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9. 아론의 시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 32:1~5
설교일시 202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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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시간
출 32:1~5
(2022/12/04, 대림절 제2주)

[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 아론에게로 몰려가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시오."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 형제 이야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매해 우리는 초기 교회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담아 주님께 청합니다. “오소서!” 하지만 주님은 이미 사람의 아들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인간 역사가 나아가야 할 목표가 되셨습니다. ‘오소서’라는 기도는 그렇기에 오시지 않는 분에 대한 초대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중심이 되어 달라는 청입니다. 주님은 삶에 멀미를 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b).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성경은 삶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빛을 지향하지만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룩하게 살기 원하면서도 속됨으로 전락하곤 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형제들의 갈등 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나면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쌍둥이였던 에서와 야곱은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을 두고 다투다가 철천지원수가 되어 갈라섰습니다. 요셉과 형제들도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물론 형제간의 갈등 이야기는 가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아름다운 화해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화해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랜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출애굽기에서 주목해야 할 형제는 모세와 아론입니다. 둘은 갈등이 아니라 조화로운 형제관계의 모범처럼 보입니다. 아론은 동생인 모세가 출애굽 사건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기꺼이 그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형이기 때문에 더 큰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익힌 애굽의 지혜를 인정했기 때문일까요? 모세가 역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아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론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려 하지만 모세는 선뜻 그 소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출 4:10)이어서 그 큰 소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고 거듭 약속하시지만 모세는 주저합니다. 하나님은 말을 잘 하는 사람 아론을 너를 도울 거라 말씀하십니다. 그제야 모세는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 상호보완적인 리더십
모세와 아론은 히브리 성경이 보여주는 두 가지 리더십의 원형을 잘 보여줍니다. 모세는 앞에서 이끄는 리더입니다. 그는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키면서 백성들을 독려했습니다. 이런 리더들에게 필요한 것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방향을 알아차리는 지혜, 어려움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 그리고 완급조절 능력입니다. 너무 빨리 가도 안 되고 너무 늦게 가도 안 됩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 이야기가 전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이스라엘은 진에 더 머물고 싶어도 떠나야 했고, 머물면 더 걸어갈 여력이 있어도 멈춰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어긋남에 대해 불평을 터트리곤 했지만 그때마다 모세는 하나님의 리듬을 따르도록 이스라엘을 독려했습니다. 모세는 늘 외로웠습니다. 맨 앞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힘겨운 일입니다.

아론은 백성들 가운데 머물며 그들을 다독이는 리더였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백성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해소해 주기 위해 노력했고, 상처와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주었습니다. 누이인 미리암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이야기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아론이 수행했던 제사장의 직무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만으로 새로운 역사는 열리지 않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전 7:16)라고 충고합니다. 비겁한 처세술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젊은 날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금 나이가 들고 보니 이게 참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로움 혹은 나의 옳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여백이 사라지고, 여백이 없으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더딘 사람은 조금 기다려주고, 조급한 사람은 달래기도 하면서 함께 나아갈 때 공동체는 든든하게 형성됩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상처입기 쉬운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이 관점을 조금 달리 말하자면 모세는 변화를 이끄는 사람,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가치는 정의(mishpat)와 공의(tzedek)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비옥한 땅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정의와 공의가 살아있는 세상입니다. 시편 시인은 그런 세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시 85:10-11). 물론 그런 세상의 기초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hesed)입니다. 모세는 그런 비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론이 하는 일은 시간을 성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돕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시간은 단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의 시간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롭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반복되고 지속되는 시간 덕분에 우리 삶은 가지런해집니다. 예측 가능성도 삶의 중요한 일부분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며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창 822)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하나님의 은총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통로입니다. 일상의 모든 때를 아름답게 살아내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일상의 성화야말로 아론에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소명은 거룩한 것(kodesh)과 속된 것(hol), 정결한 것(tahor)과 부정한 것(tamei)을 분별하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 우상 없이 기다려라
하지만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배우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론이 저지른 큰 잘못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부재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불안해졌습니다. 불안이라는 정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습니다. 불안은 실체가 분명한 공포와는 전혀 다른 정서입니다. 불안에 사로잡히는 순간 막막함과 무력감이 엄습합니다. 그는 자기 삶이 미끄러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불안한 영혼은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불안은 인간의 유한함에서 비롯되는 근본감정이기에 실체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불안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들은 뭔가 그 불안의 대용물을 구합니다.

모세의 부재가 빚어낸 두려움 혹은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아론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출 32:1).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말이 그들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인간의 연약함이 이와 같습니다. 든든한 지도자였던 모세는 ‘모세라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뢰의 철회입니다.

아론도 다를 바 없었던 것일까요? 그는 백성들의 요구를 물리치지도, 준엄하게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모아 오라고 한 후에, 모아진 것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만들다’라는 단어 속에 파국의 징조가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 자기 욕망을 따라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송아지 상이었을까요? 소는 애굽을 비롯한 고대 세계에서 신의 형상으로 숭배되었고, 폭풍과 풍요의 신인 바알도 황소로 표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우상을 만든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가 만들어졌을 때 백성들은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신이다”(출 32:4)라고 외쳤습니다. ‘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엘로힘’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들의 행위를 책망하면서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는 ‘자기를 위하여’라고 새길 수 있는 말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행위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도 시시때때로 이런 유혹에 직면합니다.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요청에 응답하는 순간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사는 용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법궤를 어깨에 멘 제사장들은 아직 물이 넘실거리고 있는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 안에 있던 베드로는 ‘오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적극적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 불안을 넘어 기쁨과 충만의 시간 속으로
모세를 기다리지 못한 아론의 시간은 불안으로 채워진 시간이었습니다. 신뢰에 실패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아론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때로는 조급증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불안에 잠식당한 영혼은 외적인 것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지금도 금송아지는 다양한 형태의 동상 만들기 욕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 건물, 특정한 인물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 등이 그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중들의 인기에 편승하여 스스로 금송아지가 된 종교인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에 걸립니다.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 백성들의 불안감을 달래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지도자가 단호해야 할 때 어중간하게 타협을 하면 벌어질 사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불행한 사건은 결국 이 일의 주동인물들에 대한 징계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사실 이 일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징계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화를 내셨지만 그를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두고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론은 이 일 이후에 출애굽 공동체가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일에 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예언자적 비전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없습니다. 비전을 공유하는 이들이 서로를 깊이 신뢰하면서 공동체를 이룰 때 새로운 세상은 도래합니다. 제사장들은 예전(禮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현재화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기는 우상 없이 살아갈 용기가 있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은 우리 곁에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맞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관계 속에 주님의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됩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지친 이들 곁에 다가가 설 땅이 되어주고,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불의한 이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도록 저항할 때, 우리의 시간은 불안이 아니라 기쁨과 충만의 시간으로 바뀔 겁니다. 이런 아름다운 실천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거룩함으로 채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2월 04일 11시 58분 29초