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심연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 2022년 10월 29일
작성자 김기석
심연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

마르틴 루터가 불을 붙인 종교개혁 기념일이 다가온다. 모든 생명은 탄생, 성장, 정체, 경직, 죽음의 과정을 거친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추동하는 역동성이 형식과 조화를 이룰 때 문명은 빛이 난다. 역동성이 형식을 압도할 때 혼란이 찾아오고, 형식이 역동성을 억누를 때 정체 상태가 발생한다. 종교가 권력에 맛들이고 부를 축적할 때, 권력 욕망이 권위를 압도할 때 종교는 타락하게 마련이다. 하나의 소리가 압도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때 다른 소리들은 잦아들고 세상은 경직된다. 권력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폭력을 사용하라는 유혹에 즐겨 굴복한다. 종교적 진실의 핵심은 지배의 포기이지만, 지배에 맛들인 종교인들은 신자들을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킴으로 그들의 영혼을 자기 의지에 복속시키려 한다. 자기 확신에 찬 말들이 범람하면서 진리 혹은 진실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을 방해한다.

루터는 권력으로 변한 종교의 위험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자각한 사람이다. 그가 타락한 교회의 현실을 비판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주님의 포도밭을 허무는 멧돼지’라고 비난했다. 종교의 기능 가운데 하나가 사회 통합인데, 그가 분란을 일으켜 사회통합을 오히려 깨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발언과 신학적 입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거절할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청했던 그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의회 앞에 서서 자기 입장을 밝혔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제가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이런 선언을 함으로 루터는 생과 사의 경계에 서게 되었다. 불려 나온 역사의 무대에서 바장이다가 어느덧 벼랑 끝에 선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진실 앞에서 등을 돌릴 수 없었다. 도종환 시인은 ‘삶의 무게’라는 시에서 ‘내가 들 수 있는 만큼의 무게가 있다’고 말한다. 의욕이 지나쳐 자기가 들 수 없는 무게를 들 수 있다고 과장해서도 안 되고, 자기가 들어야 하는 무게를 자꾸 줄여가기만 해도 안 되고, 자기가 들어야 할 무게를 남에게 떠맡기기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엄중함이다. 루터는 그 엄중함을 받아들였다.

롤런드 베인턴은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맥카시 선풍이 불던 시기에 <마르틴 루터>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썼다. 맥카시 선풍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근본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롤런드는 그 책에서 마르틴 루터가 그의 마음을 끈 것이 두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루터가 이성과 양심의 이름으로 교회와 국가에 도전한 일이다. 다른 하나는 결단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그 사안을 재검토함으로써 오류 가능성을 줄이려 했다는 것이다.

계몽된 정신의 특색은 자신이 인식과 행동에 있어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머뭇거림은 약자의 특색이 아니라 무릇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들의 기본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 조금의 회의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 확신은 위험하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일수록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동장치가 고장난 열차처럼 위험하다. 새로움이 틈입할 여지가 없을 때 생명은 성장을 멈춘다. 폭력은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직성을 숙주로 하여 자란다. 다름을 용납한다는 것이 곧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낯섦은 더 커지라는 부름이다.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차갑기 이를 데 없다. 전래 이후 민족사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성장해온 교회는 지금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람들을 욕망의 방향으로 몰아대는 시대정신에 순응할 때 종교는 타락한다. 주류담론을 해체하는 전복적 상상력을 작동시키지 않을 때 종교는 맛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다. 한국 개신교회는 지금 쇠락이라는 거대한 심연을 마주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심연을 뚫고 솟아오를 빛을 잉태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빛은 생명과 평화와 사랑 그리고 겸손과 포용을 모태로 삼아 탄생한다. 

(* 2022/10/29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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