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4. 이제 다시 시작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1:14~15
설교일시 202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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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시작이다
막 1:14-15
(2024/04/07, 부활절 제2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청명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명실상부한 봄날입니다. 맑고 깨끗한 봄 기운이 우리 삶에도 스며들어 모두가 봄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봄의 사람이란 스스로 생기가 넘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기쁨과 활력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에 드리운 우울함과 어둠을 몰아내는 하늘의 바람이 우리 가운데 불어오기를 빕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애 첫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 드라마틱한 인물입니다. 그는 거칠 것 없는 야인이었습니다. 지켜야 할 자기가 없었고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에 그의 삶은 단순했습니다. 단순했기에 힘이 있었습니다. 유력한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기에 그의 메시지는 힘찼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탐욕과 위선을 사정없이 폭로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으려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 질타했습니다. 진정한 참회를 요구한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리들 혹은 경제인들은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군인들 혹은 권력자들은 자기에게 위임된 권력을 사적 이익을 위해 써서는 안 됩니다. 일반 시민들은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자기 특권을 기꺼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생각이 없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허위의식이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요한은 타오르면서 빛을 내는 등불”(요 5:35)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허섭스레기를 사정없이 태우는 불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안하무인의 무례한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은 자기 한계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혹시 메시야가 아닐까 기대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나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조금의 유보도 없이 이 말 한 마디를 할 수 있기에 그는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 11:11a)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역할을 메시야 오실 길을 닦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기대고 있던 그릇된 선민의식을 질타하고, 느른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고, 무기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역사의 꿈을 심어주는 것까지가 자기의 일임을 그는 한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거침없이 권력 비판을 하다가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 소명의 계승
그것으로 그의 달음질이 그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막 1: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 문장 속에 역사의 신비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역사의 물줄기는 가끔 장애물을 만나 멈추기도 하고 흐름을 바꾸기도 하지만 결국은 흐르게 마련입니다. 이 장엄한 흐름을 이끄는 힘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이 멈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더 위대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1989년 중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 시위를 벌이던 한 기독교인이 쓴 시 가운데 한 대목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약하고 깨지기 쉽지만/많은 사람은 강할 거예요”. 그는 권력의 폭압으로 인해 쓰러질 것을 예감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자기를 위해 울지 말라며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이 나무에 물주는 것을 잊지 마세요.”(JPIC 서울세계대회 자료집, 곽비란Kwok Pui-lan의 성서연구 자료 중에서) 이 숭고한 결의가 역사를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정교하고도 놀랍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출석하고 있던 아주 작은 교회의 목사님께서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이끌려 온 곳이 이곳 청파교회입니다. 풍채좋은 담임목사님과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왜 이곳에 왔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두 분 사이에 이야기가 이미 끝났던지 박정오 목사님께서 호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김 전도사, 내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일해. 일 하다가 나하고 길이 다르다 싶으면 당신이 떠나면 돼.” 이 말이 제게 자유의 공간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게 청파교회와의 인연의 시작입니다. 그 인연이 43년이 되었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려던 애초의 계획과 달리 평생 한 교회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투적인 말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생각은 없지만 ‘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이현주 목사님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 순간 자유롭게 선택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니 어떤 필연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저는 하나님 체험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반성적으로 인식된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하나님의 선율은 스타카토 식으로 전개되기에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 선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면서 박정오 목사님께서 회한에 찬 음성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김목사, 나는 지난 30년 동안 무엇이 기독교가 아닌지를 가르쳤어. 그런데 무엇이 기독교인지는 가르치지 못했어.” 박 목사님의 말씀은 제 목회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고심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다가 지향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궁구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결론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생명’과 ‘평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b).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 14:27)

저는 이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언제나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에 짓눌려 있던 생명들이 깨어났고, 그 결과가 바로 평화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거두어야 할 삶의 열매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지금도 이 판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생명의 씨를 심고, 평화의 열매를 거두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소명입니다.

∎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님이 세상에 던지신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 하나님의 시간은 앞당길 수도 없고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제자들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물었을 때 주님은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6, 7)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삶 혹은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하나님 나라에 대비되는 지옥의 본질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 ‘다른 존재들과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것’, ‘상호 공존의 기쁨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토마스 베리, 브라이언 스윔, <우주 이야기>, 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p.133ff)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또 자신도 기꺼이 누군가의 손님이 되려는 것, 그래서 함께 삶을 경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러합니다. 경건하다 자부하는 이들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당한 이들,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는 이들 때문에 상처입은 이들이 주님과 만나 자기 삶이 얼마나 존엄하고 귀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따뜻함 속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역사의 꿈도 영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는 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질서입니다. 로마는 군사력과 찬란한 문화를 통해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세계 도처에 법 질서를 확립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국의 본질은 폭력입니다. 체제에 맞서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국은 스스로를 존속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어냅니다. 야만인들을 교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수탈합니다. 이것은 역사상에 등장한 모든 제국의 특징입니다. 한 마디로 제국은 자기 확장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채 신음하는 사람들,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까지도 포용하는 세계입니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그런 이들과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이들과 대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면을 꺼림으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로부터도 멀어집니다. 주님은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 21:31b)고 말씀하셨습니다.

∎ 회개한 사람의 삶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앞서도 잠시 말한 것처럼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기도회에서 혹은 찬양 집회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며 회개 기도를 올린 후에도 자기 상처와 아픔에만 매달리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참된 회개에 이르렀다는 것은 무얼 통해 알 수 있을까요?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내 속에 깃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인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햄 raḥam입니다. 이 단어는 긍휼이라는 뜻과 더불어 자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기 몸 속에 깃든 생명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애쓰는 엄마의 마음이 곧 긍휼입니다. 긍휼에는 ‘함께 느끼는 아픔’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접속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징표가 바로 타자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 이르십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이어 등장하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눅 6:37)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은 마땅히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품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척도를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입니다. 애정과 조심스러움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여백이 없는 의로움처럼 세상을 차갑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둘째는 ‘남에게 주어라’(눅 6:38)입니다.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행 20:35)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모범입니다. 주님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을 선물로 내주셨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사랑을 주셨습니다. 존경과 아낌, 따뜻한 사랑으로 뭇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주님과 깊이 만난 이들은 누구나 자기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환대야말로 예수적 삶의 특색입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환대의 공간을 열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아픔의 자리, 고통의 자리야말로 주님이 머무시는 자리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엡 3:19)을 누리면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 곁에 다가서십시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십시오. 주님은 지금까지도 우리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정진규 시인의 말대로 앞물결이 뒷물결에게 자리를 내주기 때문에 바다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뻐합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 앞에 선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4년 04월 07일 10시 29분 0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