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3. 주님의 멍에를 메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11:25-30
설교일시 202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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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멍에를 메고
마11:25-30
(2020/08/16, 성령강림 후 제11주)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난감한 시절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홍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가 주춤하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엄중한 상황입니다. 교회가 감염병의 확산 통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담합니다. 이 질병은 소위 기독교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일반 상식과 얼마나 동떨어진 채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예수님조차 볼모로 잡힌 것 같습니다. 제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게 하는 이들에게 미혹되지 마십시오. 씁쓸한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이런 중에 평화운동가인 박노해 시인의 사진에세이집인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에 나오는 글과 사진을 만났습니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농부가 거친 땅을 일구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막을 달구던 태양이 저물어가면/흰 잘라비를 입은 수단의 농부들은/나일 강물을 끌어다 이랑을 내고 씨앗을 뿌린다//거대한 모래폭풍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그동안의 노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말라 죽으면 다시 심고 또 말라 죽으면/다시 심는 일을 원망도 불평도 없이 해나간다//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일강 주변으로/‘푸른 띠’를 이루며 넓어지는 농토와 숲/날마다 반복되는 농부들의 성사聖事 덕분에/오늘도 불타는 사막에 푸른 생명이 자라난다//나는 걸음마다 황무지를 늘려가는 사람인가/걸음마다 푸른 지경地境을 넓혀가는 사람인가“(24쪽)

어려울 때 투덜거리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투덜거림은 약자의 버릇입니다. 하지만 곤경에 처해서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숙명론에 사로잡히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역경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경은 언제든 불청객처럼 찾아와 우리를 괴롭히고, 삶의 방향을 바꿔놓곤 합니다. 모래폭풍이 불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말라 죽는 작물들 위에 새로운 씨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강고한 의지입니다. 희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농토와 숲이 푸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농부들의 그런 끈질김 덕분입니다.

바벨론 땅에 궁벽진 곳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동포들에게 예레미야는 편지를 보내 격려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날이 올 테니 참고 기다리라는 듣기 좋은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집도 짓고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를 따 먹으며 일상을 회복하고, 결혼하여 가정도 꾸리고 알콩달콩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을 사로잡아 간 이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도 말했습니다(렘29:4-7). 거짓 예언자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섣부른 기대를 품었다가 더 큰 절망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삶은 어렵고 곤고합니다. 그렇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불 타는 사막에 푸른 생명을 움틔우는 이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검질기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지혜로운가?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 뜻대로 살 생각도 없는 이들에 대한 심판 메시지가 끝나고, 참 이스라엘을 향한 가르침을 베풀기 전에 나오는 일종의 연결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마11:25).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익숙한 세상을 뒤흔드는 낯선 존재입니다. 그분의 뜻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당신을 선물로 주시는 친밀하신 분입니다. ‘아버지‘라는 친밀한 호칭이 그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아이러니를 꿰뚫어보십니다.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어리석다고 취급되는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현실 말입니다. 이것은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입니다만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일인 것도 사실입니다.

며칠 전 소설가인 이승우 선생도 한 신문 컬럼을 통해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는 철학자인 알랭 핑켈크로트의 에세이 <사랑의 지혜>에서 발견한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어리석음이란 이와 같이 외부의 어떤 말에 의해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방향을 바꾸는 일도 없이 침착하게 자기의 길을 가는 태도 속에서 발견된다.” 얼핏 보면 이런 이들은 당당해 보이고 주체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핑켈크로트는 어리석음의 특징을 ‘틀에 박힘’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자기 속에 갇힘’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기에,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름을 용납하지 않기에 그들은 일쑤 폭력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도 않습니다.

핑켈크로트는 어리석음의 예로 ‘중세의 종교 교조주의’, ‘근대의 이성과 과학 맹신’, ‘혁명을 앞세운 정치적 연설’을 들고 있습니다. 편협한 종교도 어리석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무지한 군중들이 아니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 스스로 경건하다고 확신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체제를 통해 누릴 것을 다 누리던 이들은 자기들이 서 있는 토대를 뒤흔드는 사람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잘 알려진 ‘춤의 왕‘이라는 노래는 이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작사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춤(divine dance)로 표현합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춤으로 본 것이겠지요. 2절 가사입니다.

“높은 양반들 위해 춤을 추었을 때/그들 천하다 흉보고 비웃었지만/어부 위해서 춤을 추었을 때에는 날 따라 춤을 추었다/춤 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 춰라/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의 춤 속에 너 인도하련다”

노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도덕경 56장)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말합니다.

∙안식으로의 초대
주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홀가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안다 하는 이들, 잘 믿는다 하는 이들, 다시 말해 권력을 가진 이들이 우리 삶을 자기들 멋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정해놓은 삶의 규칙을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니 힘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11:28)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저 인생살이에 지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곧 거룩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일러 미츠봇(mitzvot)이라 합니다. 토라에 등장하는 미츠봇은 613가지가 됩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려는 이들은 그 계명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직업, 건강, 가난이 발목을 붙잡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인간 속에 깃든 음습한 죄의 욕망도 그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런 계명을 잘 지키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조롱하고 정죄하는 현실입니다. 종교적 실천이 권력으로 작동할 때가 많습니다. 종교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정결치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채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거룩’이라는 척도가 사람들을 가르고 정죄하는 세상에서 주님은 새로운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는 가르기보다는 품습니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흐려놓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함부로 내치지 않습니다. 비록 거룩한 삶의 자리에서 멀어졌을지라도 그들이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않습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들이 경험한 것은 따뜻함이었습니다. 깊은 공감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제자들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었지만 주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비의 시선입니다. 자비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내겠다고 덤비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뒤에 서린 눈물과 아픔을 봅니다. 주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고, 연약함을 드러내도 괜찮습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면 주님은 모든 이들의 고향이십니다. 주님께로 나아간 사람은 ‘쉼’을 얻습니다. 이 때의 ‘쉼’은 하던 일의 중지나 몸의 평안함이 아니라 구원 체험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
그런데 그런 ‘쉼‘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산 위에서 희게 변화되신 주님의 신비를 경험했던 제자들은 그 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어져야 할 곳은 여전히 눈물과 아픔과 시련과 협잡이 넘치는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에 살면서도 ‘쉼’을 누리려면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데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9-30)

‘내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무겁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벗어던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남’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고통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도다’라고 말하는 것은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없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하는 수고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십니다.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스스로 겸손하다 말하는 이들이 진짜 겸손한 경우를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온유하다고 번역된 헬라어 ‘프라이스’는 기본적으로 ‘길들여졌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된 존재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자기의 존재 이유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함이란 그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겸손을 뜻하는 타파이나스tapeinas는 ‘바닥에서 멀지 않다’는 뜻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짐짓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향한 갈망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자기를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오만한 사람은 자기에게 도취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과거에는 겨릿소가 밭을 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소 두 마리가 함께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다. 척박한 땅을 갈아엎기에 홀로는 힘이 부치기 때문입니다. 일에 익숙한 소는 ‘안소‘라 하고 일을 배우는 소는 ‘마랏소’라 했습니다. 마랏소는 안소의 움직임에 따라야 합니다. 성도로 산다는 것은 주님과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접속될 때 삶이 쉬워집니다. 여전히 곤고한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믿는 이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냉랭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고, 냉소와 혐오가 넘치는 세상에 유머와 사랑의 기운이 넘치는 곳으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자리입니다. 저 누비아의 농부들처럼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하십시오. 하나님의 춤을 추는 이들이 점점 늘어날 때 우울과 절망과 갈등이 줄어들 것입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 속에 거니시길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8월 16일 11시 52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