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9
(2021/04/11, 부활 후 제1주)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자기와 대면하는 시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의 4차 대유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감염의 매개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당분간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였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을 고대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허탈한 결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시민 사회의 상식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혼돈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성전 정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체포, 십자가 처형, 그리고 빈 무덤에 이르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제자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려던 꿈은 아침 안개처럼 흩어지고, 공허와 두려움과 환멸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침묵 속으로 침잠하게 만든 것은 자기들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한 슬픈 자각이었을 겁니다. 예수와 함께라면 죽음의 자리조차 마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고난의 현장에서 달아났던 자기들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떠올랐을 겁니다. 오그라지고 멍이 든 자기들의 마음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참담한 노릇이 또 있을까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마음은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당신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라는 여종의 물음에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던 그 시간이 자꾸 떠올라 그는 회오와 더불어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베드로가 장막처럼 드리워졌던 침묵을 깨며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라고 응답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며 주님을 따라갔던 그가 고기를 잡는 옛 삶으로의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슬픈 전락입니다. 하지만 배를 띄우고 그물을 내려 보았지만 그들은 그 밤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드리운 허망함을 보여주듯 그물은 비어 있었습니다. 빈 그물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c)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그 때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순간입니다.
∙새로운 만남
동틀 무렵에 그들은 한 음성과 만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아득한 메아리 같은 음성이었을 겁니다. “못 잡았습니다.“ 허탈감이 담긴 소리였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력에 이끌리듯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하시던 제자는 즉시 자기들에게 말을 건네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아차립니다. 그 제자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고,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배를 해안으로 접근시켰습니다. 뭍에 올랐을 때 그들은 숯불 위에 생선과 빵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르십니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베드로가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리자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감동합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는 말은 단순하게 그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속에 내포된 의미가 참 다양합니다. 표현된 말보다 그 속에 감춰진 말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는 말 속에 감춰진 말은 무엇일까요? ‘힘들지?‘, ‘너무 죄책감에 시달릴 것 없다’, ‘너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나는 너희를 여전히 신뢰한다’. 가없는 사랑입니다. 그들의 못난 행위에 대한 판단이나 비평은 일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아픔과 허탈감 그리고 부끄러움까지도 감싸안으실 뿐입니다. 시편 시인도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꾸짖지 않으시고,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103:13-14)
이날 제자들이 경험한 것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을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처럼 감동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주님의 식탁에서 제외되는 이들은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 사이
아침을 먹은 뒤에 주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으로 지칭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반석처럼 우뚝 선 베드로가 아니라, 여전히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흔들리고 있는 시몬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친밀함으로의 초대입니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혹은 격隔을 넘어서라는 요청입니다. 시몬은 이제 계속 배워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주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영어로 믿는다는 뜻의 단어 ‘believe‘는 고전 영어 ‘be loef‘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끼다, 사랑하다, 친하게 대하다‘라는 뜻입니다. 현대 영어로는 ‘belove‘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구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하신 어떤 말씀이 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라틴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의 단어 ‘credo‘는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뜻입니다(Marcus J. Borg, Speaking Christian, Harper One, p.118-120). 사랑은 자기를 내어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계명을 떠올려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막12:30)
주님은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이들은 사랑하냐고 묻을 때 사용된 헬라어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차이를 들어 그 질문 속에 매우 심오한 뜻이 담긴 것처럼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같은 질문의 반복입니다. 반복되는 질문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을 깊이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처럼 단호하게 자기 확신에 근거하여 대답하지 못합니다. 과도한 자기 확신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 대답은 대답인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 머뭇거림이야말로 신앙이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확신에 차서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독교인들을 보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요?
∙새로운 위임
주님은 시몬의 대답을 듣고는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하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는 말과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 떼’라는 말은 에스겔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면서도 양 떼는 먹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겔34:4)
주님은 일찍이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양 떼를 먹이는 것, 그래서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는 것이 시몬 베드로에게 위임된 사명입니다. 베드로가 그럴 수 있을까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자라야 연약함에 휩싸인 사람을 도울 수 있음을, 넘어짐의 쓰라림을 아는 자라야 속절없이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음을,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해 본 사람이라야 방황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음을, 자기에게 깊이 실망해 본 사람이라야 자괴감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짐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음을.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더 나아가 오늘의 교회에 위임해 주신 주님의 ‘어린 양 떼’는 누구입니까? 시대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를 세운 로제 수사는 자기 시대의 가장 곤고한 이들 곁에 머물기 위해 마음 썼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는 ‘독일군 포로들’을 보살폈고,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전쟁 고아들을 보살폈고, 유럽으로 난민들이 유입될 때에는 ‘난민들’을 받아들여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님의 위임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미얀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라고 명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대당하는 어린이들과 여성, 이주 노동자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세월호 참사 7주년이 다가오도록 거리를 떠날 수 없는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가설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어린 양 떼’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걸작품인 창조 세계입니다.
인간의 탐욕스런 경제활동으로 인해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문제는 지금 지구촌에 속한 모든 이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습니다. 얼마 전 보도에서 보았습니다만 프랑스 하원은 ‘기후에 관한 시민 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화국은 생물 다양성과 환경 보전을 보장하고, 기후 변화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문구를 헌법 제1조에 삽입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앞으로 상원 통과와 국민투표까지 거쳐야 하지만,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조치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보살펴야 할 ‘어린 양 떼’가 정말 많습니다.
주님은 자칫하면 부끄러운 기억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아무런 창조적인 활동도 할 수 없었을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새로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 소명은 고통과 아픔을 통과한 것이기에 더욱 소중합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그 사랑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깨어나게 합니다. 신앙생활은 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서 나와 ‘주님의 어린 양 떼’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자기 생의 무게에 짓눌려 그 아름다운 일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소명을 받아들인 시몬 베드로의 삶이 철저히 바뀔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를 이끌 것입니다. 그는 다만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부활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리고 명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 삶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