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 어른이 된다는 것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19:27-29
설교일시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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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창19:27-29
(2021/02/07, 주현 후 제5주)

[다음날 아침에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나서, 주님을 모시고 서 있던 그 곳에 이르러서, 소돔과 고모라와 넓은 들이 있는 땅을 내려다보니, 거기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마치 옹기 가마에서 나는 연기와 같았다.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

∙익숙한 세계 떠나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고달프시지요?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면서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창8:21, 22)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인간의 슬픔과 고통과는 무관하게 계절은 어김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남녘 땅에서는 벌써 철 이른 꽃들이 무심하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만 홀로 유정하여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갑니다.

반복되는 생명의 리듬이 우리 삶의 날실이라면, 부여받은 시간은 씨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의 리듬에 순응하면서 우리 시간을 아름답게 활용하여 삶의 멋진 무늬를 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코로나19 시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찾아와 우리 삶의 토대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흔들림은 누구에게나 괴롭습니다. 흔들림이 지속되면 멀미가 납니다. 삶의 여정은 어쩌면 그러한 흔들림을 겪으며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는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통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해 갔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첫 장면은 익숙한 세계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속한 하란을 떠나 그는 낯선 땅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답답함을 느낄 때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쉽게 떠나지는 못합니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취약해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곳은 나를 지켜줄 사람 혹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자기 땅에서 유배된 이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훌쩍 떠나는 이들은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익숙한 세계를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인상 깊게 그리고 있습니다.

“떠나기 위해 갈 곳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떠나지 못한다. 어디를 향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부터 움직이는 것이 핵심이다. 도착해야 할 어딘가를 향해서가 아니라, 떠나야 할 어딘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야 떠날 수 있고, 그래야 어딘가에 이를 수 있다. 도착할 그곳은, 그곳이 어디든, 도착하기 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p.72)

아브라함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응한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하나였습니다. 어디를 가든 복을 매개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조카인 롯도 동행했습니다. 이미 장성한 사람이었겠지만 아브라함은 롯의 보호자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다른 이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참 무거운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책임을 맡은 자는 울 수도 없고, 무기력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끔 우리는 홀로 많은 자식들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고 무거울 때도 있고, 슬픔과 절망이 걷잡을 수 없게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기어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돌보아야 할 그 자식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 보면 지켜야 했던 이들이 오히려 그를 지켜주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책임의 역설입니다.

∙방랑
아브라함의 삶은 떠남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란에서 세겜으로, 그곳에서 베델로, 네겝으로, 급기야는 이집트까지 내려갔습니다. 낯선 풍경과 풍물을 보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였습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취약해지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위기도 겪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위기를 넘겼지만 더 이상 그 땅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일족은 다시 척박한 네겝을 거쳐 베델 근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고단한 시간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사이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성서기자는 그가 어떻게 부를 획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조카인 롯도 이미 부자가 되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목초지와 우물은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곳은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지내며 가축을 키우기에는 비좁은 곳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숙질간의 갈등이 격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창조적 이별을 제안합니다. 같이 지내며 미워하는 것보다는 서로 떨어져 그리워하는 게 나을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할 권리를 부여합니다. 이게 어른스러운 일입니다. 가끔 이런저런 일로 가족간의 분쟁을 겪는 이들을 봅니다. 대개 재산 문제 때문입니다. 절대 손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일단 사로잡히면 동기간의 사랑은 가뭇없이 스러집니다. 이익은 아주 힘이 셉니다. 벽을 만들기도 하고 허물기도 합니다. 바울은 교인들 간에 송사 문제로 어지러운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고전6:7)

‘차라리‘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심정이 읽히는 단어입니다. 이익은 사람들을 가르고 사랑은 연결시킵니다. 과도하게 자기 이익을 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의의 원리를 서슴없이 위반하는 이들 앞에서 늘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자기 권리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기독교 윤리를 설명할 때 흔히 두 가지를 꼽습니다. 하나는 특권의 포기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차라리’라는 단어는 그런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의미에서 믿음직스러웠고 어른다웠습니다. 롯은 물이 넉넉한 요단 들판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평지의 여러 성읍들을 돌아다니다가 소돔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서 기자는 그러한 선택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 채 아주 간결한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창13:13).

∙책임적 존재
아브람은 헤브론 땅으로 이주하여 거기서도 주님의 제단을 쌓아서 바쳤습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14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고대 세계의 잦은 전쟁이 배경입니다. 중심 내용은 봉신 계약을 맺었던 팔레스타인의 부족 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시날과 엘람 왕이 군사를 일으켜 그 땅을 유린했다는 것입니다. 진압군과 싯딤에서 맞서 싸우던 소돔과 고모라 왕은 결국 패배했고, 쳐들어온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약탈하는 와중에 롯도 그들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 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롯을 구출해냈습니다. 우리가 알던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전쟁 영웅의 모습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가 사사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봅니다. 주변 국가들의 억압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조 아브라함의 영웅적 승리를 제시함으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각색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친족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아브라함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 끝에 나오는 것이 멜기세덱의 축복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이하며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창15:1)고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의 배치에 주목합니다.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까닭이 뭘까요?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순종의 챔피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그는 조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있지만 노아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책임감’입니다. 노아는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소돔 성을 심판하려는 천사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창18:25a)라고 말합니다. 거룩함 앞에 선 사람은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두려움을 무릅쓴 채 소돔의 의인들을 위해 구하려 했던 것입니다. 영연방 최고랍비였던 조너선 색스는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의 차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합니다. “순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Obedience is not enough“.(Rabbi Jonathan Sacks, Genesis: The Book of Beginnings, Maggid Books & The Orthodox Union, p.45)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적인 이해를 뛰어넘어 공적인 책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용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내를 빼앗길 위기 앞에서도 무기력하기만 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는 삶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요구에 응답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리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조건 속으로 들어오신 분을 우리는 믿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고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의 도리를 잊어버린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살아남은 것은 롯과 그의 가족들뿐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롯을 구하여 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 의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사람 롯은 구하여 내셨습니다. 그 의인은 그들 가운데서 살면서, 보고 듣는 그들의 불의한 행실 때문에 날마다 그의 의로운 영혼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벧후2:7-8)

롯은 소돔에 살면서도 소돔 성 사람들의 가치관에 녹아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낯선 이들을 모욕하고 함부로 대함으로 자기들의 우월적 지위를 드러내고 싶어한 것이 소돔의 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살면서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의로운 사람 롯이 겪은 영혼의 고통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이야기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창19:29)

롯이 가까스로 자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서 기자의 해석입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해합니다. 물론 그 이해가 모두에게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전15:10a)라고 말했습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습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내 삶을 기획한 것처럼 보여도 어떤 우연이, 혹은 어떤 필연이 우리를 이 자리까지 이끌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들어 내가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누군가의 기도와 바람 덕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어거스틴은 자기가 한정 없는 방황을 끝내고 주님께 귀의하게 된 때를 추억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의 신실한 종, 내 어머니가 제 자식이 죽어서 통곡하는 어떤 어머니보다 더 애절하게 나를 위해 당신께 눈물로 부르짖고 있을 때 당신은 높은 곳으로부터 손을 펴서 저를 이(마니교의) 깊은 어둠 속에서 구해 주셨습니다.“(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3권 11장 19절, 선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p.113)

롯은 아브라함 덕분에,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강제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도록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도록 하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복의 매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험하고 거친 세상이지만 오늘도 내일도 복의 통로가 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2월 07일 10시 24분 1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