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7. 근원을 돌아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25:19-23
설교일시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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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을 돌아보라
창25:19-23
(2020/04/26, 부활절 제3주)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마흔 살 때에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리브가는 밧단아람의 아람 사람인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사람인 라반의 누이이다.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배었는데, 그 둘이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 그래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려고 주님께로 나아갔다.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이동이라는 숙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하나의 교회 문이 닫히자 수많은 가정 교회들이 탄생했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지금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그 현장이 아름다운 성소가 되기를 빕니다. 가끔 김수우 시인의 ‘천막’이라는 시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유목민들이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면서 짓는 게르에 깃든 성스러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동그랗게 바닥을 펴면 세상의 중심이 생긴다/네 개의 나무기둥을 세우면 지상의 축이 팽팽해진다/지붕을 펼쳐얹으면 천막은 아침 신전이 된다(하략)”.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박하고 절제되어 있기에 더욱 거룩한 느낌이 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세웠던 회막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함께 하는 예배의 자리가 그런 소박한 거룩함이 깃든 자리가 되기를 빕니다.

끝없이 이동하던 세계가 잠시 멈추어 섰습니다. 나라와 나라,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던 비행기는 대부분 지상에 무료하게 서있습니다. 붐비던 공항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내고 있지만 세상 도처에서 여전히 락다운(lockdown)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경제적 위기가 자못 심각합니다. 소상공인은 물론이고 중소기업, 대기업이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큰일이라는 소리가 엄살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 속히 끝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야말로 직면한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는 한편 우리 삶을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을 바꿔놓고 산 건 아닌지 돌아보고, 본래적인 삶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이런 때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길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대개 한 장소에 붙박이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늘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곤 했습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땅에서 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운명을 감내해야 했던 가인이 그러합니다. 아브람도 살고 있는 땅과, 난 곳,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야곱과 요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인간의 역사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하는 장대한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떠남의 동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혹은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입니다. 용감한 이들은 새로움을 찾아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갑니다. 다른 하나는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입니다. 인류사의 많은 이들이 가난이나 기근, 전쟁과 테러, 역병, 박해를 피해 고향을 등졌습니다.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로 규정했습니다. ‘여행하는 인간‘, ‘길 위의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길 위에서 산다는 말은 취약함에 노출되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취약해진 사람들은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쇄된 사회일수록 낯선 이들에 대한 경계심과 적대감이 큽니다. 그곳에서 나그네의 삶은 곤고합니다. 유럽이나 미국, 호주 같은 곳에서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아시아계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속이 상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습니다.

나그네 혹은 이동하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세상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인류사의 위대한 문명은 다양한 전통들이 뒤섞여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실개천이 시냇물과 합류하여 개울을 이루고, 개울이 흐르며 다른 물줄기를 끌어안아 마침내 강이 되는 것처럼, 모든 문화는 혼종의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는 취약함 속에 있지만 건강한 문화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보호의 약속과 더불어 주신 소명은 복의 매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12:3b). 이것이 부르심 받은 이들의 소명입니다.

∙갈등을 넘어
오늘 본문은 이삭의 결혼 이야기의 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마흔 살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리브가는 밧단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입니다. 밧단아람은 ‘아람의 평원’이라는 뜻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 지역에 속하는 곳입니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는 아기가 없었습니다. 이삭은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긴 하지만 이삭이 아들을 얻은 때가 예순 살 되는 해였다니(창25:26), 결혼한 지 무려 2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성경은 20년의 세월을 불과 몇 줄로 압축해놓았습니다. 그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생략된 시간의 갈피에 스며들었을 아픔과 슬픔, 회한과 두려움, 희망과 좌절 등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태 속에 아기가 들어섰음을 알았을 때 리브가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최초의 태동을 느꼈을 때의 감동을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잘 기억할 겁니다. 그런데 성서 기자는 리브가의 몸에 들어선 쌍둥이가 태 안에서 서로 싸웠다고 말합니다. 리브가는 괴로워서 도무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엎드려 탄원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 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25:23)

우리는 리브가의 두 아들을 잘 압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나중에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고 야곱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람 출신 어머니에게서 두 민족이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갈등하는 형제 이야기는 에돔과 이스라엘이 심한 갈등 속에 있었던 후대의 상황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재가 과거를 규정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오바댜서에는 에돔의 죄가 적나라하게 적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유린당하던 날 에돔은 멀리 서서 구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한패가 되어 그들을 약탈하면서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을 사로잡아 종으로 팔아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겪었으니 이스라엘이 에돔에 대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남이 당하는 불행을 기뻐하거나,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하는 것처럼 나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이런 기억은 좀처럼 치유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분열 속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데스몬드 투투)지 않습니까. 창조적인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우선 잘못은 잘못으로 드러나야 하고, 보상은 보상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웃나라인 일본과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은 일본이 자기들의 죄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인정하고 보상하면 될 텐데, 그것은 자학사관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한사코 과거사를 외면하니 피해를 입은 이들의 가슴에 멍 자국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갈등이 치유될 수 없는 현실 혹은 일종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일까요? 조금 바꿔놓고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성서는 지금은 철천지원수처럼 지내고 있지만, 실은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형제라는 사실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분열과 갈등은 숙명이 아니라 치유되어야 할 상처이고, 그 상처의 치유는 자기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는 곳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 달라도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에게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때가 많습니다. 기쁨은 개별적인 감정이지만, 슬픔은 보편적인 감정, 뿌리 감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 연약함, 고통이 인간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모두가 함께 겪는 고통은 우리를 하나됨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 맞이하기
지금 우리가 직면한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인류가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을 힘으로 억압하고 지배하려던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서로 함께 어깨를 겯고 나아가야 함을 자각할 수 있기를 빌 뿐입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특별한 연주회를 보며 감동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현실 속에서 많은 음악가들이 각자가 선 자리에서 zoom같은 매체를 통해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말입니다. 가수들과 교회 찬양대원들도 이런 영상을 많이 만들고 있습니다. 음색도 다르고, 발성법도 다르지만 그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은 이 상황을 잘 견뎌내자는 절절한 염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들이 함께 부른 ‘상록수’를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마지막 절은 마치 가녀린 생명을 기어이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다짐처럼 들립니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각자의 소리가 어울려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을 보면서 기술이 서로 다른 공간에 머물고 있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라도 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습니다. 인터넷 공간은 이미 탈영토화가 이뤄져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있든, 피부색이 어떠하든 우리는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만들어낸 뜻하지 않은 풍경들입니다.

무기를 만들던 공장에서 인공호흡기를 만들고 마스크를 만드는 모습도 외신을 통해 보았습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모습을 상상했던 예언자들의 비전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어울려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세계를 꿈꾸면서 그들을 ‘무지개 백성’이라 일컬었습니다. 다양한 색깔들이 어울려 하늘을 반원형으로 두르는 무지개를 본 사람은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지개 백성을 꿈꾸는 이들입니다.

공존하면서도 갈등하는 것은 생명을 받아 사는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갈등을 넘어 공존을 모색하고, 공존하면서 서로 존중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목표입니다. 예수적 삶의 특색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분리의 장벽들을 허무는 것입니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도록 막는 물리적 장벽도 무너져야 하지만, 미움과 질투로 세운 장벽, 혐오와 차별로 세운 장벽, 노골적이진 않아도 낯선 이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옹색한 마음의 장벽도 허물어야 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해결될 수 없는 숙명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으면 됩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야곱과 에서는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서로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러기까지 야곱은 고향을 떠나 떠돌아야 했고, 엉덩이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에서가 겪어온 삶의 내력은 성경이 상세히 전하지 않지만 그도 또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됐습니다. 우리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내 곁에 있는 이가 건강해야 나도 건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이제 일치와 화해와 평화를 향해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사랑과 이해와 존중에 바탕을 둔 새로운 문화를 꽃 피워야 합니다. 그 씨를 심고 성심껏 가꾸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이 이미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동참할 차례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4월 26일 11시 56분 3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