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0. 삶을 축제로 바꾸는 지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잠 15:13~18
설교일시 2021-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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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축제로 바꾸는 지혜
잠15:13-18
(2021/07/25, 성령 강림 후 제9주)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밝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너를 상하게 한다. 명철한 사람의 마음은 지식을 찾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음을 즐긴다. 고난받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다 불행한 날이지만,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잔칫날이다.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 화를 쉽게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싸움을 그치게 한다.]

• 이 세상 어딘가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삼복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어서인지 무척 덥습니다.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지역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방호복을 입고 코로나 검사와 방역에 종사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집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느끼는 절망과 공포감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전에는 북적거리던 동네 먹자골목이 저녁 6시 이후가 되면 적막할 뿐만 아니라, 문을 닫은 가게도 아주 많습니다. 기약 없는 미래가 주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햇빛은 찬란한데 우리 마음에는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난감하다 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전11:4)는 전도서 기자의 말은 우리 삶의 엄정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꿉니다. 유토피아, 샹그릴라, 엘도라도, 엘리시온, 무릉도원 등 낙원에 대한 꿈은 오히려 삶이 힘겹다는 반증입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것처럼, 근심과 걱정은 기쁨의 다른 짝입니다. 인간은 그 양극 사이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모든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심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고립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혼자라는 생각에 골똘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가끔 소토메마치에 있다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비’를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이렇듯 슬픈데, 주님, 바다는 너무나 푸르기만 합니다.” 일종의 부조화입니다. 무심한 자연은 도무지 우리가 겪고 있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무심함이 오히려 고맙기도 합니다. 우리 삶을 냉철하게 바라보도록 해주니 말입니다.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은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소중한 보물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 혹은 아름다운 사람으로서의 가능성 말입니다. 길을 걷다가 표정이 밝고 선선한 사람을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콘 화가들은 성인들을 그릴 때 후광을 함께 그렸습니다. 그들 속에 깃든 빛을 그렇게 형상화한 것일 겁니다. 속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정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젊은 시절에 홀로 읊조리곤 하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라는 곡(박희진 작사, 한태근 작곡)입니다.

1.이 세상 어딘가에 남이야 알든 말든 착한 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2.이 세상 어딘가에 탐욕과 분심 눌러 얼굴이 빛나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3.이 세상 어딘가에 청빈을 감수하고 덕행에 힘쓰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씻기운다
4.이 세상 어딘가에 하늘을 예경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기뻐서 눈물난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이 세상 어딘가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 탐욕과 분심을 눌러 얼굴이 빛나는 사람, 청빈하게 살면서 덕행에 힘쓰는 사람, 하늘을 예경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말입니다. 그들은 있음 그 자체로 우리 마음을 밝게 하고, 정화시켜 줍니다. 우리 마음의 변화는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들이 있음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좋다/싫다, 예쁘다/밉다, 춥다/덥다, 기쁘다/슬프다와 같은 일차적인 지각을 사유의 체로 거르는 것이 생각입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들은 그저 팔자 좋은 사람이려니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속의 빛이 어두워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 환대는 고립에 대한 저항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시련과 고통을 겪고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 했습니다. 명철한 사람은 생의 부정적 계기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리고, 그 고통 속에서 값진 보화를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후에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보고 격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애로 고통 받는 가족을 돌보던 이들이 다른 가족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것을 인격으로 바꾸었기에 그들의 삶은 향기롭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겪는 환난을 자랑했습니다.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b-4). 환난, 인내, 단련된 인격, 희망이라는 이 일련의 흐름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의 빛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한 사건입니다. 환난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일이야말로 믿음의 신비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고난받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다 불행한 날이지만,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잔칫날”(잠15:15)이라고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런 대로 살만한 데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의 렌즈, 선망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렌즈를 바꾸지 않는 한 그들의 불행 의식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아주 어렵게 살면서도 유쾌하고 즐겁게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상의 모든 순간이 그에게 주는 선물에 집중합니다. 힘든 일을 만나도 거기에 온통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건 좀 쓰군’ 하고는 즉각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사는 일이 영 심드렁하고 권태감이 밀려올 때면 ‘무슨 좋은 일 없나?’ 하며 주위를 기웃거립니다. 시편 시인은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다’(시89:15)고 노래했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작은 일에도 함께 기뻐하고 경축하는 이들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다시 찾은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여인은 불을 밝히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찾다가 마침내 찾으면 벗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눅15:9)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눔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축제는 사람들을 연결시킵니다. 원로 장로님 한 분의 가정과 목회실이 은밀하게 즐기는 축제가 있습니다. 장로님 집에서 키우는 댄드롱이라는 화초에 꽃이 피면 장로님은 언제나 꽃 사진과 함께 ‘올해도 꽃이 피었네요’라는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그것은 함께 기쁨을 나누자는 초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함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며 즐거워합니다. 벌써 여러 해 이어온 나름의 전통입니다.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그런 의례는 무료할 수도 있는 시간을 건너는 징검다리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벗들과 이웃들을 우리 삶에 맞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그런 환대와 환대받음의 경험이야말로 사람을 고립시키는 이 세상에 대한 강력한 저항입니다.

• 허세 내려놓기
사람들이 자기 일상을 잔칫날로 경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욕망이 상향평준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본주의 체제는 끝없는 불만족을 만들어냅니다. 자족하며 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적은 자족하는 사람입니다. 소비사회에서 만족은 급진적 태도라지요? 일찍이 성 어거스틴은 속세의 희망을 끊고, 오로지 하나님을 찾는 삶을 추구한다 하면서도 세상 재미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진정한 행복을 ‘피하면서 찾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제 6권 11장, p.156).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평가나 시선에 예민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겉꾸미는 일에 시간과 돈을 많이 들입니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바람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에 치중할수록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무한경쟁의 굴레에 갇히는 순간 만족감은 자취를 감추고 결핍감이 확고하게 우리 의식을 사로잡습니다. 이전에 비해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다른 이들과의 그런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인정 욕구가 강하고, 다른 이들의 애정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반면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상처도 잘 받고, 시기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경우든 그들의 영혼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허세만 내려놓아도 삶이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잠15:16-17)

‘A 하는 것이 B 하는 것보다 낫다’는 문장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똑같은 메시지의 변주입니다. 재산이 적은 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재산이 많은 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재산은 적지만 주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산다는 그는 빈곤한 사람이 아닙니다. 반면 재산은 많은데 이기적이고 오만하다면 그는 진짜 가난뱅이입니다. 원하는 것을 즉각 누리며 살지 못한다 하여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원하는 것을 다 누리며 산다 하여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누릴 걸 다 누리면서도 얼굴에 독살이 박힌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합니다.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서 생명의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재산이 많거나 적으나 ‘하나님 경외’와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자기 삶이 사랑의 빚임을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 평화 만들기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힘든 일입니다.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어떤 때는 든든하게 느껴지지만, 짐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기복을 겪습니다. 가족 간이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때는 너그럽게 받아주던 일도, 어떤 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다툼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가족 간의 관계가 제일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서는 바깥에서 쓰고 있던 가면 즉 사회적 자아를 벗어던지고 편히 쉬고 싶은데 그 마음을 몰라주면 원망의 말이 터져 나옵니다.

사는 동안 참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사건건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분쟁을 그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속에 화가 많은 사람일수록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 경청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합니다. 자기들의 상처와 아픔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품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에 이끌리는 우리 마음을 자꾸만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맑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우리라고 왜 아픔이 없겠으며 상처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노래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18세기 유대교의 랍비인 코츠커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자에게는 세 가지 길이 열려 있다. 사다리의 첫 단에 서 있는 자는 운다. 보다 높은 단에 서 있는 자는 잠잠하다. 그러나 맨 윗단에 서 있는 자는 슬픔을 노래로 바꾼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7, <진리를 향한 열정>,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225)

슬픔과 고통을 노래로 바꾸는 사람이라야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하늘빛으로 조율된 영혼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마음의 돛을 성령을 향해 펼칠 때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갈5:22-23)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그 열매를 누리십시오. 인생의 어려움 없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경축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만드는 사람, 무거워진 마음을 씻어주는 사람,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소명을 기쁘게 감당하는 한 주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7월 25일 11시 59분 4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