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을 넘어
요12:20-28
(2021/03/21, 사순절 제5주)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
평화의 주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노아 시대가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창6:5-6). 세상은 ‘사랑’이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리곤 합니다. 미얀마에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총구 앞에 서는 이들은 인간이 얼마나 숭고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벌어진 피살 사건은 우리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백인 우월주의에 근거한 인종주의와 여성 혐오가 빚어낸 참극입니다. 인종주의든 여성 혐오든 사람을 피부색, 젠더, 지역, 종교에 따라 가르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근본적 부정입니다. 매스컴은 범인이 교회에 잘 다니는 기독교인이라고 전합니다. 찬양단에서도 활동하고 예배 후 뒷정리도 잘 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른다면 도대체 교회에 잘 다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평생 허망한 편견과 싸웠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갈3:28).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믿음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빌3:18).
예수님은 사람을 가르고 차별하는 일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진력을 다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른다는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장벽 쌓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담합니다. 1세기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종교적 언어가 우리의 거짓 자아를 덮기 위한 포장지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를 가장한다지 않습니까?
∙영광을 얻을 때
오늘 우리는 예수를 길로 고백하면서도 그 길은 한사코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길이 없는 곳을 앞서 걸으셨습니다. 거룩함과 속됨 사이를 오가셨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이 편견 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길을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리’가 아니라 ‘장벽‘을 세우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을 일러 제자라 합니다.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세계에서 예수의 길은 낯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주류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은 따르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당연히 인기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높아짐의 길이 아니라 낮아짐의 길이었으니 말입니다. 어느 때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그 길은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따라 걷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어리석은 사람들이 세상을 정화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임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벌어진 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습니다. 그들은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의 결말부와 연결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하는 대규모 군중들을 보며 말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요12:19)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셨는지 만나지 않으셨는지, 만났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요한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의 등장은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다’는 말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영광의 때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보내신 분이 맡기신 사명을 다 이루고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심을 것인가?
그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비장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12:24) 이 말을 자연법칙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분은 없겠지요?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한 알은 다름 아닌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그에게 죽음은 모든 희망의 무덤이 아니라 더 큰 생명의 모태입니다. 고진하 시인의 ‘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시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에 이끌려 뒤꼍으로 돌아가다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는 흰줄표범나비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더듬이와 몸통은 벌써 거미에서 파먹혔는지 두 날개만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가여운 생각에 손끝으로 두 날개를 집어올리다가 시인은 예기치 않은 장면과 마주칩니다. 거미줄이 쳐진 나무 기둥에 깨알같은 노란 알들이 잔뜩 슬어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장엄함에 놀란 시인은 숙연해져서 말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푸른 햇살 아래 밀어내놓은 신생(新生)의 꿈들!“(고진하 시집, <우주배꼽>, 세계사)
시인의 심상 속에 흰줄표범나비와 예수님이 겹쳐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이,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생명의 영원함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반대 논리가 지배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려 합니다. 나의 정당함을 강변하기 위해 누군가를 혐오합니다. 다른 이들의 가슴에 증오의 씨앗을 심는 이들도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만, 트럼프 시대는 사람들 속에 숨겨져 있던 그 인종주의적 성향이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하는 격발장치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미국이나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시아인 혐오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고집스럽게 ‘우한 바이러스’라고 칭하는 이들이 뿌린 씨가 싹이 튼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단어 하나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을 몰살하기 위해 나치가 사용한 공식 암호는 ‘최종 해결책’이었습니다. ‘제거’, ‘박멸, ‘학살’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도덕적인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p.147-150)
자연 다큐멘터리는 가끔 초식동물들이 먹이를 두고 혹은 짝짓기 대상을 두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단 승패가 결정이 나면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평화롭게 풀을 뜯습니다. 원한감정 따위는 없어 보입니다.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경우는 사뭇 다릅니다.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크게 대립한 후에는 화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흔적이 오래 남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그 사건을 언어화하여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어는 인간의 지식 정보를 축적하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지만,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릴 때도 많습니다. 단정적인 언어, 불화를 일으키는 언어, 편견에 찬 언어, 무례하고 몰상식한 욕설, 혐오를 조장하는 언어, 비하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내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됩니다.
주님은 밀알 이야기를 다른 말로 풀어 친절하게 설명하십니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요12:25) 이 말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비루한 생을 유지하기 위해 영혼을 팔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가리킵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늘 자기의 부족함을 자각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망이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감각과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율해야 합니다.
∙아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통렬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선 자리가 우리가 선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픔의 자리, 헌신의 자리에 서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님이 머무시는 곳을 한사코 피하면서 살고 있던 것은 아닌지요? 이제라도 할 수 있는 한 자주, 그 자리에 서는 연습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썩어지는 밀알 한 알의 길은 유쾌하고 신나는 길은 아닙니다. 꺼려지고, 회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주님이 흔쾌히, 가볍게 당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넘겨드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도 치열한 고투의 시간을 거치셨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수십 번 되뇌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아파테이아, 곧 감정이나 정념에서 해방된 상태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너무나 인간적이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고뇌의 깊이를 다 맛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히4:15).
중요한 것은 흔들림 이후입니다. 주님은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당신의 마음의 고삐를 강하게 당기며 말합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요12:27c) ‘아니다‘는 마치 흔들리는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한 몸부림처럼 들립니다. 주님은 무감각하게, 덤덤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 괴로움을 뚫고 나아가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요12:28c)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장소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서 매우 중합니다. 안락하고 평안하고 안전한 자리에 머물면서 주님의 십자가가 생명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증오와 혐오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이런 세상에서 신앙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기가 매우 어렵지만, 죽어가면서도 알을 슬어놓았던 저 흰줄표범나비처럼 우리도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친절함과 온유함으로, 자비와 깨끗한 마음으로 이웃들의 마음에 봄소식을 가져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평화의 파종자가 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