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6. 사막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 35:1-4
설교일시 2020/04/19
오디오파일 s20200419.mp3 [3550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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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들
사35:1-4
(2020/04/19, 부활절 제2주)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코로나19 이후의 세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한 주간도 부활의 몸으로 사셨는지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치른 총선도 끝이 났습니다. 결과를 두고 잘 됐다고 하는 이도 있고, 걱정스럽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는 뽑힌 이들이 국민들 앞에서 한 약속을 잘 지키도록 감시하고 도와야 할 때입니다. 역사를 정의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무거운 때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하나님을 등진 백성에게 닥쳐올 재앙을 무섭게 예고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저버린 삶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고, 그들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의 언어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가차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심판은 늘 회복의 약속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통치할 이들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그들을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는 막는 곳‘,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사32:1-2). 우리가 선출한 모든 이들이 이러하기를 빕니다.

이사야는 공의로 다스릴 통치자들의 덕성을 몇 가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이 밝고, 백성의 요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은 경솔하지 않고, 사려 깊게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해야 할 말은 분명하게 합니다(사32:3-4).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다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마음껏 소비와 향락을 즐기고, 하고 싶은 일을 다하며 살던 세상은 지나갔습니다. 잔치는 끝이 났습니다. 지금은 잔치 이후를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 흥겨운 잔치가 끝나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집 주인은 뒷정리를 해야 합니다. 수북이 쌓인 그릇들을 말끔히 닦아 제자리에 넣고, 어지럽혀진 집을 정돈하고, 환기를 시켜야 합니다. 지금은 바로 잔치 이후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합니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과 더 긴밀히 소통하는 삶, 경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의 방식으로 개종해야 할 때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이지만
이사야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무질서와 혼돈에 진노하시지만, 그래서 심판의 불을 보내시지만, 희망의 씨를 남겨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석과’란 종자가 되는 과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듬해 농사를 위해 여퉈두었던 씨앗까지 먹어치우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을 이어간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 또한 그러합니다. 예언자는 앞서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풍요 속에 깃든 파멸도 보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메마른 광야에서 피어날 꽃들을 바라봅니다. 작년 4월에 미국 샌디에고에 갔을 때,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거기 목사님이 나를 데려간 곳은 시내에서 근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광야였습니다. 굳이 광야로 데려가신 까닭은 그곳에 황홀하게 피어난 꽃들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많은 꽃들이 시들어버린 때였지만, 그래도 그 척박한 광야를 가득 채웠던 꽃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연해졌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사35:1-2)

물론 이것은 메마른 땅에 피어날 자연의 기적을 노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광야와 같은 현실, 사막과 같은 현실 속에서 지속될 하나님의 은총을 이렇게 구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언자의 이런 비전은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낭만적 낙관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가지고 그런 세상을 만들라는 일종의 명령이 아닐까요? 광야에 메마른 땅에 꽃을 피워내는 삶, 그곳에 씨앗이나 묘목을 심고 물을 주어 가꾸는 끈질긴 노력 없이 이런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광야는 누구나 강인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편리와 풍요로움을 포기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광야 혹은 사막 하면 생각나는 동물이 낙타입니다. 낙타는 몇 백 킬로그램의 짐을 지고 며칠씩 물도 없는 사막을 걸어갑니다. 몽골에 갔을 때 낙타를 타 본 적이 있습니다. 낙타는 사막을 걷다가도 듬성듬성 나있는 사막 지표 식물들을 만날 때마다 멈춰 서서 그 풀을 뜯어먹곤 했습니다. 혀로 풀을 감아 뜯는 소리가 마치 낫으로 풀을 베는 것처럼 경쾌하게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낙타 등에서 내려 그 풀을 뜯어보려다가 하마터면 손을 벨 뻔했습니다. 어찌나 뻣뻣하고 질긴지 제 힘으로 뜯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 풀을 낙타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강인함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별자리
황지우 시인은 <나는 너다>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 ‘503’에도 낙타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면서 시인은 낙타를 향해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지평선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바람에 떠밀려 오는 새날을 보자는 것입니다. ‘새날’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바람에 떠밀려 옵니다. 그런데 시인은 낙타에게 ‘일어나 또 가자’고 말합니다. 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걸어갔던 자취는 이미 모래 바람이 지운 지 오래입니다. 시인은 자기 수중에는 ‘칼’도 ‘경經‘도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보호할 것도 하나 없고, 길을 가르쳐주는 지침조차 없습니다. 암담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가야 합니다. 이 시에게 가장 놀라운 구절은 그 다음입니다. “길은,/가면 뒤에 있다.” 시인은 ‘길은,’이라고 말한 후에 행을 바꾸어 ‘가면 뒤에 있다’고 노래합니다. 분명한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우리가 걸은 그 자리가 길이 됩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가 어떠할지 예측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어느 하나 전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낙타 걸음으로 걸으면 됩니다. 다시 시인에 기대어 말해 봅니다. 시인은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싸움입니다. 새로운 세상과 질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외로운 싸움입니다. 하지만 외롭다고 투덜거릴 것 없습니다. 넘어지거나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곁에 있는 이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시인은 낙타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니까./우리는 自己야.” 그리스도의 꿈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세상 도처에 있습니다. ‘산고수장山高水長 도처유청산到處有靑山‘이라지 않습니까. 산은 높고 물은 유장하게 흐릅니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나 푸른 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적 과학자들이 뭐라 하건, 지혜를 자랑하는 인문학자들이 뭐라 하건, 그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땀 흘리는 ‘자기들’이 있습니다. 황지우 시인은 길을 걷다가 마침내 이런 고백에 이릅니다. ‘우리 마음의 地圖 속의 별자리가‘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지도 속의 별자리가 흐려지지는 않았는지요? 우리가 바라보는 별자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 꿈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별자리를 향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별자리를 따라 걷는 사람들을 가리켜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히13:14). 게오르그 루카치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빛나는 샛별이신(계22:16) 예수를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걷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꽃이 피어나야 합니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날다가 떨어지는 곳 어디에서나 꽃을 피우듯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여건을 탓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를 소명의 자리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사막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영화를 봅니다. 이제 우리도 힘을 낼 때입니다.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지금은 투덜거림을 멈추고 씨앗을 뿌릴 때입니다. 무릎을 굳세게 하여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주위 사람들에게 건네는 친절한 말 한 마디, 다정한 미소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천천히 가도 지향만 분명하면 됩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이들은 용납하고 인내하는 사랑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서로의 속도를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 때만 행군했습니다. 급하다 하여 서둘러도 안 됐고, 쉬고 싶다 하여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야 합니다. 힘 있는 이들은 연약한 이들의 짐을 나눠지고 걸으면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연대입니다. 더디다 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고, 빠르다 하여 으스대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이야말로 새 시대에 꼭 필요한 이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이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함께 모여 손을 잡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지 못하지만, 세상 곳곳에 흩어져 나가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외로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습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습니다.‘ 광야에 물이 솟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는 세상, 우리가 길 없는 곳에서 함께 걸었던 자리가 누군가의 길이 되는 세상이 저만치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망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일에 힘쓰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4월 19일 10시 55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