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씨앗을 손에 쥔 채로 2023년 11월 04일
작성자 김기석
씨앗을 손에 쥔 채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세운다. 서방 언론은 이 전쟁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 칭하고, 아랍게 언론은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라 칭한다. 한쪽은 암암리에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고, 다른 쪽은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주목하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어떻게 칭하든 지붕이 없는 거대한 감옥 같았던 그 땅은 황폐하게 변하고 있다. 가자 땅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애곡하는 소리가 무딘 귀에도 아프게 들려온다.
 
벌써 양측을 합쳐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그 중에는 전쟁과 무관한 어린이와 여성들이 많다. 이스라엘 폭격기들은 사회 기반 시설을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난민촌도 공격을 받아 많은 이들이 죽었고, 성 포르피리우스 교회도 파괴되었다. 주민 대부분이 연료, 물, 식량,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피난길에 오를 기회조차 잡지 못한 이들은 절망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상군이 투입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전쟁은 맹목적이다. 전쟁터의 빛깔이 검은색인 것은 그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붉은 색 피뿐이다. 상대를 제거하고야 말겠다는 절멸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은 유보된다. 적은 괴물이고 악마이기에 파괴되는 것이 마땅하다. 전쟁은 가장 큰 낭비이다. 물자를 낭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소중한 생명조차 아끼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작가 팀 오브라이언은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이라는 책에서 “진실한 전쟁 이야기는 결코 교훈적이지 않다. 그것은 가르침을 주지도, 선을 고양하지도, 인간 행동의 모범을 제시하지도, 인간이 지금껏 해오던 일들을 하지 않도록 말리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다.
 
상대를 철저히 궤멸시키면 평화가 올까? 전쟁과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노자는 군대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큰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뒤따르게 된다고 했다. 전쟁은 누군가의 가슴에 증오의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 후과는 또 다른 분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증오의 씨를 심어 평화를 거둘 수 없다. 바람을 심는 이는 광풍을 거두게 마련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푸른색 페인트로 그려진 다윗의 별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 별은 나치 시대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기에 섬뜩하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탓할 대상을 찾는다. 무질서가 심화되어 혼돈 상태에 이를 때 폭력의 충동은 증대되고, 나쁜 정치인들은 그 충동의 희생양을 대중들 앞에 던져준다. 가난한 사람들, 난민, 소수자, 외부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 쉽다.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한다.

평화의 꿈은 그저 헛된 꿈일 뿐일까? 히브리의 예언자들은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평화로운 시기에 나온 비전이 아니다. 기원전 8세기, 앗시리아 제국이 중근동 세계를 공포로 휩쓸고 있을 때 예언자들은 그런 꿈을 들고 나왔다. 망상처럼 들리는 그런 꿈조차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빈곤해질까?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으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친 현장을 목격한 한 유대인 소녀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소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냥 평화롭게 함께 지내고 싶어요’. 평화의 꿈은 어떤 경우에도 스러지지 않는다.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이들이 많지만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 또한 많다.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독일과 싸웠던 러시아 여성들을 인터뷰한 후에 쓴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지금도 기억나 어느 마을에 갔다가 한 노인의 장례식을 봤어. 노인은 밤에 목숨을 잃었어. 밭에 씨를 뿌리다가 죽임을 당한 거야. 그런데 별짓을 다해도 노인의 손가락이 펴지질 않는 거야. 씨앗을 어찌나 꼭 쥐고 있던지 할 수 없이 씨앗을 손에 쥔 채로 땅에 묻었지.” 씨앗을 손에 쥔 채로 땅에 묻힌 그 노인은 어쩌면 길을 잃은 채 방황하는 우리에게 평화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23/11/04일자 경향신문 컬럼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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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23 11-05 11:11)
교인이 아닙니다. 신문에서 글을 읽고 이런 분이 계신 교회는 어떤 곳일까 둘러 보러왔다가 한 줄 남길 수 있어서 적어봅니다.참 좋은 글입니다. 덕분에 깨어있는 하루 따뜻한 하루로 시작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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