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기다리는 사람들 2023년 12월 03일
작성자 김기석

기다리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에 이르기까지의 4주간을 대림절기라 이른다. 이미 오신 예수를 기리는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이다. 교회력의 한 해를 기다림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기다림은 지금은 부재한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행위이다. 학생들은 방학을 기다리고, 군인들은 제대 날짜를 기다리고, 구직자들은 합격 통보를 기다린다.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기다림이야말로 삶의 활력소이다.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고사목과 다를 바 없다.

기다림의 절기는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또는 어떤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묻는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언제 올지도 모르고, 왜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고도라는 인물을 무작정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권태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막연한 기다림은 불모의 기다림이다. 아무 것도 산출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모의 시간을 견디는 일처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둘은 너무 심심한 나머지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에 목이라도 매볼까도 생각해본다.

롤랑 바르트는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呪文)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은 방에서 나갈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습니다. 자리를 뜨는 순간 기다림의 대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대상에 의해 사로잡힌 셈이다. 롤랑 바르트는 또 자문자답한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부재는 항상 그리움을 낳게 마련이다. 사랑은 부재가 빚어낸 아쉬움 혹은 공허함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에 지친 이들은 부동의 자세를 풀고 주변을 둘러보거나 주위를 서성이며 기다리는 대상을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불모의 기다림은 창조적 기다림으로 전환된다. 창조적인 기다림이란 기다림의 내용을 선취하는 기다림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세상이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투신하는 것이 진정한 기다림이다. 전쟁의 시기를 살았던 히브리의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서로를 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다시는 군사훈련을 하지 않는 세상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런 세상의 꿈은 장엄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 가슴에 있는 날카로운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그 꿈이 대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름다운 세상은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뉴욕에 있는 유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저명한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을 찾아왔다. 랍비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던 그는 조언을 구하려고 헤셸을 찾아왔던 것이다. 헤셸은 뜬금없이 그에게 어떤 경로로 이곳까지 왔냐고 물었다. 젊은이는 웨스트 70번 가에서 120번 가까지 몇 마일을 걸어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헤셸이 물었다. “96번가에 있는 노숙자 여인을 보았나요? 한 손에 작은 손팻말을 들고 다른 손에는 담요를 들고 있는.” 청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헤셸이 다시 물었다. “117번 가에 있는 퇴역 군인을 보았나요? 야구 모자를 쓰고 있고, 회색 수염에, 이가 몇 개 남지 않은.” 젊은이는 역시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랍비가 다시 물었다. “자바르 외곽에서 드레드록 머리를 한 채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키 큰 남자를 보았나요?” 젊은이는 유구무언이었다. 그때 헤셸이 말했다. “어떻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지 않으면서 랍비가 되겠다는 것입니까?”

꼭 선을 행하기 위해 멀리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가족,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들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불모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가 ‘내가 홀로가 아니구나’라고 느끼게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에게는 누군가가 보여주는 작은 친절이 든든한 설 땅이 된다. 이 스산한 초겨울에 한뎃잠을 자야 하는 이들, 불기조차 없는 쪽방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이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 곁에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기다림의 절기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 2023/12/02일자 경향신문 컬럼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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