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가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어 그가 귀한 존재답게 살도록 격려하는 빛이 예수님이 말하는 빛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빛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계시록 21장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예루살렘은 눈물 죽음 슬픔 울부짖음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문이 12개, 성의 가로 세로가 12,000스타디온, 즉 가로 세로가 2,200킬로미터나 되는 큰 성으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성입니다. 그런데 그 성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성전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었습니다. 해와 달도 두세 개씩 있을 것 같은데 없었습니다. 왜 없었을까요? 주님께서 친히 성전과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의 이 비전은 놀라운 비전이면서 아픈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비전속에는 주님만이 참빛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성전이지만 참에서 벗어난 성전이 만들어낸 거짓과 어둠들에 대한 아픈 경험과 ‘내가 빛이다’라며 이 세상에 존재했던 제국, 지도자, 이념 등이 빚어낸 수많은 폭력과 고통에 대한 슬픈 경험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차라리 없는 게 더 좋았을 성전, 제국, 지도자, 이념들에 대한 경험이.
3. 빛이 되려 하기 전에
일본의 국기는 일장기입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일장기에 준하는 깃발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욱일기, 흰 바탕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이 있고 그 붉은 원에서 붉은 빛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형상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육군의 군기로 사용하였으며, 일본이 제국주의를 내세우며 조선과 중국과 대만과 여러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할 때 사용했던 깃발입니다. 현재는 일본 해상자위대가 군기로 사용 중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국제행사 자리에서 일장기 대신 욱일기를 사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욱일기는 단지 일본군의 군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욱일기의 빛살 속에는 일본의 빛을 사방으로 뻗어나가게 하겠다는 소망만 담겨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욱일기의 빛살은 일본에게는 빛이었을지언정 일본제국에 의해 짓밟혔던 나라들에게는 그 빛살 하나하나가 칼, 창, 총알, 포탄이었음을 왜 모르는 것일까요? 욱일기의 빛살이 일본인들에게는 과거의 영광이었을지언정 피해국가들에게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는 어둠, 절망, 죽음, 고통이었음을 왜 모르는 것일까요?
대학교 시절, 명절을 맞아 시골 할아버지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마침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방에는 할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를 앞에 앉혀놓고는 편지 한 통을 꺼내 보여주셨습니다. 겉에는 한문으로 주소가 적혀있었습니다. <일본 복강현 반총시 상삼서 방웅광업소>. “할아버지 이게 뭐에요?”, 여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일본에 징용 갔던 탄광회사에 보내는 편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편지를 꺼내 읽어 주셨습니다. 편지도 다 한자로 써 있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옛날 탄광에서 일하며 고생했던 이야기, 요즘 쓸쓸하고 빈궁한 본인의 형편 이야기, 그러니 옛날에 주지 않았던 임금의 일부라도 좀 보내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할아버지 아직 그 회사가 남아 있을까요? 남아 있더라도 그 옛날에 주지 않았던 임금을 보내줄까요? 아마 그때 기록도 모두 사라졌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큰 회사라 망하지는 않았을 거다. 할아버지가 거기서 3년 동안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일본인들은 매일 내가 일한 양과 임금을 장부에 정확히 기록했었다. 그때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급료까지 다 계산은 해 두었을 거다.” 할아버지는 끝내 답장을 받지 못하고 200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은 최근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습니다. 사도광산은 일본 최대의 금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일제식민시절 조선 사람들이 1,500명이나 끌려가 강제로 징용살이를 했던 곳입니다. 유네스코 규정상 피해국이 반대하면 등재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은 ‘강제동원’이라는 문구가 빠진 상태로 유네스코에 등재를 신청했고, 우리 정부가 이에 반대하지 않아 등재가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에 강제징용 갔던 이들 대부분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처럼 일본에 의해 강제징용을 갔던 이들이 200만 명이 넘습니다. 할아버지가 일하셨던 탄광 회사는 아직 건재하고 일본 국립공문서관에는 그 당시 미불 임금내역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한다고 문화강국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신의 어둠과 폭력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깊이 사죄하고 그 피해를 보상하고 그와 같은 악행을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할 때 문화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유대인 집단 거주지, 게토를 만들고 그곳에 유대인들을 강제 거주시켰습니다. 1943년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해 가스실에서 처형한다는 사실이 유대인 거주지에 돌았고, 유대인들은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달여만에 독일군에 의해 봉기는 종료되었습니다. 체포된 56,000여명 이상의 유대인 중에서 7,000여명이 총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그날의 유대인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그곳에 1970년에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가 방문했습니다. 비가 내리던 겨울이었습니다. 빌리 브란트는 위령비 앞에 헌화하고 나서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습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고, 보도를 통해 그 장면을 목격한 전 유럽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동영상으로 브란트가 무릎 꿇는 장면을 여러 번 돌려보았습니다. 그의 모습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 나오는 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빛이 났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사죄하고 반성하는 이에게서 나오는 밝은 빛이, 나와 너 사이에 오래도록 존재하던 증오와 갈등의 벽을 허물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빛이 나왔습니다. 유럽은 돌아온 탕자를 맞아준 아버지처럼 독일을 유럽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독일은 대통령과 총리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해국들에게 공개 사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이 빛이다.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디선가 빛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시대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이 되려 하기 전에 우리의 존재와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어둠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빛이 너의 삶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몰아넣고 너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그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빛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욕망에서 나온 빛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자신의 욕심과 욕망 성취를 주님의 빛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분명하고 그로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가 있음에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닐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어둠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과 우리가 잘못한 이웃과 뭇 피조물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하고 사죄할 때 우리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점점 어두워가는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어둠이 되지 맙시다. 거짓 빛에 현혹되지 맙시다. 참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평화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됩시다. 위에서 군림하는 빛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 낮은 이를 위로하고 섬기는 빛이 됩시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그 일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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