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성탄예배. 연약함 속에 깃든 신비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2:1-7
설교일시 2019/12/25
오디오파일 s20191225.mp3 [1508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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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 속에 깃든 신비
눅2:1-7
(2019/12/25, 성탄절)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시대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14). 천사들의 이 찬양이 우리 마음에도 깊이 울려퍼지기를 빕니다. 오늘만큼은 인생의 무거운 짐과 우울함, 부정적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한껏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7년에 남부 기독교 지도자 컨퍼런스에서 했던 설교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날들이 절망의 먹구름에 뒤덮여 황량할 때, 우리의 밤이 수천의 한밤중 보다 더 어두워질 때, 이 우주에는 거대한 악의 산을 낮추는 창조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 힘은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길을 내고 어두운 어제를 밝은 내일로 변화시킵니다. 도덕적 우주의 현은 길지만 그것이 정의의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음을 자각합시다(the arc of the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 justice).”(Jim Wallis, , HarperOne, 2018, p.56에서 재인용)

마틴 루터 킹은 이 설교에서 하나님은 조롱받으실 분이 아니라면서,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는 승리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임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은 절망과 어둠이 최종적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누가는 주님이 오신 소식을 전하면서 그 시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던 때,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입니다. 누가는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었다고 칭송받았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거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통치는 강압적 통치였습니다. 호적 등록은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고분고분하게 억압과 착취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냥 내버려두었지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사람이나 도시는 무자비하게 다뤘습니다. 로마 통치의 기반은 ‘폭력‘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오늘의 세계도 그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도의의 시대가 저물고 탐욕이 사람들의 마음과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스트롱 맨들은 자국의 이익을 강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세계 질서에 대해 당연히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의 주류 교회들은 그런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념화된 증오와 혐오가 종교의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고 있고,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을 당연한 질서로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미국의 양심적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실을 두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납치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현실 가운데 오셨습니다.

∙무정한 세상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고향인 베들레헴에 갔을 때, 마침 해산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이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환대받지 못한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탄생을 경축하는 악사들의 연주는 물론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포대기에 싸인 채 말 먹이통인 구유에 눕혀졌습니다. 쓸쓸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광경은 거룩함에 대한 우리 생각을 가다듬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예수의 본을 따르고 싶어했습니다. 광산촌인 보리나주에서 전도사로 생활했을 때 뿐만 아니라 일평생을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화가의 꿈을 품고 파리로 나와 지낼 때 그는 시엔(Sien)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시엔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자에게 버림받은 채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겨울 거리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시엔을 누추하고 비좁은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피난처를 제공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 섞인 눈길을 보냈습니다. 매춘을 하며 살던 여인과의 동거가 그의 평판을 나쁘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버림받은 여인을 모른 척하고 버려두는 것과 거두어 들여 돌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품위있고, 사려 깊고, 남자다운 일일까?” 되물었습니다. 까칠한 시엔과의 공동생활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고흐는 그를 차마 내칠 수 없었습니다. 해산할 날이 다가오자 고흐는 시엔을 산부인과에 보냈습니다. 얼마 후 고흐는 시엔의 옆에 누워있는 작은 아기를 보며 깊은 경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광경은 그가 그렇게도 흠모했던 렘브란트의 성화가 구체화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신비한 광채와 절망을 넘어서는 생명의 충만함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무정한 세상에서 시엔은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흐의 돌봄과 배려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의 신비는 벌거벗은 생명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선물입니다. 주님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하셨습니다.

∙취약함 속으로
주님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작고 여린 생명은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그 연약한 생명을 귀히 여기고 돌볼 때 사람은 잃어버렸던 순수를 회복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약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냉혹한 세상은 우리의 약함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사는 이들은 자기들의 약함을 시인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이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선함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이들은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연약한 지체들, 우리 사회의 그늘진 땅에 머물고 있는 이웃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홈리스들, 실직자들, 희망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이들, 빈곤한 노인들, 높은 철탑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의 시린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 곁에 한 걸음 쯤 다가서려 할 때 우리는 주님과 가까워질 것입니다. 부디 주님을 외롭게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12월 25일 12시 26분 2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