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신의 이름을 오용하는 이들 2022년 10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신의 이름을 오용하는 이들

러시아발 위기가 심각하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남지역을 합병하기 위한 주민 투표가 진행되었다. 러시아는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의회의 결정이라는 절차만 남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그 투표가 적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며 합병계획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러시아는 그러나 그런 우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그 지역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있다면 그것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지역 전문가들은 그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닐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러시아는 이미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고 전쟁에 나설 의사가 없는 이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의 이주를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발트해를 통해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이 어떤 인위적인 타격에 의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 그 공격의 주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사보타주가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유럽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유럽의 기간 시설을 고의로 훼손했다는 것이다. 겨울철을 앞두고 에너지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있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고 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 들고 있다.

평화를 향한 인류의 꿈이 또 다시 위기에 처했다. 유사 이래 갈등과 분쟁이 없는 시기는 없었지만 기후 재앙이라는 폭풍이 생태계 전체를 휩쓸고 있는 이 때, 또 다른 폭풍이 커가고 있는 형국이다. 퍼펙트 스톰이 다가온다. 종교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가리산지리산 지향을 잃고 방황하는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는 설교를 통해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용맹하게 전쟁터로 가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라면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다 죽는 것은 타인을 위한 희생이기에 천국에서 영광과 영생을 누린다고 말했다. 조국을 위한 희생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다 씻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타락한 서방세계와 맞서는 러시아의 신성한 전쟁이고, 신성한 질서를 해치는 적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사랑이다.

권력 욕망에 사로잡힌 정치와 종교가 손을 잡을 때 세상은 위험해진다. 욕망에 신성의 광휘를 덧입히는 것은 모든 제국주의자들의 전략이 아니던가? 고대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티누스’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사람들은 그를 지중해를 내해로 거느린 대제국을 지배하는 자라는 뜻에서 ‘주’라고 불렀다. 위대한 자에서 주로 격상되었을 때 로마제국은 또 다른 신화를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 아티아는 인간이지만 아버지는 태양신 아폴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로마는 신의 국가가 된 셈이다. 권력자가 신성의 광휘를 쓴 세계에서 개인의 존엄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대의에 종속될 뿐이다. 인간 소외는 그렇게 발생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자기는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을 아끼지 않는 한 귀부인에게 어느 의사가 한 말을 들려준다. 그는 자기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더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관념으로는 인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내게 불편함을 안겨주거나 비위에 맞지 않으면 그를 증오하는 것이 인간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한층 불타오르게 되는 역설을 그들의 입을 빌어 전하려 했던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노동과 인내를 요구한다.

외부의 누군가를 적으로 삼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말하는 이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자기 욕망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신의 뜻을 운위하고 신이 자기편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위험으로 내몰면서 자기들은 안전한 자리에 머물곤 한다. 개별자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둠을 찢고 빛을 낳으려는 이들이 연대할 때 새로운 희망의 싹이 인정의 폐허 속에서 움터 나올 것이다.

(* 2022/10/01,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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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준(23 01-10 10:01)
학교폭력을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기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잔인한 폭력에 시달리던 문동은(송혜교)이 자퇴 후 복수를 결심하고, 18년간 치밀하게 준비해 실행해가는 내용이다. 동은이 학교폭력을 당할 때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교사도, 경찰도, 심지어 엄마도. 법 역시 동은 편은 아니다. 앞서 드라마 <빈센조> <모범택시>가 나왔을 때 ‘자력구제(自力救濟·self-help)’ 즉 ‘사적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더 글로리>에 이르러선 대중의 반응이 달라졌다. 모든 공·사적 시스템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동은에게 남은 선택지는 자력구제뿐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가해자에게 어떠한 서사도 부여하지 않는 ‘피해자의, 피해자에 의한, 피해자를 위한’ 복수극에 열광하고 있다.

법치국가에서 형벌권은 국가에 귀속된다. 자력구제는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내 가족을 죽인 범인을 내가 찾아낸다 해도 내가 응징해선 안 된다. 이것이 허용될 경우 세상은 폭력으로 넘쳐나고, 질서와 안정과 평화는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기는 가상공간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정의의 히어로가 다크 히어로로 바뀌더니, 이제는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징벌하는 서사가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이 법전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민 같은 이들이 계속 ‘성역’으로 남고 ‘언터처블’의 특혜를 누린다면, 현실공간에서도 자력구제의 유혹은 커질지 모른다. 피해자도 더 이상은 착한 얼굴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더 글로리>를 향한 열광은 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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