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이 모두 그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할 방도가 없어서, 다시 위협만 하고서 놓아 보냈다. 이 기적으로 병이 나은 이는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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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개혁기념 주일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루터의 종교개혁 508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개혁은 영어로 reform입니다. 익숙한 단어죠? 형태를 새롭게 하는 것이 개혁입니다. 입던 옷이나 가구가 오래되어 쓰임새가 떨어졌을 때 수선하거나 손을 봐서 다시 입거나 사용하는 것을 리폼이라고 하지요? 저도 리폼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고양이가 식탁의자의 방석을 다 긁어놓았습니다. 새로 의자를 사기는 그래서 인조가죽을 사다가 직접 리폼을 했습니다. 품은 들었지만 의자가 새것 같이 바뀌었습니다. 개혁은 그런 것입니다. 개혁이란 단어의 한자의 의미도 새겨볼만 합니다. 고칠 개改 에 가죽 혁革자를 씁니다. 동물의 가죽은 바로 쓸 수가 없습니다. 많은 가공을 거쳐야 쓸 만한 가죽이 됩니다. 소가죽으로 북을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소가죽을 석회수에 넣고 7,8일간 담가두어 털을 다 빼고, 깍기칼로 가죽표면을 문대어 표면을 깨끗하게 하고, 물론 헹군 후 판자 위에 펼쳐 3,4일을 말리고,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무두질을 거쳐야 북에 쓸 만한 가죽이 됩니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여덟 달이 걸리는 일입니다. 다큐를 보면서 ‘개혁이란 저렇게 힘든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개혁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종교 개혁, 교육 개혁, 경제 개혁, 정치 개혁 등등. 오래되고 망가지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새롭게 고쳐야 할 것이 천지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개혁 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개혁은 나 자신에 대한 개혁이 아닐까 합니다. 나만큼 바꾸기 힘든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할 뿐 자신 또한 고칠 곳이 많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을 해도 자신의 오랜 습성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고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말씀을 묵상하며 나 자신을 포함해 그릇된 많은 것을 고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34살의 젊은 신학교 교수였던 루터는 교황청이 판매하는 면벌부의오류를 지적하는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붙였습니다. 그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였는데 그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음에도 성베드로 성당 건축비 충당을 명분으로 면벌부를 팔아 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교황청은 면벌부를 사면 연옥에 있는 가족들의 영혼이 천국에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교황청은 특별히 오늘의 독일 지역인 신성로마제국에서 면벌부를 많이 팔았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면벌부를 팔아 돈을 모으려던 교황의 탐욕적인 욕망과 바른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돈 몇 푼으로 천국에 가고자하는 사람들의 얄팍한 욕망이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문에 붙인 95개조의 반박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교황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줄 수 없다.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고로 교황이 판매하는 면벌부로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2. 면벌부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면벌부 구매가 아니라 참된 회개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는 것이 면벌부를 구매하는 것보다 더 선한 행위다. 루터가 피워올린 종교개혁의 불은 삽시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한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루터는 가는 곳마다 위협을 당했습니다. 물론 루터에게는 후원자도 있었고 동료와 동지도 있었고 수많은 지지자가 있었지만 적대자들 또한 많았습니다. 적대자들은 루터를 향해 “그를 불태우라. 그를 불태우라” 외쳐댔습니다. 교황과 교황청의 병폐와 부패를 정면으로 공격한 루터는 결국 파문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개혁을 이어나갔습니다. 루터는 무슨 힘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2. 제자들의 개혁
예수님이 하늘로 돌아가신 이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세찬 바람과 불길 같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바람 빠진 풍선 같고, 불 꺼진 냉골 같았던 제자들이 힘차고 뜨거운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다락방에 숨어지내지 않았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예수가 구세주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후에 기도시간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문 앞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40대 남자가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놀라하는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는 예수가 구세주임을 설교했습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제자들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붙잡아다가 심문했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제자들이 불려간 자리는 그들의 스승,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여차하면 자기들도 스승처럼 험하게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기가 찼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나음을 입은 사람이 있으니 반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앞으로는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하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천만 다행입니다.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베드로와 요한은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다시 한 번 도발적 발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지금 살고 죽음을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요? 그 다음 구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제자들 눈앞에는 자기들을 죽일 권한이 있는 사람들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을 보지 않았으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물론 육신의 눈과 귀로는 그들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들었지만 마음의 눈과 귀로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고,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권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율법이, 성전이,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최고의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최고의 권위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병자를 보면 고쳐주고, 가난한 자를 보면 먹여주고, 죽어가는 자를 보면 외면치 않고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진리와 생명, 예수님의 말씀, 최고의 권위였기에 제자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3. 개혁의 시작점
반박문 발표 4년 후 루터의 문제는 신성로마제국 전체와 유럽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루터를 심문하게 했습니다. 심문관은 루터가 쓴 책들을 펼쳐놓았습니다. 그 책들은 루터가 가톨릭의 가르침을 공격하거나 교황과 교황지지자들의 잘못을 지적한 책들이었습니다. 심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이 책들이 그대의 책인가?” “이 책들에 쓴 내용을 철회하겠는가?” 루터는 그 중 첫 번째 질문에만 ‘예’라고 답을 하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내일 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답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터에 앞서 교황의 권위에 맞섰던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루터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 확신의 근원은 성경과 이성입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고로 저는 제가 쓴 책의 내용을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최고 권위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 교황, 교황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최고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과 양심이었습니다. 루터는 바른 것에 권위를 부여하며 살았기에 그릇된 권위에 맞설 수 있었고, 그릇되게 흘러가던 기독교를 바르게 개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혁이라고 해서 다 옳은 개혁이 아닙니다. 옳은 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개혁이라야 옳은 개혁입니다. 그릇된 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입니다. 장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막감어류수人莫鑑於流水, 이감어지수而鑑於止水. 사람이란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말고, 멈춰 있는 물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유수는 ‘흐르는 물’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면서 자주 변하기에 절대적 권위를 지닐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권력자의 말, 사회의 그릇된 흐름, 우리 자신 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런 것은 옳을 때도 있지만 그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와는 다르게 지수는 ‘멈춘 물’을 뜻하는 말이면서도 변하지 않기에 절대적 권위를 지닌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성, 양심, 사랑과 같은 것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흐르는 물이 아니라 멈춘 물 앞에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의 일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듯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절대’를 본 것입니다. 절대를 본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절대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과 허물, 자신이 절대가 아님을 고백하는 데서 새로운 삶, 올바른 개혁이 시작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서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바울은 절대 앞에서 자신에 대해 절망하였고, 그 절망을 거쳐 예수라는 올바른 기준을 붙들게 되었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새롭게 정립한 후 초대교회 또한 새롭게 개혁할 수 있었습니다.
바른 개혁은 바른 것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이를 고치려 할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기준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개혁’의 ‘혁’은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 인간의 가죽을, 인간의 마음 가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 마음만큼 개혁하기 어려운 게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못 길이 든 마음의 가죽을 바르게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잘못 길이든 마음은 참된 절대 앞에서 무너져야 합니다. 내 마음의 가죽이 바른가 그른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압니다. 주변에 나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보다 힘들어하고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다면 내 마음의 가죽이 그릇되게 길이 든 것입니다. 개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나 나 자신을 절대화하지 마십시오. 참된 절대이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고백하고 정직하게 절망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기준 삼아 하나씩 하나씩 자신을 개혁해 나가십시오. 그런 노력을 지며리 해나갈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베드로와 바울과 루터와 같은 개혁의 일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자신을 절대화하거나 다른 이들을 향해서만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부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일꾼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