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 그리스도인의 품격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전 4:7-12
설교일시 2020-01-19
오디오파일 202001019-2.mp3 [31695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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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품격
살전4:7-12
(2020/01/19, 주현절 후 제2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빠져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외로운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내일이 대한大寒이니까 24절기의 마지막 절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때의 정경을 “설중雪中의 봉만峯巒들은 해 저문 빛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흰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가 저녁 해를 받아 빛나는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인데, 올해는 눈이 거의 안 와서 이런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는 노래조차 달라져야 하는 모양입니다.

세상이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이 우리가 느끼는 근원적 외로움을 해소해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계와 대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친밀한 소통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만남을 통해 자기를 형성하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만난다는 것은 서로 마주서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동의하고 손을 잡고 하나가 되는 것”(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 p.35)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친밀한 만남이 지속될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고, 나다운 삶을 기획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어떤 형태로든 인사를 건네오고 거기에 반갑게 응답하면서 우리는 외로움을 견딜 힘을 얻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슬픔은 다들 마음이 한껏 달아오른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뜨거워지는 것은 지구만이 아닙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마음의 여백이 줄어들고 사소한 차이조차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편을 가르고,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고, 입장이 다르면 부르대며 적대감을 보입니다. 느긋한 평화를 누리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가야 할 기독교인들조차 평화롭지 못합니다. 눈빛 맑고, 마음이 따뜻하고, 말에 품위가 있고, 여백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이 시대의 우리의 소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약 성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울 사도의 서신은 대개 각 지역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송된 회람편지였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지만 교회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인간적인 허물과 약점 그리고 각자의 욕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 다 녹아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갈등이 많습니다. 생각하는 바와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바라본다면 다행이지만 사람들은 눈 앞에 있는 대상들을 바라보며 호불호를 표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16:24) 하신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자기 부인否認‘이 따름의 전제 조건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를 내려놓거나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근본이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누구인지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오늘은 바울 사도를 우리 길잡이로 삼으려 합니다.

∙부르신 까닭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의 결실입니다.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회당에 들어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행17:3). 유대인 가운데 몇 사람, 경건한 그리스 사람, 그리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의 말에 깊은 공감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시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키고, 바울 일행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신도들은 밤을 틈 타 그들을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자마자 그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던 바울은 마치 갓난아이를 두고 먼 길을 떠나온 엄마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그곳으로 보내 교인들의 형편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디모데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곤경과 환난 속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로소 그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이런 표현을 했겠습니까? 바울은 큰 애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 그들에게 신앙의 근본을 다시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함 받은 이들은 더러움에서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러움(akatharsia)은 욕심에 사로잡힌 상태, 사치의 노예가 된 상태, 불순한 동기를 품은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택함 받은 사람은 그러니까 욕심을 자꾸 덜어내는 연습과 단순하게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덜 먹고, 덜 갖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소유를 통해 행복을 사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조화롭고 평온한 상태에서 주어진 것을 한껏 누리는 소박한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소박素朴한 삶은 꾸밈이 없는 삶입니다. 꾸밈이 없기에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거나 이용할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때 비로소 우리는 거룩함의 입구에 당도합니다. 삶이 단순해야 삶의 순도가 높아집니다.

거룩함(hagiasmos)이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상 속에서 구현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성화된 삶입니다. 성화된 삶은 일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밥을 먹든, 길을 가든, 사람을 만나든, 일을 하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칠 만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더러움‘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거룩함’은 낯선 가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거룩한 삶의 특징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대합니다. 바울은 이런 말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1:3). 믿음이 행위와 결합되고, 사랑은 수고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망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특히 우리 마음을 붙잡는 것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입니다. 수고(kopas)의 문자적 의미는 ‘슬픔으로 가슴을 두드리다’라는 뜻이지만,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다’, ‘고통을 받아들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런 사랑의 수고에 모범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조용하게 살기를 힘씁니다. 조용하게 산다는 말은 여기저기 겅중거리며 뛰어다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적인 고요와 침묵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중뿔나게 자기를 드러내거나 돋보이게 하려고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동방 교회 전통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명상하며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을 일러 헤시카즘(hesychasm)이라 하는 데, 그 말은 ‘조용하게 산다’는 뜻의 헤시카조hesychazo에서 온 말입니다. 조용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사랑의 수고가 필요할 때는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때도 고요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떠벌이거나 광고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뜨이기 위해 하는 일을 하나님은 신통찮게 여기십니다.

셋째,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사실 이 권고는 초대교회가 처한 상황에 꼭 필요한 권고였습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던 초대 교회는 아주 강력한 영적 일치를 맛보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던 모든 담들이 무너졌고, 유무상통하는 인류 초유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감격이 지난 후에 남는 것은 지루한 일상입니다. 그런 지루함 속에서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주님의 재림 약속이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주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결한 신부로 자기를 바치기 위해 하던 일을 작파作破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그런 이들까지 품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재림이 지연되면서 그들의 존재는 교회의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일 당장 주님이 재림하신다 해도 오늘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전념하라는 말은 세상일에 오불관언의 태도를 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담이 되지 않도록 애쓰라는 말입니다.

∙품위 있는 삶
그렇게 사는 것이 바깥 사람들 보기에도 품위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왜 하필이면 ‘품위’(euschemonos)라는 단어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사전은 품위를 ‘사회생활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념으로서, 사회 성원들이 각각의 지위나 위치에 따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품성과 교양의 정도’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 단어는 몇 차례 더 나오는데, 번역자들은 이것을 ‘단정하게‘(롬13:13), ‘적절하게’(고전14:40)로 번역했습니다. 품격이란 말도 떠오릅니다. 물건을 뜻하는 품品 자는 입 口 자 세 개가 위아래로 겹쳐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우리가 한 말이 쌓이고 쌓여 품성을 이룬다는 뜻으로 새기면 어떨까요? ‘품격‘ 할 때 격格은 ‘바로잡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말이나 행동을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자꾸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품격이 생깁니다.

품격이 있는 사람은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을 교정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에 한참 못 미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이 얼마나 매력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행2:47). 매력은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선교란 ‘매력의 감염‘입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은 질그릇 같은 몸에 보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보화를 간직한 이들의 삶은 당당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이것이 믿는 이들의 품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보며 ‘볼썽 사납다’고 말합니다. 품위가 없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마음씀이나 지향이 똑같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미워합니다. 기본적 교양이나 상식 그리고 예의조차 없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문제로 여기고, 자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비판적인 사람은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습니다. 믿는다 하는 이들 가운데 자기만족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볼썽 사나워집니다. 최소한 볼썽 사나운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엡2:10a). 하나님은 지금도 시간 속에서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겸허하게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1월 19일 12시 16분 1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