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 뱀이 하는 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3:1-7
설교일시 2020/03/01
오디오파일 s20200301.mp3 [2730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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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하는 말
창3:1-7
(2020/03/01, 사순절 제1주)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지금 매우 낯선 풍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앉을 공간 없이 꽉 찼던 회중석이 텅 비어 있습니다. 적막함이 감도는 예배당에 홀로 서서 인터넷 공간 저 너머 표정을 알 길 없는 이들에게 말을 건네려니 낯설고 어색한 게 사실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보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렸던 주일 모습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강단 의자에 앉아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우들의 안색을 살피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기이니 할 수 없지요. 하나의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생애 말년에 시력을 상실하게 된 성 프란체스코가 일평생 그를 보좌했던 레오 형제에게 함께 말씀을 전하러 가자고 채근합니다. 길을 걷다가 지친 레오는 어느 한적한 곳에 발걸음을 멈춘 후 “사부님, 지금 많은 이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침묵 중에 기다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곳은 실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광야였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마치자 그 앞에 있던 돌들이 ‘아멘’ 하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런 응답을 듣고 싶습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일상의 풍경을 다 바꿔놓았습니다. 거리를 걷는 이들을 보면 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고,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로부터 멀어지려 합니다. 감염에 대한 공포가 이웃에 대한 경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서로 마음 상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아직 코로나19의 피크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구 경북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 질병이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결국 우리는 극복해낼 것입니다만,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고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사람들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엊그제 읽은 어느 컬럼에서 인용된 워런 버핏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누가 알몸으로 수영하고 있었는지는 썰물이 되면 알 수 있다.”

맥락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공원을 걸으며 ‘누가 참 사람인가?‘,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가 거룩함을 독점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거룩은 삶으로 나타날 때에만 진실한 법입니다. 질병의 종식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의료진들, 손길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없이 대구로 달려간 사람들,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는 손길들....이런 분들이야말로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 그리고 거룩함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입니다. 우리교회도 이제 곧 이 대열에 함께 할 것입니다. 임대료를 낮춰주는 건물주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주님의 메신저들입니다. 돈벌이를 위해 마스크를 사재기한 영악한 이들도 있지만 그들보다는 좋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다이내믹한 우리 사회가 이런 위기를 함께 겪어내면서 조금 더 따뜻하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변해갈 수 있기를 빕니다.

∙슬그머니 다가오는 유혹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매우 익숙한 본문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첫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뱀의 등장과 더불어 에덴동산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왜 유혹자가 하필이면 뱀일까요? 어떤 이들은 꿈틀거리는 것을 꺼리는 인간의 본능과 연결시켜 설명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대 동방세계에 널리 퍼진 뱀에 관한 숭배 의식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뱀은 독을 만들 뿐 아니라 허물을 벗는 동물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왕관에는 코브라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왕을 보호하는 뱀의 여신 부토입니다. 애굽으로 상징되는 전제 정치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 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서 기자는 그런 일체의 설명을 배제한 채 뱀이 가장 간교했다(aruwm)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뱀은 사람 마음의 허점을 교묘하게 알아차리고 그 틈을 파고듭니다. 뱀은 동정심에 가득 찬 어조로 여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3:1) 유혹은 언제나 나를 위해 주는 척, 염려하는 척하며 찾아옵니다. 신천지가 외로운 영혼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위로하며 다가가는 곳을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정말로’라는 말이 참 교묘합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라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뱀이 정말로 여인을 염려해서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3:3). 여자의 말은 과장되어 있습니다. 2장 17절에 나오는 금지 명령을 반복하면서 슬그머니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보태고 있습니다. 과장은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자기 나름의 해석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먹지 말라는 말 속에는 만지지 말라는 뜻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생각이나 감정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면 감정도 달라집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그래서 참 심오합니다. 덧보태진 ‘만지지도 말라’는 말 속에서 뱀은 여자의 흔들림을 봅니다. 그 순간 뱀은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절대로’라는 말은 벌어진 틈에 박는 쐐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3:5)

뱀은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인간에 대한 시기심에 시달리는 분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유혹자들도 하나님 전문가를 자처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이들일수록 무지한 자들이 많습니다. 겨우 대롱을 통해 세상을 보면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분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니 말입니다. 종교인들이 일쑤 빠지기 쉬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뒷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그 옷자락만 겨우 만지는 것입니다. 놀라운 신비를 경험했던 바울도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고전13:12a)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럴듯한 말 속에 감춰진 욕망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눈이 밝아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과 악을 분별한다는 것은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성숙의 징표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게 도덕적 인간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말은 유한한 인간이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고 처신할 위험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토록 시끄럽고 갈등이 만연한 까닭은 선과 악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확증 편향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자기의 선입견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객관적으로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이들이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나와 생각과 지향이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내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눈이 밝은 사람은 다른 이들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호명해내는 사람입니다. 시몬에게서 베드로를 보시고,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을 보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번째 진술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 근사한 유혹입니다. 이 말 속에 담긴 기본적인 의미는 불사의 존재가 된다는 뜻일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유혹 앞에 서 있습니다.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었고, 시간 속에 자기 흔적을 남기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든 이들도 있고,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욕망은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갑질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 하여 다른 사람들을 종처럼 취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많은 돈이 사람들에게 ‘유사 전능성’을 준다고 말합니다. 돈으로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의 씨앗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출34:6)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다고 하여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은인 행세도 하지 않습니다(눅22:25). 오히려 모든 사람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삽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믿음의 징표는 아낌입니다. 물건은 물론이고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59장에서 ‘치인사천治人事天 막약색莫若嗇’이라 했습니다. 백성을 다스리고 섬기는 데 아낌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음 하나 얻지 못해 우리 삶이 이 지경입니다.

∙죄의 사회성
뱀이 자리를 떠난 후 여자는 눈을 들어 그 열매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뱀의 말을 렌즈로 삼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시선이 달라지면 대상은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3:6a)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여자는 마침내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죄는 이처럼 전염됩니다. 이것을 일러 죄의 사회성이라 합니다. 악동들은 사회가 금지한 행동을 할 때 머뭇거리는 동료들을 윽박질러 그 일에 동참하게 만듭니다. 죄책을 나누려는 행동입니다. 왕따 당할지 모른다는 조바심과 두려움 때문에 그 일에 끼어들었다가 낭패를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감리교인들이 드리는 아침 기도의 첫 머리에 ‘오늘 하루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십시오’(do no harm)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너무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이 모든 윤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나쁜 생각을 품고,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심을 드러낸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누군가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꿈꾸게 하고, 그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선한 일을 다짐하게 할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고 말합니다. 숨겨야 할 것이 생긴 것입니다. 서로에게 떳떳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뻔뻔한 이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을 생각이 없을 때, 지금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이 아끼시는 존재로 여길 때 우리는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뱀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는 척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위기의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한 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복과 기쁨을 매개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울함에 빠지기 쉬운 시대이지만 믿는 사람다운 명랑함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사순절 순례의 여정 내내 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 생명과 평화의 사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3월 01일 12시 01분 5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